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년 만에 화장대 앞에 앉았다.
회사를 다닐 때도 화장에 공을 들이는 부류가 아니었으니, 화장대 의자는 늘 구석에 밀려 있던 가구였다.
스킨 챱챱, 로션 톡톡-- 성질 급한 아저씨처럼 쩍벌자세로 서서 몇 번 얼굴을 치고 끝내던 단장이 전부였다. 그런 내가 화장대를 마주하고 의자에 앉았다.
오래 잊고 살던 나를 다시 불러오듯, 화장품을 하나씩 꺼내 천천히 올렸다.
지난 11월 21일. 내 인생의 중요한 페이지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날이었다.
바로 <2025 국민이 함께 하는 저작권 글 공모전> 시상식.
올해 6월에 응모한 작품이 8월 본선 진출 소식을 알렸고, 전 국민 인기투표로 일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9월 12일, 총 4,701편 중 단 18편만 뽑힌 수상작이 발표되었다.
나는 믿기 어려운 소식을 들었다.
[대상 · 정현주 · <내 이름값 973원>]
햇살이 뜨겁던 계절에 쓴 글이, 여름을 지나 가을의 문턱을 넘어 내게 도착했다.
누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지도 않는데, 머리를 감는 순간부터 샤워를 마칠 때까지 정성을 들였다.
마음 상태에 따라 건너뛰던 화장의 순서도 오늘만큼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또 오백 년 만에 드레스룸에서 서성였다.
원피스, 투피스, 코트. 옷걸이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흔들렸다가 침대 위로 던져지고, 다시 걸렸다가 또 던져졌다. 부츠까지 신고 나니, 스스로를 단단히 여미는 기분이 들었다.
“방송작가는 뭐 하는 거예요?”
1991년 처음 방송국 문을 열던 날부터 들었던 질문이다.
당시엔 KBS, MBC, EBS 세 방송국뿐이었고, ‘방송작가’라는 직업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백문이 불여일견. 방송으로 확인하세요.”라고 말하며 의도치 않은 홍보 멘트를 날렸다.
첫 프로그램이 방송되던 날, 우리 가족은 벌칙을 수행하듯 저녁도 굶은 채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았다.
무뚝뚝하고 애정표현 하나 없던 아빠는 어색한 포즈로 비디오 플레이어에 공테이프를 넣고, 빨간 레코드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저녁 7시 정각, 타이틀 음악이 흐르자 아빠의 손끝이 움직였다.
가족들은 공복임에도 힘차게 박수를 쳤다.
우리가 기다린 것은 유명 연예인의 얼굴도, 화려한 카메라 워킹도 아니었다. 밤을 새우며 쓴 내 문장이었다. 그게 방송작가의 일이었다.
마지막 스크롤이 올라가고, 화면 맨 아래에서 시작한 내 이름이 천천히 위로 오르던 순간, 가족들은 손을 맞잡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날 밤, 나는 비디오테이프를 다시 재생해 내 이름이 등장하는 그 장면만 조용히 반복해서 바라보았다. 어둑한 거실에서 텔레비전 불빛이 생애 처음으로 나를 비추던 순간이었다.
첫방송 기념 이벤트로 알았던 아빠의 비디오 녹화는 단발성이 아니었다.
아빠는 매주 공테이프를 채우며 ‘아빠만의 연속극’을 만들었고, 비디오테이프 옆구리에 내 이름 석자를 붙여두는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연속극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지나가는 감기에 발목을 잡힌 줄 알았지만, 폐렴이라는 불청객은 너무 성급하게 아빠를 데려갔다. 아빠는 60대 초반의 숫자를 남기고 하늘로 올랐다.
네모난 화면 속, 내 이름이 위로 올라가던 모습처럼.
“방송국은 왜 그만뒀어요?”
방송국을 그만 두었을 때, 열이면 열명에게 이 질문을 받았다.
아니 그 좋은 직업을 왜?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송작가가 좋은 점’은 딱 하나였다.
연예인 실컷 보겠다는 것.
나는 방송작가와 궁합이 잘 맞았다. 취재도 체질에 맞았고, 새로운 걸 좋아하는 성향도 맞았다.
무엇보다 지는 걸 싫어하는 성질은 시청률 전쟁에서 오히려 에너지가 되었다.
잘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운 좋게도 한곳에 있었다.
주 6일 근무도 행복했고, 생방송 전담이라 반복되는 밤샘도 야행성이라 익숙했다.
주 1회 정규 프로그램, 특집, 신설프로그램 기획까지, 일을 늘릴 수 있는 만큼 늘렸고, 대신 나의 잠과 사생활을 줄였다.
하지만 내 안의 ‘아이디어 창고’는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독서도 휴식도 뒤로 밀어두며 일만 채우던 시간들. 아이템을 받으면 뇌에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데드라인은 더 빨리 다가오고, 불안은 더 깊게 내려앉았다. 글을 쓰는 일이 ‘징글하다’는 말이 숨을 쉴 때마다 튀어 나왔다. 결국 나는 다른 사람들의 언어를 흉내 내며 나를 속이고 있었다.
