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복을 타고난 여자'의 명절, 결국은...

대학 시절 알바부터 직장, 결혼 후까지 계속된 일복. 올 명절은??

by 마음의 온도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2월엔 '내가 가진 복 타령'을 해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해마다 돌아오는 인사지만, 올해는 이상하게 귀에 꽂힌다. 마치 한동안 잠잠하던 노래가 다시 인기 차트에 올라 입에 맴도는 것처럼.

오늘만 해도 스무 번은 들은 것 같다. 줌바댄스 수업을 마치며 회원들과 헤어질 때 열 번, 카카오톡으로 친구와 지인들에게 또 열 번쯤. 나 역시 복사·붙여넣기 하듯 같은 말을 건넸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섰다.


복? 나는 도대체 무슨 복을 받고 살아온 걸까?



KakaoTalk_20260213_200544645.jpg 새해인사복에 관하여 글을 쓰는지 아는 듯, 가락시장 입구에 조형물이 있었다. 오, 새해 이런 느낌 좋아.



사람들은 태어날 때 손에 하나씩 쥐고 나온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블링블링한 금수저를, 어떤 사람은 은은한 은수저를 쥐고 나온다. 또 어떤 사람은 흙수저라 한숨 쉬지만, 어느 날 백수저가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나는 뭘 쥐고 태어났을까?

나는 응애응애 울며 세상에 나올 때, 탯줄 끝에 복 하나를 매달고 나왔다. 그것은 바로 ‘일복’이다.


“학생은 복이 많게 생겼네.”

대학 3학년 겨울방학, 계획에도 없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다들 취업 준비를 위해 어학원이나 자격증 학원을 향할 때, 나는 논현동 기와지붕이 멋드러진 ‘민물매운탕집’으로 향했다. 동글동글한 얼굴형 덕분인지, 첫 인사부터 ‘볼에 복이 붙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여학생 알바라면 커피숍이나 레스토랑에서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입는 프릴 달린 하얀 앞치마를 두르는 게 평범하던 시절이었다. 뜬금없는 매운탕집 소녀가 된 나에게 친구들은 시급이 높냐, 집에서 가깝냐고 물었다.


“아니, 손님이 없대.”


적당히 냄비를 나르다 매운탕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퇴근할 목표로 들어간 매운탕집.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알바 첫날 점심 단체 회식이 몰렸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북적였다. 대박집이 되어버렸다. 매운탕 몸보신은커녕 점심도 못 먹고 냄비만 나르는 알바봇이 됐다. 백발의 올림머리를 한 사장님은 연일 입이 귀에 걸린 채 말씀하셨다.


“학생, 오랫동안 다녔으면 좋겠어. 내가 이력서에 쓰인 생년월일로 어디 좀 물어봤는데, 학생이 일복을 타고 났대.”




사회에 나와 방송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일이 많기로는 우주 최강이라는 방송국에서, 과연 나의 일복은 잠잠했을까.

나는 매일 생방송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월화수목금 각 요일마다 피디와 작가가 한 팀씩 있었고, 나는 수요일 담당이었다. 그런데 이건 또 우주의 장난인가.

이상하게 특집 방송이 나에게 걸린다. 설날 특집도 수요일, 어버이날 특집도 수요일,

추석은 다른 요일이라 살았다 싶으면, 담당 작가에게 무슨 일이 생겨 결국 내가 맡았다. 동료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방송국에 뼈를 묻으세요.”


내가 좋아하던 KBS 신관 앞 잔디밭 벤치는 어느새 내 묘자리라 불렸다.






지지리 복도 없는 팔자. 이번에는 탈출이다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을 했다.

제일 먼저 테이프를 끊은 친구는 남편 외모도 별로이고 시댁 형편도 별로였지만 끔찍이 친구를 애지중지했다. ‘남편복’이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결혼한 친구는 고등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낸 동네 친구와 결혼을 했는데, 시댁이 보유한 빌딩이 두 개다. ‘시댁복’으로 당첨되었다.

