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드 19가 발병한 지 어언 3년이 넘어가는 이 시점에 마침내 코로나에 걸렸다. 어쩌면 이 역병에 특정된 슈퍼 면역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오만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물론 내가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고 바이러스에 근접 노출되는 상황과 몸의 면역상태가 상대적으로 약해진 때가 딱 맞물리는 확률을 어찌어찌 피해온 것으로 그동안은 대단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다.
코로나는 무척 고통스러운 병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증상이 가장 심했던 지난 나흘 동안 정신적 피로도와 불안증만큼은 어느 때보다 낮았다. 신체적 고통과 반비례하여 심리적으로는 편안했다는 얘기다. 아픈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느낌이었고 며칠을 가만히 누워만 있는데도 죄책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보면 평소에 얼마나 열심히 살기에 저리 말할까 싶겠지만 사실 나는 그렇지도 않은 사람이다.
어린 시절, 부모와 선생들이 나를 두고 항상 '적당히만 한다'는 소리를 해대며 다그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 평가가 정확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과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행적을 구석구석 헤집어봐도 남에게 자랑할 만한 성과커녕 개인적으로나마 성취감에 충만해 본 경험도 그다지 찾을 수 없다.
사실 겉으로 드러나는 성취나 남의 평가와 별개로 나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혼자만의 노력을 쏟아부으며 살아오고 있었다. 전반적인 삶의 결과치를 놓고 봤을 때 딱히 이룬 게 없어 보여도 여기에는 나름 변명의 여지가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근본적으로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불타올랐던 작년을 기점으로 나는 수많은 자기 계발서를 읽는 중이었다. 그런 종류의 책들은 고맙게도 실제 능력치와 품고 있는 기대치가 대등하지 않아 좌절감에 빠져 사는 나 같은 부류를 향해 제법 현실적인 해법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그중 대부분의 저자가 유독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작은 성공'의 경험을 쌓으라는 조언을 열심히 따르는 중이었다.
지난 토요일을 예로 들어보겠다. 나는 늦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오전 9시 전에 기상했고 외출 계획이 전혀 없음에도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했으며 얼굴에 바른 로션이 스며들기를 기다리는 잠깐 동안도 스쿼트를 했다. 개와 산책을 다녀온 후 다시 침대에 기어들어가 눕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꾹 참고 책상 앞에 앉아 써지지도 않는 글을 한 시간가량 끄적거렸다. 점심식사를 하는 중에는 무의식 중에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이 먹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보지 않았으며 식사가 끝난 뒤에는 혈당스파이크를 예방하기 위해 앉지 않고 15분간 제자리걸음을 했다. 주말을 맞아 들른 한인마트에서 평소에는 비싸서 절대로 살 수 없었던 총각무가 세일을 하는 것을 보고는 한 보따리 사들고 돌아왔는데 애초에 전혀 김치를 담글 계획이 없었고 차라리 안 먹고 마는 게 나을 정도의 엄청난 귀찮음을 느꼈지만 모든 걸 감수하고 김치 한통을 담갔다. 한국과 관련된 물건이면 모든 게 비싼 이곳에서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으로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은 것이다. 마침내 저녁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까지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용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처음 30분은 몇 달 전부터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유료 가입한 듀오링고를 열고 어플이 자체적으로 설정해 놓은 당일의 영어 레슨 할당량을 끝내는 데 할애했다. 종일 나는 별다른 자책감이 들지 않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이 정도면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꽤나 이상적인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대단한 피로감을 느꼈는데 그와 같은 하루를 매 주말마다 반복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절대 그럴 자신은 없었다. 진짜 본능을 따르자면 나는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야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씻지도 않은 채 고농도 탄수화물 음식을 한없이 입에 밀어 넣으며 티브이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이처럼 실제 내 본능이 지향하는 삶이란 대체로 게으르고 자기 파괴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를 성실히 산다는 건 일종의 투쟁과 같았다. 매일 아침 따뜻한 이불속을 벗어나기란 새벽 냉기가 피부에 닿는 선뜩함과 맞서 싸우는 일이었고, 씻는 행위란 축축한 물기가 피부에 닿았을 때의 음습함을 견뎌내야 하는 고난과 비슷했다. 평범한 일상 루틴조차 자동으로 그냥 되는 법은 없었고 그놈의 최선을 다해야만 겨우 지속이 되는 형편이었다.
이런 문제점은 비단 생활습관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인생 전반에 걸친 성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노력과 최선이 내 입장에서는 필사적인 것인지 몰라도 일반적인 기준에서 봤을 땐 그저 평범한 수준에 불과했다. 작은 성공은 그 이름처럼 사소하기만 하여 품고 있는 이상을 충족시킬 만큼의 비약적인 발전이나 큰 성공으로 발현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한 유년시절 성과중심주의를 주입받으며 깊숙이 뿌리내린 어떤 관념들은 여전히 내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무언가를 이루더라도 언제나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으며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이마저도 도태된다는 불안에 떨게 했다. 음식 절제도 못하면서 운동은 죽을 만큼 힘들어하는 나약한 정신력은 한심할 뿐이고 남들은 두 번 세 번도 하는 결혼을 마흔이 넘도록 하지 못한 노처녀 신세는 열패감을 가져왔으며 대단한 커리어라도 가지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능력은 전무했다. 순전히 좋아서 쓰고 있는 글과 관련해서도 왜 더 긴 시간 엉덩이를 붙이고 책상 앞에 앉아있지 못하는가, 왜 남의 글을 읽을 생각을 안 하는가, 왜 매번 귀찮다는 이유로 충분할 만큼의 퇴고를 하지 않는가와 같은 자책에 빠진 채 공모전이나 신춘문예에 당선되거나 출판사의 눈에 띄어 책을 출판하는 등,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혼자 실망하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모색하지도 않은 채 불평만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높은 기대를 그만 내려놓던가 아니면 일만 시간의 법칙이나 미라클모닝을 실천하며 기대에 부응할 만한 노력을 더 쏟아붓던가 둘 중 하나를 택하면 된다. 고작 매일 아침 일어나고 씻는 행위조차 투쟁이라 여기는 나 같은 인간에게 후자의 방법은 어불성설이고 그나마 현실적인 선택지는 전자이다. 이제 그만 욕심을 버리고 황새가 아닌 뱁새로 태어났음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정도는 딱 여기까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다. 하지만 어떤 개념을 머리로 이해했다고 해서 짧은 순간 생각과 감정이 확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무언가 마음에 깊숙이 와닿아 무의식을 뒤흔들고 단단히 박혀있는 오랜 가치관과 관습에 균열을 주고 삶의 방향을 틀어버리기까지의 과정이란 절대로 간단하지가 않아서(이 정도면 사실 거의 천지개벽 급의 사건 아닌가?) 그 길고 복잡다단한 여정 속에서 대개 나가떨어지거나 익숙한 과거로 돌아가기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슬프게도 증세가 나아질수록 불안은 다시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렇게 먹고 누워 있기만 했으니 살이 더 쪘으면 어쩌나? 안 그래도 지지부진한 글쓰기는? 매일 30분씩 하기로 했던 듀오링고는? 운동은? 독서는? 방청소는?
일상으로 돌아갈 일을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