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더위 속에 찾아온 ‘부재의 이름’
9월인데도 수그러들 줄 모르는 더위에 지쳐 있던 어느 날, 우편함에서 잊혀져 가던 이름 하나를 마주했다.
수신인은 1년 전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이름 석 자.
생전에 함께 살지 않았기에 아버지 이름이 적힌 우편물이 우리 집으로 오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돌아가신 뒤, 이번이 두 번째다.
시아버지는 20년 전, 한 대학병원에 사후 시신 기증을 해두셨다.
자신의 몸이 의사가 되려는 학생들의 교과서가 되길 바라셨다. 작년 시아버지의 삼일장을 치르고 발인 당일, 아버지는 묘지나 납골당이 아닌 대학병원 영구차를 타고 학교로 향하셨다.
그 길이 당신의 마지막 출근길이었다.
기증된 시신은 연구용으로 함께 하다가 학교의 자체 시스템으로 화장을 거쳐 추모공원에 모신다.
지난봄에 온 첫 번째 우편물은 “역할을 다했으며 화장 절차를 마친 뒤 용인 추모공원으로 모신다”라는 안내문이었다.
그리고 이번 두 번째 우편물은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온 통지였다.
시아버지의 2024년도 진료분에 대한 본인부담상한액이 연간 총액 138만 원인데, 그 금액을 제외한 초과금을 지급할 테니 신청하라는 내용이었다.
2024년도에는 1월부터 돌아가신 9월까지 병원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때였다.
그때 결제했던 금액 중, 나라에서 정하는 본인부담상한액을 뺀 나머지를 돌려준다는 것이다.
시아버지는 부양가족으로 남편 회사의 국민건강보험을 사용하고 있었고, 사망 후 처리 과정에서 남편이 상속자로 등록되어 우리 집으로 발송된 안내문이었다.
본인부담상한액 초과금 지급 신청서.
대상자 김**. 생년월일 1937. **.**
2024년도 진료분에 대한 본인부담상한액 초과금 중 사후 환급금.
지급 예정 금액 4,752,090원
정확하고 반듯하셨던 공무원 출신 아버지의 치매 판정
“요즘 치매는 약이 아주 좋습니다. 당뇨나 고혈압처럼 관리하시면, 별문제 없어요.”
2017년 그때도 화창한 가을이었다. 죄인처럼 앉아 있던 시아버지 뒤에 서서, 치매 초기라는 진단을 들었다. 두툼한 등심처럼 생긴 의사는 삼키기 버거운 ‘안심 멘트’를 내주었다. 그래도 5년이라는 유효기간을 유지했으니, 그 안심 레시피는 맞는 것이기도 했다.
치매 초기 판정을 받고도 5년 동안은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드라마에서처럼 비밀번호를 잊거나 길을 헤매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동창회 총무로서 매달 회비를 관리했고, 소식지도 제때 보냈다.
그 모습을 보며 “요즘 정말 치매 약이 좋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혹시 치매 진단이 틀린 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병은, 조용히 스며들다 어느 날부터 얼굴을 바꿔 나타났다.
늦은 밤이든 한낮이든 가리지 않고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아직도 안 들어오신다.”
“자다가 보니 아버지가 안 보이신다.”
전화를 받은 남편은 스프링처럼 튀어 나가, 한 시간 거리의 공원과 버스정류장을 헤맸다. 대부분은 파출소에서 온 연락을 받고서야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치매가 사실이었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파킨슨병을 앓던 시어머니의 증상도 하향인지 상승인지 모를 가파른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몇 번의 가족회의 끝에 두 분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아버지는 요양원으로, 시어머니는 재택 요양보호사의 도움 속으로.
그리고 아버지는 요양원 생활 2년 만에 홀로 눈을 감으셨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을 500% 실천하셨던 분
“우리 막내며느리는 미스코리아야.”
“우리 막내며느리 방송하는 날이라 못 나가.”
4남매의 막내인 남편 덕분에 나는 막내며느리로 시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세 명의 자식은 30년 넘게 외국에서 살아, 한국엔 우리뿐이었다.
PD인 자신의 아들이 무슨 프로그램을 만드는지, 월급이 얼마인지엔 관심이 없었지만, 며느리가 만든 프로그램은 놓치지 않고 챙겨보는 애청자였다. 어떤 아이템이든 칭찬만 하는, 진짜 ‘찐팬’이었다.