나는 다른 건 필요 없었다. 그저 이놈의 일복만 탈출할 수 있다면 오케이였다.

나의 결혼은 다를 것 같은 예감이 팍팍 왔다. 나의 결혼 상대는 재벌집은 아니지만, 서울 자가에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시댁은 서울 시내 한복판이다. 귀성·귀경 열차 예매 전쟁이나 고속도로 정체를 패스할 수 있다. 시부모님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 제사나 차례도 없다. 보통 한 달 전부터 시작되고 최소 3개월의 후유증을 앓는다는 명절 증후군도 패스다. 심지어 남편은 사남매의 막내다. 위로 있는 삼남매는 모두 외국에서 살고 있다. 시누이 시집살이, 동서 시집살이도 패스다. 그런데 웬 걸?


“새 아기가 만든 잡채가 맛있더라. 올해는 아가가 하렴.”

“전도 예쁘게 부치네. 이번에는 꼬치전도 만들어볼까?”


차례 안 지내신다면서요. 명절에 아무것도 안 하신다면서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은 끝내 나오지 못했고, 나는 ‘00야쿠르트 대방지점’이라 적힌 노란색 앞치마를 두르고 하루 종일 불 앞에 서 있어야 했다.

하나뿐인 막내아들은 결국 외아들이자 장남이었고, 나는 외며느리이자 맏며느리가 되었다. 시어머니의 칠순잔치는 둘째를 낳은 지 삼칠일이 되기 전에 치렀고, 시아버지의 팔순잔치를 위해 두 달 동안 호텔을 발품 팔아 다녔다.


내 배꼽을 만져본다. 그때 탯줄 끝에 달고 나왔던 일복은 아직도 남아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가는 곳마다 일이 생겼다. 없던 일도 생기고, 하던 일은 더 많아졌다.

왜일까. 그러다 한 단어가 떠올랐다.


‘능력’


없던 일이 생긴 것도, 일이 더 많아진 것도, 내가 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었기에 일이 나에게로 온 것이다. 어쩌면 내가 투덜대던 ‘일복’의 또 다른 이름은 ‘능력복’일지도 모른다.



KakaoTalk_20260213_200544645_01.jpg 복은 어디에나 걸려 있었다. 가락시장 앞 조형물에 대형 복 주머니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다。복 받은 기분이다。


올해 설은 조용하다. 24년 가을 시아버지가 돌아가셨고, 25년 겨울 시어머니도 떠나셨다.

일주일 전부터 갈비를 주문하고, 장보기 목록을 적으며 부산하던 나에게 이런 명절은 낯설다. 기름 냄새도, 종종거리는 발길도 없다.

예전에는 명절이 다가오면 피곤하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그런데 막상 아무 일도 없는 설을 맞으니, 그 피곤함마저도 나에게는 살아있는 모습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냉장고를 연다. 잡채라도 할까. 전이라도 몇 장 부칠까.

이제는 나에게 일을 시킬 사람도 없다. 그런데 나는 또 나에게 일을 만든다.

냉장고 문을 닫고, 결국 시장을 다녀오기로 마음먹는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일복이 많은 운명을 받아들였다기 보다, 스스로 일을 벌이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전을 부치고, 내가 먹이고 싶어서 잡채를 볶는 여자.

그래. 나는 여전히 일복 많은 여자다.


새해 무슨 복을 받고 싶냐고?

글쎄~, 돈복도 좋고, 인복도 좋지만, 지금처럼 ‘일복’이 늘어난다 해도 나는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요망지게, 야무지게. 나는 아직 해낼 자신이 있거든.



KakaoTalk_20260213_200544645_02.jpg 결국 난 또 장을 본다. 일복이 많네 어쩌구 했지만 결국 조용함을 못 견디고 가락시장에 와서 장을 보았다.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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