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미경 Oct 28. 2022

등대와 안개등

캐디의 물건

제주에 살면서도 가끔 제주가 섬이라는 걸 잊고 산다.

잊는다기보다는 의식을 못하고 사는 것 같다.

그러다 태풍이 한반도를 향해 빠른 속도로 올라온다며 그 첫 번째 관문인 제주도를 관통할 것 같다면서 주의를 당부하는 기상캐스터의 예보를 들을 때면 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리고 자전거로 5분만 달리면 해안도로를 달릴 수 있는 곳에 살아서 '좌 바다 우 한라산'을 보노라면 여기가 섬이었구나 한다.

굽이굽이 에둘러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마을 어귀를 지키는 장승처럼 서 있는 등대를 만난다.

하양, 빨강 옷을 입고 먼바다로 몸을 쭈욱 빼놓은 커다란 빛기둥.

등대만 보면 나는 아련해진다.

어릴 적 슬픈 곡조가 좋아서 가사의 뜻도 모른 채  그냥 흥얼거렸던 '등대지기' 노래 때문일까?

아님, 한때 어부의 아내로 살았던 기억 때문일까?


내 남편은 어부였다.

예기치 않은 파산으로 변변한 직장을 얻지 못하던 시절, 친척의 배에서 선원으로 갈치잡이를 했다.

인근 연안에서 조업을 하는 소형어선이어서 매일 항구에 들어와 접안을 했으나, 사는 집과는 거리가 멀어 거의 배에서 먹고 자고 했다.

갈치조업의 특성상 밤에 작업을 하고 낮에는 잠을 자는, 밤낮이 바뀐 생활을 했어야 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집에 다녀가지만, 간혹 필요한 물품을 주러 내가 항구로 찾아가기도 했다.

밤에 일을 하지만, 배위의 태양빛보다 더 강렬한 집어등 때문에 마치 허물을 벗듯, 살갗의 표피층이 하얗게 일어나 말라 벗겨놓은 고기비늘 같았다.

그런 남편이 안쓰러워, 그런 아들이 걱정되어 어머니와 나는 주기적으로 밤바다를 찾았다.

용왕님께 제물을 치고 기도를 하러 가는 것이다.

하얀 한지를 몇 겹 접어 계란 한 알과 한 숟가락의 쌀을 넣고 종이를 말아 무명실로 감아서 묶는다.

이런 묶음을 여러 개 준비한다.

서해 용왕님, 동해용왕님, 남해 용왕님과 돌아가신 영가의 이름들과 바다 건너 육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자손들의 이름을 따로따로 묶음에 쓰다 보면 그 묶음이 15개 정도 되었다.

그리고 용 날 밤 9시와 11시 사이에 바다로 나가 하나씩 바다로 던지며 기도를 한다.

칠흑 같은 어둠이 온 세상을 평정해버린 듯 온통 까맣다.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는 푸르고 까만 암흑이 공명을 덧댄 듯 더 크게 들린다.

이미 시각과 청각이 어둠의 공포에 잠식되어 온 몸이 시퍼렇게 멍이 든 것 같다.

같은 시각, 몇 평 남짓한 나무배에 생을 담보한 남편의 두려움은 육지에 발을 딛고 있는 나의 그것과 견줄 수 있었을까?

그도, 나도 그 순간에 의지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건 사람이 아니라 한낱 불빛일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사위를 밝히는 등대의 은빛 등불은 다이아몬드의 반짝거림보다 더 눈부시고 값지다.


많은 여행객들이 등대를 배경 삼아 사진 찍기에 한창이다.

누군가는 그 기둥에 삶을 기대고 , 누군가는 추억을 기댄다.

어쩌면 기둥의 어원은 '기대다'가 아닐까 싶다.


우리 회사는 해발 230M에서 250M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지대상 중산간이라고 하는 지역이다.

일명 고사리 장마( 제주도에서 고사리가 나올 때쯤인 4월~5월 사이에 내리는 잦은 비 현상) 기간에는

안개가 자주 낀다.

캐디에게 가장 안 좋은 기상상황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폭우, 폭설, 천둥, 번개보다 안개라고 답하지 않을까 싶다.

안개 낀 날, 만약 신이 내게 한 가지 능력만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면 나는 '분신술'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할 것 같다.