그렇게 방송이 되고 내 이름이 화면 속에 등장하는 것을 보며 내 이름이 부끄럽다는 감정을 맛보게 되었다. 지켜야할 것은 글이 아니라, 그 글 아래 붙은 ‘내 이름 석자’였다.
그렇게 2013년 마지막 녹화를 마치며 20여년 동안 드나들던 KBS 지하 1층 스튜디오 철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2024년 겨울, 조용한 내 통장에 작은 알림이 떴다.
저작물 사용료 지급내역
KBS미디어 2024년 상반기복제배포전송료
세부내역: 시청자주문판매
실 지급액 : 973원
10년 넘게 방송국을 떠나 있었는데 누군가, 어디선가,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금액은 작았지만 그 의미는 크게 다가왔다.
‘당신의 글은 아직 살아 있어요.’ 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 973원은 나를 다시 책상 앞에 앉혔다.
아빠가 정성스레 녹화한 비디오테이프에 붙어 있던 ‘내 이름 석자’를 다시 꺼내보라는 신호 같았다.
시상식은 오후 3시.
일찍 도착한 행사장은 기대 이상이었다.
무대 규모와 조명은 달랐지만, 아나운서의 진행과 시상 때마다 울리던 웅장한 음악까지.
나에겐 청룡 영화제보다 떨리는 무대였다.
지정된 테이블 위에 내 이름 석자가 크게 인쇄되어 있었다.
20여 년 전, 말없이 비디오테이프 옆에 아빠가 붙여주었던 그 이름.
아이디어가 바닥나 도망치고 싶었던 그 이름.
어느 날 저작권료 973원을 이끌고 내게 돌아온 그 이름.
그 이름을 다시 꺼내고, 다시 글을 쓰게 된 나의 시간을 산문으로 담았다.
그 이야기가 이렇게 ‘대상’이라는 자리까지 나를 데려왔다.
.
.
.
.
나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믿는다.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내가 한 번도 좌절하지 않고 계속 잘 나갔다면,
어느날 도착한 저작권료가 973원이 아니라 973만원이었다면,
나는 이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대상이라는 인생의 이벤트를 맞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피하고 싶었던 상처와 아픔, 도망가고 싶었던 좌절과 실패의 순간들.
그때는 버리고 싶었지만, 돌아보면 모두 나의 ‘포트폴리오’였다.
아픔과 실패의 포트폴리오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내가 건너뛰고 싶었던 모든 페이지들이 결국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인생은 때때로 돌아보고 나서야 의미가 생긴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지나온 시간은 단 한 장도 헛되지 않았다는 것도.
앞으로 마주하게 될 힘겨운 순간들도, 결국엔 나를 성장시키는 페이지가 될 것이다.
그 다짐은 시상식장 조명 아래서 다시 한 번 또렷하게 빛났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브런치 동지 여러분께
지난 11월 21일 오후 3시. 시상식에 다녀왔습니다.
2025 저작권 글 공모전은
전년대비 506% 증가한 총 4,701편이 접수되었고,
여러분이 함께 해 주신 대국민 심사도 1,023명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본문에 있는대로,
아나운서 진행과 시상 BGM. 행사관련 영상, 수상소감 영상도 플레이되어
많은 준비와 노고가 느껴지는 시상식이었습니다.
수상자 18명에게는
카카오에서 준비한 선물과 상장, 꽃다발, 수상 작품집을 선물받았습니다.
저는 남편과 아들이 와 주어서 축하를 해주었고요.
카카오 오성진 리더님 (브런치를 기획하시고 만드신 분)과
예쁜 여직원분(죄송해요, 그날 정신이 없어서 성함을 듣고도 기억상실 ;;)이 와 주셔서
함께 사진도 찍고 축하를 받는 귀한 자리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은상을 수상하신 브런치의 필경 송현준 작가님과도 시상식에서 인사를 나누고,
어색한 미소로 단체 사진도 찍었습니다.
아무래도 나라에서 주관한 (문화체육관광부&한국저작권 위원회) 행사이다보니,
시상식은 공식적인 무게감이 많이 있었고요.
단체사진, 개인 사진, 수여 장면 등 사진만 몇년치를 찍은 것 같습니다.
(웃으라고, 이빨 4개는 보여야한다고, 화 났냐고.. 사진 작가님이 힘들어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카카오 오성진 리더님과 직원분께서
"브런치가 공동 주최를 했는데, 브런치에서 대상이 나와서 너무 기쁘고 자랑스럽다." 하시는데
왠지 모를 뿌듯함과 공동체 의식으로 와락~ 안길 뻔 했습니다.
저도 답 인사를 전했습니다.
"브런치 안 했으면, 없었을 영광입니다."
다시 한번 '브런치'에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시상식 현장에서 느낀 점은,
'브런치 소속 작가'라는 울타리가 크게 느껴졌습니다.
다른 수상자들은 혼자 오거나 가족 한명 정도와 함께 와서 수상을 했는데,브런치 작가였기에,
동료작가와 인사하며 혼자 어색하게 있지 않았고,
브런치 팀장님과 직원이 함께 해주시는 든든함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함께 응원해주시고, 투표해주시고.
내 일처럼, 가족 일 처럼 모두 기뻐해주신 브런치 동지 여러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모두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