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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승주

by 마음의 온도


칙---


사거리 빨간 신호등 앞에 잠시 멈춰 선 듯 고요하던 공기가 파르르 떨린다.

승주는 들키면 안 되는 일을 하는 아이처럼 조심스레 다이얼을 오른쪽으로 돌린다.


칙-- 치직----
우리의 눈을 황금으로 물들였던 은행잎이 노오란 비가 되어 내리는 오후입니다.


행여 변심할까, 다이얼을 잡고 있는 손가락 끝을 살그머니 하나씩 뗀다. 검지 이어서 엄지.

잡티 없는 맑은 소리가 나무 교실에 공명처럼 퍼진다.


오늘 나무 교실에 새로운 멤버가 들어왔다.

책상과 의자, 몇 권의 책, 커피메이커와 티백 케이스, 여섯 개의 머그잔만 놓인 이 공간에는 가능한 무엇도 들이지 않기로 했다. 무언가 들이는 순간 '내 것'이 되는 버거움을 피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람은 동적인 동물이다.

결심도, 마음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유턴한다.


처음에는 작은 라디오 하나만 들일 예정이었다. 되도록 작고 되도록 소박한.

초록색 네모창에 넣었던 소형 라디오는 레트로 라디오로 바뀌고, 결국 올인원 턴테이블 오디오 시스템이 단단한 박스에 실려왔다.

LP 한 장도 없고, 라디오 기능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왠지 끌렸다. 언젠가 신청곡을 받고 LP에 바늘을 올릴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예감 때문이었다.


주파수에 정확히 안착한 라디오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다.

혼자 있는 시간이 혼자가 아니라는 온기를 준다. 심장 박동에 맞춰 나직이 울리는 자장가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라디오는 묻지 않는다. 듣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침묵해도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다.

오늘은 유독 라디오가 어울리는 날이었다.


나도 쉽게 말은 못 했지
널 보고 있으면 가슴이 뛰고 그래
가끔 물어보고 싶어
단 한 번이라도 남자로 보인 적 없는지

솔직히 말해서 난 듣기 싫었어
네가 만났던 남자 얘기
솔직히 말해서 난 자신이 없어
친구 사이로 지내는 건


DJ의 가을을 전하는 멘트에 이어 버나드 박의 '솔직히 말해서'가 단조롭지만 애절하게 흐른다.

승주는 손가락 끝이 떨릴 만큼 정성을 들여 맞추던 버튼을 누른다.

순간 나무 교실에 빨간 정지등이 들어오고, 사거리의 공기들이 멈춰 선다.





솔직히 말해서.


그 말은 오래전 어느 가을을 데려왔다. 유부초밥 세 개가 얹어진 우동 정식을 먹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길, 사사삭 발 밑에서 울리던 은행잎이 갑자기 울음을 뚝 그쳤다.

눈을 맞추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은행잎만 비비던 그의 신발이 귀여웠다. 솔직한 그의 신발.


"솔직히 말해서... 네가 자꾸 신경 쓰여. 승주 네가."


그렇게 그의 '솔직함'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 '솔직함'의 시작은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던 날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그 음식점을 별로다."


두 사람의 만장일치로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가니쉬로 나온 브로콜리 알갱이 하나 남기지 않고 먹었다. 박수도 쳤고 케이크에 촛불까지 불고, 집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나온 말이었다.

그의 솔직함은 발도 없는데 멀리 퍼졌다.


"솔직히 말하는데... 올케 이건 좀 아니지 않아?"

"솔직히 말해서... 네가 며느리로 잘 한건 뭐가 있니?"


솔직히 말하는 건 그의 집안 가풍이었다. 그의 입에서 하루에도 끊이지 않게 들었던 '솔직'은 그 집의 오래된 바이러스였다. 그의 누나도, 그의 엄마도. 벌통의 봉인이 스르르 풀리듯 '솔직'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말들, 모든 행동에 솔직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라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정작 일이 터졌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낯선 고지서가 앞다투어 우편함을 채우고, 은행에서 전화벨이 뜨겁게 울리고, 결국 집을 내놓고 캐리어를 끌고 나올 때까지, 그는 어떤 솔직함도 꺼내지 않았다.

