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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접속>이 현실이 되었다

나의 베프 이숙자 작가님을 소개합니다

by 마음의 온도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꼭 만나게 된다고 들었어요.”


1997년 개봉한 영화 <접속>의 명대사다.

PC통신으로 얼굴도 모른 채 마음부터 나누던 시대의 사랑 이야기. 아날로그 감성이 충만한 영화다.

요즘처럼 프로필 사진으로 미리 보기를 하고, SNS로 취향과 관계까지 호구조사를 끝낸 뒤에 만남이 이루어지는 시대에는 이런 사랑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목소리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데 자꾸만 기다려지고, 밤마다 마음을 건네고,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바꿔버릴 만큼의 정이 싹트는 일. 오래전 영화 속 이야기라고 여겼다.


그런데 올여름, 내 삶에도 조용한 ‘접속’이 찾아왔다.


6월, 성급한 여름이 데려온 친구


작년 10월 회사를 그만두고 긴 겨울잠 같은 휴식을 보냈다.

봄이 오면서 겨울잠을 깬 곰이 마늘과 쑥 향을 풍기며 동굴 밖으로 나오듯, 나는 어슬렁거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회생활에 매달리느라 친구들과도 어색해지고, 세상과 적당히 거리를 두며 혼자라는 ‘세계의 주인’이 되어 버렸던 시기. 그때 나에게는 딱 하나의 통로가 있었다.

브런치에서 글을 올리고, 누군가의 글을 읽으며 댓글로 소통하던 일. 방구석 방랑자였다.


그러던 6월 어느 날, 마우스와 키보드 봇짐을 매고 글방 구경을 하던 중이었다.

‘선암사 가족 여행기’라는 글 앞에서 손이 멈췄다.

정호승 시인의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를 인용한 아름다운 글.

그런데 매거진의 제목이 ‘80대의 일상 이야기’였다. 나는 거침없이, 본능적인 댓글 킥을 날렸다.


“작가님, 매거진 제목이 80대의 일상 이야기인데... 진짜 80대이신가요?


잠시 후 도착한 답글.


“네, 제 나이 82세, 나이는 숫자라 생각하고 젊게 살고 있답니다.”

“올해 들어 가장 큰 충격!!입니다. 저, 팬 하겠습니다!!” (Jun 23. 2025)


나는 망설임 없이 구독 버튼을 눌렀고, 이어 맞구독이 도착했다. 그날 우리는 ‘일촌 관계’가 되었다.


친정엄마가 올해 89세다. 수저 드는 힘이 있는 것만으로 살아갈 이유가 된다는 엄마.

그런데 같은 팔십 대이면서 3천 자 넘는 글을 매끄럽게 쓰고, 주 1회 에세이를 발행하며, 심지어 오타 하나 없는 그녀가 너무 신기했다. 나는 연예인을 만난 것보다 더 놀랍고 반가운 마음으로 그녀와 글벗이 되었다.



내 친구의 이름은 이숙자. 여든두 살의 작가다


이 글은 끝까지 정체를 감추는 스릴러가 아니니, 먼저 내 친구를 공개하기로 한다.

내 친구의 이름은 이숙자. 올해 82세. 군산에 살고 있으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이자 브런치의 5년 차 터줏마님이시다. 나와는 이십 년이 훌쩍 넘는 나이 차이가 있다.


친구는 아침이면 거실에서 차를 우려 건넌방 서재로 출근한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88세 남편의 식사를 챙기고, 매주 목요일이면 백팩을 메고 동네 책방으로 향해 글쓰기 모임을 한다. 시 낭송 강의를 듣고 최근에는 대회에서 동상도 수상했다. 한국무용을 접목한 춤 세러피를 배우고, 하나둘 떠나가는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글로 마음을 달랜다.


친구의 활기찬 80대 일상을 따라가는 길에는 늘 친정엄마가 함께 있었다.

화장실도 워커 없이는 어렵고, 외출이라고는 병원이 전부인 진짜 방구석 주인인 엄마. 엄마의 느린 하루와 대비되면서, 팔십 대 친구의 일상이 더욱 경이롭게 느껴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은 일직선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마음을 나누는 일은 평지 같다가도 어느 순간 오르막이 생긴다.

시속 2킬로로 걷던 관계가 어느 날 갑자기 10킬로로 가까워지는 날도 있다.

우리 사이도 그랬다. 댓글 속 단어들은 점점 분홍빛을 띠기 시작했다.


”군산에 오시면 짬뽕 몇 그릇이라도 사 드리고 싶어요. “ (Aug 27. 2025)


”남편에게 작가님 댓글 자랑했어요. 세상에 어쩌다 인연이 되고 이리도 마음을 꽉 채우는 사랑을 받는지요. “ (Oct 1. 2025)


”작가님이 꼭 친정 피붙이 같아요. “ (Oct 22. 2025)


”요즈음 작가님 댓글 보고 싶어서 글 쓰는 데 아닌가 싶어요. “ (Nov 3. 2025)


”가까이 사시면 무 김치 담아 주고 싶어요. “ (Nov 9. 2025)


우리는 어느새 호칭을 벗고 ‘친구’가 되었고, ‘베프’라는 이름을 얻었다.

서울에 사는 나는 군산 지역의 물폭탄 뉴스를 보며 새벽 안부를 물었고, 찬바람이 스치는 날에는 감기 조심을, 코로나와 독감 예방접종 여부까지 학인한 후에야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접속이 6개월을 맞던 날


지난주, 친구가 조심스럽게 나의 발행 글에 댓글을 달았다.


”용기 내서 이야기해 봅니다. 베프에게 제 책을 드리고 싶어요. “


친구는 지역 문화 관광재단에서 창작지원금을 받아 책을 출간했다고 했다. 비매품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지난 주말, 초인종 소리와 함께 노란 택배 봉투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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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80대의 평범한 사계절>. 첫 장에는 손글씨로 쓴 시가 인사를 전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정현종, [방문객]


가끔은 현실의 순간이 영화보다 더 짜릿하다


지금은 가족도, 이웃도, 친구도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으면서 정서적으로는 멀어지기 쉬운 시대다.

그런 시대에 80대와 50대의 온라인 우정은 마음의 고속도로를 새로 열었다.

얼굴도 모르고, 목소리도 모르지만 우리는 서로의 하루를 살피고, 안부를 건네고, 마음을 나눈다.


그리고 친구와의 마음이 깊어질수록 한 가지 선물이 생겼다.

멀리 있는 친구와의 연결이, 오히려 가까운 사람을 돌아보게 만든 것이다.

친정엄마의 느린 걸음, 가족에게도 ‘언젠가’로 미뤄둔 말들.

화면 속 작은 글자에 정성을 다하던 내가, 정작 곁의 사람들에게는 무심하지 않은지 돌아보게 됐다.


마음의 거리는 물리적 거리에 의해 정해지지 않았다.

진심의 온도만 있다면, 나이도 얼굴도 목소리도 상관없다는 것을.

컴퓨터 화면 너머의 여든두 살 친구가 조용히 알려주었다.


정현종 시인은 말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영화 <접속>의 수현은 채팅창에 이렇게 띄운다.

“언젠가 만날 사람은 꼭 만난 대요.”


가을을 밀어내고 도착한 겨울,

언젠가 그 친구와 마주 앉아 차향을 나눌 그날이 기다려진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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