2년 전 요양원에 입소하고 처음 맞이하는 시아버지의 생신날, 외국에서 온 자식들과 함께 외식하던 자리였다.
치매가 깊어져 기억의 문이 닫히고 오래전 한 장면에 머물러 계시던 아버지는 오십이 넘은 머리가 희끗한 막내아들에게 “언제 제대하냐”라고 물으셨고, 나는 누구냐며 애절하게 묻는 작은 딸에게조차 “죄송합니다”라며 예의를 지키셨다.
하지만, 희미해진 기억 창고 안에서도 막내며느리만큼은 예외였다.
“일하느라 고생이 많지? 바쁜데 어떻게 왔니?”
그 한마디에 나는 그동안의 보상을 받은 듯했고, 그날의 식사는 행복한 눈칫밥이었다.
어디서나 내 얘기를 하며 “우리 막내며느리 이쁘지? 미스코리아 뺨친다”라며 애 둘인 아줌마를 여전히 미스로 만들어주던 분. 내가 하는 일에는 무조건 ‘YES 맨’ 이였던 분.
아버지는 내 인생의 첫 번째 ‘좋아요’ 버튼이었다.
유산을 받은 친구들이 부러웠던 때도 있었다
“00네 집은 시댁으로 들어갔대. 4층짜리 집 상속 절차를 밟는다더라.”
“00 알지? 알고 보니 건물이 있었더라니까.”
은근슬쩍 남편을 찔러보는 단골 멘트다.
못난 마음인 줄 알면서도, 좁은 속에 차오르는 부러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재산이라고는 집 한 채뿐이던 두 분은 생활비와 병원비 부담을 견디다가 결국 주택연금을 택하셨다.
매달 들어오는 연금이 마치 늦은 월급처럼 반가웠지만, 노후를 즐길 수 있는 맛있는 음식과 옷 대신 병원비와 약값으로 흘러갔다.
“집 하나는 남겨주고 싶었는데….”
늘 하시던 그 말은 결국 바람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매달 드리던 생활비 부담을 내려놓은 것만도 다행이라 여겼다.
그럼에도 주변에서 ‘유산’이니 ‘상속’이니 하는 말을 들을 때면, 속이 쓰린 건 사실이었다.
그 속 쓰림을 그냥 삼키면 체할 것 같아, 남편에게는 속이 보이는 투정을 했는지도 모른다.
가을의 끝자락, 도착한 시아버지의 유산
가을과 겨울이 한꺼번에 몰려오던 지난 10월 말, 남편의 휴대폰으로 한 통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난 9월에 안내문을 받고, 사후 환급금에 필요한 추가 서류를 준비하고, 환급 신청서를 보낸 지 이틀 후였다.
작년 2024년 9월 20일 돌아가셨으니, 1년 하고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유산’이었다.
남편과 나는 입금 알림 문자 앞에서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오랜만에, 잊고 지냈던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아쉬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회상은 어느새 행복한 추억들이 소환되어 웃음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 아시나요?
이미 당신은 제게 너무나 큰 유산을 남겨주셨다는 것을요.
막둥이로 자라 걱정보다는 웃음을 먼저 배운 당신의 아들.
깐깐한 맏딸 체질 아내를 만나 기꺼이 졸병이 되어준 아들.
지금까지 큰 거짓말 한번 없이, 허튼짓 한번 없이,
“우리 아내가 세상 제일 예뻐”라며 아직도 엉덩이를 두드려주는 아들.
드라마를 보다가 울고, 밥을 먹다가 음악방송이 나오면 벌떡 일어나 문워크를 추는 아들.
아이들에겐 ‘아빠’보다 ‘친구’로서 작전을 짜는 아들.
이런 멋진 아들을 제 곁에 남겨주신 것이, 제겐 세상의 어떤 금액으로도 환산되지 않는 유산임을.
돌아가신 지 1년 만에 도착한 시아버지의 유산.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 아래 잊고 있었던 아버지 이름 석 자를, 하늘이 다시 불러주었다.
아버지 이름이 찍힌 4,752,090원
이는 하늘에서 보낸 아버지의 문자가 아니었을까.
바람은 제법 매서워졌지만, 가을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새털구름은 맑게 퍼지고 있다.
오늘은 왠지 하늘이 웃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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