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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루 Dec 06. 2023

고인 앞으로 날아온 크리스마스 카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밴쿠버 외곽도시의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가 유산으로 남겨졌다. 아빠는 캐나다에서 살아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별 볼 일 없이 나이만 먹고 있던 나로서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전 달까지만 해도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게 될 거라고는 손톱만큼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 전개는 시작부터 어디 하나 걸리는 구석 없이 물 흐르듯 진행되어 정확히 두 달 뒤 나는 캐나다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이후의 상황까지 순탄할 수는 없어서 한동안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낯선 나라에 적응하기도 전에 고인이 된 할머니의 유품을 포함한 신변 정리를 도맡게 되었다. 할머니의 은행 계좌를 닫거나 미납된 전기와 수도요금을 지불하고 명의를 바꾸는 등의 자잘한 일이었지만 이 나라의 행정 방식을 잘 모를뿐더러 능숙하지 않은 영어로 듣고 말하기란 자체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그해 겨울, 할머니 앞으로 봉투가 하나가 날아왔다. 할머니에게 온 우편물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던 시기였다. 그 봉투만큼은 그럴 수 없었는데 소인이 일본으로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일본에서 할머니에게 우편이 날라올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봉투를 열어보았다. 크리스마스 연하장이었다. 카드 속 손글씨는 가지런하고 단정했으나 온통 일본어로 쓰여있어 읽을 수 없었다. 카드 말미에 유일하게 영어로 적은 보낸 이의 이름만 읽을 수 있었다.

Shuji Asami(슈지 아사미)

그가 누군지, 할머니와 어떤 관계인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일본어로 적힌 내용을 해석하고자 방법을 찾는다면 못 할 것도 없었으나 당시로서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카드는 며칠간 식탁 구석 어딘가 방치되어 있다가 행방이 묘연해졌다. 다른 우편물에 섞여 쓰레기통에 들어갔는지 아니면 언니가 어딘가로 치워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카드는 사라졌고 기억에서도 잊혔다. 





몇 달이 흐르고 할머니의 유품정리는 대체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여전히 혼란은 연속되고 있었다. 가을부터 밴쿠버에 소재한 2년제 대학에 다니기 시작하여 서른 중반의 나이에 학생 신분이 되었다. 미숙한 영어는 여전히 발목을 잡았고 학교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했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12월이 돌아와 있었다. 학교가 겨울 방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어느 날 우편함을 살펴보니 카드 한 장이 도착해 있었다. 할머니 앞으로 온 것이었다. 한동안 집으로 오는 우편은 죄다 할머니 이름이 박혀있었지만 돌아가신지 일 년이 넘은 당시에는 더 이상 그녀 앞으로 오는 우편물은 없었다. 의아한 마음에 봉투 겉면을 살펴보았다.

슈지 아사미.

이름을 본 순간 작년 이맘때 일본에서 날아온 크리스마스 카드가 기억났다. 패턴이라면 슈지 아사미라는 사람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매년 연하장을 보내는 중이었다. 부고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연하장은 다음 해에도 날아올 터였다.





이때가 십 년 전이었으니 요즘처럼 스마트 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실시간으로 번역이 되는 애플리케이션은 없던 시절이었다. 운 좋게도 같은 과 동급생 중에 일본인이 몇 명 있었다. 그 중 친하게 지내던 한 명에게 연락해 카드 속 글을 번역해 달라 부탁했다. 일본인 친구가 해석해 보내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조재순 님
건강하시죠? 세계는 테러 등으로 많은 사람이 죽는 슬픈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평화롭고 온화한 일상이 찾아오길 기원합니다. 저는 몸 상태도 좋고 변함없이 니케이 신문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다지 바쁘지 않고, 때때로 온천이나 골프를 다녀옵니다. 조 상, 건강 조심하시고 꼭 장수해 주세요.
슈지 아사미


신문사에 근무한다니 그는 어쩌면 기자인지도 몰랐다. 그밖에 알수있는 신상 정보는 도쿄에 거주하는 남자라는 사실 정도였다. 정작 할머니와 어떤 인연인지 알 만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한국의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할머니와 연락하고 지내는 일본인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지만 전혀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슈지 아사미와 할머니, 둘 사이 관계는 그대로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지난 주말 부재중 받지 못한 택배를 찾으러 우체국에 들렀다. 바로 앞에 줄을 선 짧은 머리를 한 동양 남자의 옆구리에도 작은 소포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누런 종이로 꽁꽁 싸맨 상자의 겉면에 굵게 Japan이라고 적힌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불쑥 이름 하나가 떠오른다. 슈지 아사미. 기억너머 사라져 있던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때 나는 할머니 대신 답장을 썼었다. 영어로 쓴 뒤 일전에 카드 내용을 번역해 준 일본인 친구에게 일본어로 옮겨달라 부탁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조재순 씨 손녀입니다.
매년 할머니께 카드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제 카드를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할머니는 2013년 12월에 노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소식 전해드려 유감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답장을 보낸 이후 별다른 회신은 없었다. 그가 소식을 받은 것만은 확실해 보였는데 어쨌거나 다음 해부터 연하장은 더 이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부고 소식에 그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많이 슬퍼했을까? 아직 할머니를 기억하고 있을까? 무엇보다 할머니와는 어떻게 알고 지내는 사이였을까?





