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좋아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운동이다. 단순히 움직이기를 귀찮아하는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가슴이 조이고 숨이 차고 근육통이 생기는, 운동을 할 때 따라오는 신체적 증상이 견디기 힘들 만큼 심각한 고통으로 느껴졌다. 나 같은 초 민감자에게 운동은 과도한 자극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운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 딸려오는 부차적 행위가 내가 질색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머리가 젖는 게 무척 싫었다. 운동을 하게 되면 땀에 젖든 씻느라 젖든 어쨌든 머리는 무조건 젖기 마련이다.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목덜미에 척척 휘감기는 느낌도 싫지만 씻는 와중에 머리카락이 물을 먹어 묵직해지면 꼭 뒤에서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를 감은 뒤에는 항상 신속하게 말려야 했으므로 시간 절약과 효율을 고려해, 긴 머리를 선호하는 취향과 반대로 짧은 머리를 고수한 적도 있다. 땀과 관련해서는 몸에서 냄새가 나거나 끈적끈적해지는 게 불쾌하기도 하지만 일정 부위에 집중되어 땀이 나는 현상을 유난히 혐오했다. 콧잔등과 인중에 작은 땀방울이 알알이 맺혀 있는 모습은 거의 환 공포증을 불러일으킬 만큼 괴이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격렬한 움직임 이후 얼굴이 달아올라 벌게지면 원래 상태로 돌아오기까지 항상 시간이 걸렸고 어떤 날은 두통이 동반되기도 했다. 즉 운동이란 고통스러운 신체적 증상 외에도 기피하는 현상이 줄줄이 딸려오는, 말 그대로 온갖 싫은 것의 복합체였다. 그런 연고로 나는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 여러 매체에서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마다 '그래, 건강을 유지하려면 운동을 해야겠지.'라며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예민한 기질을 핑계 삼아 적어도 내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며 합리화하곤 했다.
하지만 마침내 나는 운동을 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다르고 말았다. 몇 년에 걸쳐 비만과 고지혈증과 자궁내막 증식증과 우울증의 대환장 파티를 치르고 나자 운동은 싫거나 좋은 취향의 문제에서 벗어나 생존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몸이 아프기 시작한 이래로 무기력하고 침체된 일상을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나는 하루가 좀 편안하고 덜 불행했으면 좋겠다는 단 하나의 바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몸이 아프지 않아야 했다. 고지혈증이라는 진단과 함께 언젠가 뇌경색이나 심장마비가 올 수 있다는 의사의 무시무시한 경고를 들은 이후 나는 실제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감에 빠졌다. 거의 비정상적인 건강염려증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겠으나 차라리 이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나는 그제야 건강한 식단과 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평소 운동이 죽기보다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분명한 점은, 운동보다 죽는 게 백배쯤 더 싫고 무서웠다.
하지만 이처럼 필수적인 일이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일일 경우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앞에서 밝혔듯 일상이 편안하고 불행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운동을 시작하기로 한 궁극적 목적인 데 반해, 해야만 한다는 강박과 하고 싶지 않은 극심한 저항감이 충돌하여 오히려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매번 다양한 운동을 시도하고 시작했지만 도무지 꾸준히 지속할 수가 없었고 그때마다 좌절감에 휩싸였다. 이런 삶은 절대로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할 수 없었다.
이쯤 되니 자꾸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평생을 의지박약으로 살아왔으니 중도 포기는 숨쉬기만큼이나 쉽고 익숙했다. 이대로 가다간 처음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연스레 나가떨어질 게 뻔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 생사가 달린)가 달려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포기해 버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살고 싶은 열망이 강한 만큼 그 어느 때보다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굳건했다. 당시 사뭇 진지한 자문자답이 오갔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질문 1) 내가 진짜 포기하고 싶은 것이 운동일까?
답) 아니다. 나는 운동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을 뿐.
질문 2)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답) 싫은 게 너무 싫은 나의 기질.
총체적 문제의 발단은 싫은 것을 너무 싫어하기에 있었다. 그리고 싫은 것을 어떻게 하면 하지 않을 수 있을까에만 골몰하는 관성적 습관에 있었다. 강한 호불호는 대체로 삶을 힘들게 했다. 세상에는 하기 싫고 무섭고 힘들고 골치 아픈 일이 넘쳐났다. 그러니 싫은 것을 너무 싫어하기만 해서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다.
질문 3)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해결방안은?
답) 너무 싫어하는 짓을 포기할 것.
그렇다.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로서 나는 운동을 싫어하는 짓을 완전히 포기하기로 했다. 이때의 감정은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체념의 기분에 더 가까웠다. 어쨌거나 나는 패배를 인정하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기로 결정했다. 더 이상 운동이 왜 싫은 지 구구절절 읊지 않기로 했다. 운동 외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획기적인 다른 방법이 있을 거란 헛된 기대를 품거나, 운동을 피할 구실이나 변명을 찾는 행동도 그만두기로 했다.
운동을 인간은 왜 태어나는가 혹은 왜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실존의 문제와 동일한 범주에서 접근하기로 했다.
답이 없는 문제를 향해 더 이상 '왜'라는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이다.
운동이란 자고로 태어난 이상 생존을 위해 무조건 해야 하는, 숨 쉬고 먹고 자고 싸기 같은 필수적인 행위로 여길 것.
간단하게 말해서,
그. 냥. 닥. 치. 고. 할. 것.
이후에 나는 비교적 꾸준히 운동을 하는 인간이 되었다. 여전히 운동이 싫지만 그냥 한다. 데이트를 앞두고 머리를 감거나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일처럼 귀찮고 번거롭지만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여기며 수행하고 있다. 물론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마라톤을 즐기거나 헬스장에서 근력운동을 몇 시간씩 하는 사람으로 변모했다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없다. 다만 매일 운동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놓지 않으려는 최소의 노력을 지속하는 중이다. 너무 운동이 하기 싫은 날에는 딱 십 분짜리 홈트레이닝 영상을 따라 하거나 바빠서 그조차 짬을 낼 수 없을 때는 얼굴에 바른 로션이 스며들기를 기다리는 동안이나마 스쿼트 열댓 번을 하는 식이다.
그리하여 꽤 긍정적인 결론을 맞이하게 된다. 체중이 줄기 시작했고 콜레스테롤 수치가 내려갔으며 자궁내막 증식증도 나았다. 살이 빠져 몸이 가벼워지니 확실히 일상이 편안하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운동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 않을 때 느끼는 죄책감도 더는 없다.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 것은 확실하다. 한 가지를 포기한 것 치고는 얻은 게 꽤 쏠쏠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