그나마 자주 오시는 회원님들은 각 홀들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어서 본인의 생각대로 경기를 하시지만, 우리 회사가 처음인 고객들과 18홀 라운딩을 하는 것, 생각만으로도 암담하다.

물론 안개의 정도에 따라 근무의 강도가 다르지만, 안개가 심한 날이면 모든 상황이 캐디에게 의존해야 하므로 캐디 한 명이 네 명의 모든 상황을 컨트롤하기엔 녹록지 않다.

일일이 쳐야 할 방향을 가리켜 주어야 하고, 안갯속으로 사라진 그들의 볼의 행방도 추적해야 한다.

홀이 모두 직선 방향으로 생긴 것도 아니고 휘어진 홀도 많고 중간에 벙커나 호수도 있고 여러 장애물이 곤혹스러운 상황을 만든다. 뒷팀에서 볼이 날아오지 않게 카트의 위치도 잘 파악해야 한다.

물론 팀의 진행도 신경 써야 한다.

경기자들의 볼의 구질도 중간에서 왼쪽으로 휘는 사람, 오른쪽으로 꺾이는 사람이 있는데, 처음 날아간 시작점은 보이고 중간에 안개 때문에 방향이 전환된 것을 인지 못하면 그 홀은 그 볼이 분실구 처리될 확률이 높아지므로 캐디 입장에서는 난감하다.

게다가 나는 방향치다.

십수 년 매일같이 다닌  곳인데도 안개 낀 날 유독 특정 홀에만 가면 방향감각을 잃어 볼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굿 샷"이라고 당당히 외치고 갔는데 혹은, 왼쪽으로 볼이 날아간 것 같다고 고객에게 말했는데 볼이 없어진다거나 오른쪽에서 볼이 발견되었을 때의 황당함과 창피함이란...




캐디가 신(神)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고객들이 캐디를 신으로 생각하는 다.

 일출 직전과 일몰 직후, 그리고 안개 낀 날에 경기를 진행할 때.

경기자 자신들도 인지하지 못하는 볼의 행방을 캐디에게는 모두 보이고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절대적 믿음과 신뢰가 그를 말해 준다. 물론 많은 경험으로 얻어진 작은 팁들은 있다.

타구 시에 볼을 경기자 뒤에 서서 본다든지, 청각을 더 예민하게 하여 볼의 낙하지점의 방향을 소리로 듣는다든지 하는 것 정도이다.

분명히 밝힌다. 캐디도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고객들도 그런 상황에는 어쩔 수 없다고 머리로는 생각을 하지만 , 심정적으로는 짜증이 올라오면서 점점 캐디가 야속해진다.

나 역시 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죄스러워지는 건 과도한 책임감일까?

그래도 지금은 좀 수월해졌다.

우리에게도 한줄기 붉은빛이 생겼기 때문이다.

비록 수동 설치이긴 하지만 안개등과 방향지시 화살표가 생겼다.

안개등은 그린 앞 핀 위치를 알리는 등불을 말한다.

일종의 그린 위의 등대다.

그리고 방향 지시 화살표는 티샷일 경우 먼 거리는  안개등의 위치식별이 어려우므로 티잉그라운드에 공략지점을 캐디가 선정해 그 방향대로 화살표를 지면에 놓아 경기자들이 방향을 잡도록 해주는 일종의 방향지시 표이다.

상시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안개 낀 날이면 경기팀 직원들이 직접 홀을 돌아다니며 설치하고 안개가 걷히면 수거해가는 수동식이다.

그 장치들의 출현으로 캐디들의 피로도 줄어들고, 경기자들의 혼란도 줄어들었다.


우리 삶에도 그런 장치가 있다면....

부처님이 어차피 인생은 고해라(苦海)라 하며 위로인지 악담인지 모를 말씀을 하셨다지만, 그 바다를 밝히는 빛 길을 열어 당도할 곳을 알려 준다면 헤매지 않고 나아가 닿을 텐데...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모르는 방향치인 나에게 화살표로 삶의 이정표를 알려준다면 한눈팔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 닿을 텐데...


(Feat. 부처님)

이 어리석은 중생아,

그럼, 인생 재미없어!





이전 04화 골프는 장비 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