이 오래된 의문은 얼마 전에 풀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아빠와 이혼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엄마를 통해서다. 할머니의 아들인 아빠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걸 엄마는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10년 전 받았던 슈지 아사미의 연하장에 대해 설명하면서 예전에 할머니와 알고 지내던 일본사람이 있었냐고 엄마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처음에 모른다는 반응을 보이던 엄마가 불현듯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아주 오래전 할머니 집에 일본인 대학생 한 명이 일 년 정도 머문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학생들을 상대로 하숙이라도 쳤나요?" 

내가 묻자 그런 것은 아니고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 엉겁결에 그리되었다고 했다. 그가 무슨 연유로 한국에 왔는지, 할머니를 소개한 지인이 누구였는지 당시에 들은 것도 같은데 지금에 와서는 세세한 부분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엄마는 덧붙였다. 정황상 슈지 아사미는 할머니 집에서 하숙을 했다는 그 일본인 대학생일 가능성이 컸다.

"그 사람이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쭉 연락을 해왔나 보구나. 그때가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고 얼마 안 된 때였어. 네 언니가 태어나기도 전이었거든.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안 끊겼다니 신기하네. 할머니가 중간에 캐나다로 이민까지 갔는데 말이야."

그가 오랜 기간 잊지 않고 안부를 챙기는 걸 보면 할머니는 내 예상보다 훨씬 친절한 사람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일본인과 소통할 정도로 일본어가 유창하기까지 했다.

"그 나이대 노인네들은 대부분 일본말 잘해. 일본 강점기에는 한국말 못 쓰게 하고 일본어를 가르쳤거든."

할머니의 일본어 실력에 대해 언급하자 엄마가 말했다. 학교 역사시간에 배운 바 있지만 정작 할머니가 그 시대 사람이었다는 것조차 자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정말이지 그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진 만큼 생전에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고부갈등이 있었 엄마는 할머니에 대해서 시종일관 안 좋은 소리만 했었다. 어린 나로서는 엄마의 말에 영향을 받아 한동안은 할머니에 대해 알 수 없는 반감을 품기도 했다. 성인이 된 이후 어느 한쪽의 입장만 덮어놓고 두둔할 정도로 자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긴 세월에 걸친 소통의 부재는 어쩔 수 없어서 실상 할머니에 대해 좋거나 싫은 감정조차 없는, 말 그대로 무관심한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처음 할머니가 살던 집에 기거하면서 유품을 정리하게 되었을 때 낯선 타인의 삶에 의도치 않게 관여하게 된 듯한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흥미롭게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할머니가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여즉 할머니가 살던 집에 살면서 할머니가 쓰던 물건들, 예컨데 온갖 가전제품부터 하다못해 세숫대야까지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 할머니의 흔적과 수시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그녀의 취향과 살림 방식이 어땠는지 세밀한 부분까지 잘 아는 정도가 되었다. 

타국에서 이민자로 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할머니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민 올 의 나이가 거의 칠순에 가까웠다고 하는데 그 나이에 해외에 나가 살기로 하다니 결단력과 용기가 존경스럽다 못해 본받고 싶을 지경이. 외로움이 급습하고 가족과 친구가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면 할머니가 떠오른다. 이곳에서의 삶이 어땠나요? 고국이 그립지 않았나요? 왜 늦은 나이에 이 낯선 나라로 왔나요? 살아계신다면 직접 물어보고 싶다. 이주노동자로서의 고단함과 타국에서 늙어가는 현실에 대한 고민도 털어놓고 싶다. 할머니라면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






할머니의 오랜 친구였던 슈지 아사미,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문득 안부가 궁금해진다.


슈지 아사미님께

세상은 그 이후로도 테러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럭저럭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잘 지내고 있나요? 아직도 신문사에 다니고 있습니까?멀리 일본에서 해마다 할머니를 잊지 않고 마음을 써주어 정말 고마웠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나의 할머니가 좋은 사람으로 당신의 기억 어딘가 오래도록 남아있기를 염원해 봅니다. 평안한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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