진짜 솔직해야 할 때, 그는 침묵했다.


승주는 그 과정을 오래 견뎠다. 말을 믿고 연애를 시작했고, 말을 믿고 결혼을 했지만, 결국 말 때문에 웃고 울다가, 말 때문에 이별을 했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덕분인지 때문인지, 승주는 말의 진심보다 그 말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온도를 정확히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솔직히 말해서'라는 말은 진심을 꺼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먼저 통과시키는 말이다.

상대의 반응보다 내 감정을 먼저 밀어 넣는 말이다.


상대를 배려하는 척 하지만 결국 내 감정이 우선이 되는.

우리는 이 말을 붙이는 순간, 내가 하고 싶은 말의 무게를 상대가 받아줄 거라는 묵묵한 동의를 전제로 한다. '솔직히 말해서'는 고백 같기도 하고, 경고 같기도 하고, 때로는 면죄부가 되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서'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부터 '솔직하지 않은' 말을 할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말을 꺼낸 사람은 속이 시원해지지만, 그 말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그 순간 마음의 문을 단단히 닫아야 한다. 책임지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말하는 사람에게는 용기처럼 보이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순간적으로 부담이 되는 말.

이 두 감정 사이의 간극에서 '솔직히 말해서'는 언제나 미묘한 온도를 가진다.


'솔직히 말해서'는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길래.



솔직함이 가벼울 때
마음의 문이 닫힌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솔직히 말해서는 기침처럼 튀어나온다.

이미 습관이 되고, 무의식이 되어, 결국은 말의 책임을 가려주는 가면이 되기도 한다.


솔직함을 미덕으로 착각하는 관습 속에서, 우리는 솔직함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그동안은 솔직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그 엄마 이상하지 않아?"

"솔직히 말해서... 그 상황은 좀 아니었어."


대부분의 솔직하게 말해서.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부정적인 말이 이어진다.

불편한 말. 싫은 말을 포장지로 싸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공감을 구걸하는 마음이 있다.

내 이야기를 믿어주길, 강하게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솔직히 말해서'라는 강요로 이어지는 것이다.


말의 책임을 덜어주는 가면. 나의 감정을 먼저 통과시키기 위한 일종의 버튼.

상대를 배려하는 척 하지만 결국 내 감정이 우선되는 말.

가벼운 솔직함은 관계를 좁히는 말이 아니라, 서로의 거리를 만드는 말이다.



솔직함이 귀해질 때
마음의 창문이 열린다


하지만 솔직함이 언제나 상처만 주는 건 아니다.

말을 아껴둔 사람이 어쩌다 한 번 꺼내는 솔직한 한마디는 마음의 창문을 여는 힘이 있다.

오랜 망설임 끝에 꺼낸 솔직함은 진심이 있는 자리에서 올라온 말이기 때문이다.

솔직함은 많이 할수록 가벼워지고, 아껴 둘수록 무게가 생긴다.

때로 솔직함은 사람을 밀어내지만, 한 번의 솔직함은 사람을 붙잡기도 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때 미안했어."

"솔직하게 말하면... 그날 서운했어."


자주 쓰면 습관이 되고, 귀하게 쓰면 진심이 된다.

솔직함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에서 시작된다.


충분히 우리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말을 우리는 거리를 띄우는 데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가 무수하게 말했던 '솔직하게 말해서'를 거둬들이고, 한번 딱 한번 솔직하게만 말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다른 모습으로 있지 않았을까.






'솔직히 말해서'

이 말만큼 듣는 사람을 조심스럽게 만드는 표현도 드물다.

말하는 쪽은 마음의 문을 여는 것 같지만, 정작 그 순간 마음을 조여 오는 쪽은 듣는 사람이다.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말 앞에서, 우리는 이미 무슨 이야기가 이어질까 숨을 골라야 한다.

'솔직함'이라는 이름을 빌려 감정을 앞세우는 순간, 관계의 온도는 태도를 바꾸기 시작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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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에게도 그 말을 꺼내야 할 시간이 오래전에 지나갔다.

오랫동안 가슴 밑바닥에 담아두었던 한마디를 꺼내본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별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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