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여정이 주는 의외성과 그 즐거움
요 며칠 사이에 나의 상상을 붙들어 온 그 여행을 정말 감행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p.9
어쩌다 보니 갑자기 반차
독서모임을 전부터 계속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고정으로 나가는 독서 모임이 이미 하나 있지만 한 달에 한 번만 모이는 일정이다 보니 뭔가 감질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다른 사람들과 책에 대해 같이 토론도 하고, 그러면서 친분도 다질 수 있는 이상적인(?) 모임이 어딘가에 또 있으리라 기대하며 이곳저곳 기울이게 된다.
모임을 알아보던 초기에는 지역보다는 책, 주제, 인원수 등에 집중해서 탐색하곤 했지만 막상 모임일에 찾아가는 과정이 생각보다 고단한 점이 문제였다. 주말의 휴식시간은 원래 이런 활동에 쓰라고 있는 거지만 왕복과 활동시간만 해도 4~5시간을 써버리면 하루가 다 가버리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점차 직장 아니면 주거지 근처 위주로 알아보고 있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괜찮은 거리에, 모이는 시간도 적절하고, 인원수도 적당하여 모임을 신청하고 모임일까지 맞춰 책을 읽다가 하루 전에야 일정을 확인하고는 깨달았다. 요일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걸. 금요일 퇴근시간에 맞춰 도착해야 하는데 대중교통도 직행으로 가는 편이 없는 위치였다.
일찍 가봐야 할 일이 있다고 조퇴를 하더라도 요즘은 8시 출근 5시 퇴근 회사도 많아서인지 5시가 조금만 지나도 지하철에 사람이 붐빈다. 금요일이라는 요일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단순히 1시간 조퇴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았다. 결국 계획에 전혀 없었지만 금요일 당일에 오후 반차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동안 병원이나 은행 등 사정이 있는 경우에만 반차를 사용해 왔지 쉴 때는 연차를 쓰는 편이라 오후 퇴근은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업무와 회사로부터의 때 이른 해방감과 함께 모임시간 전까지의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이 생겼다.
어쩌다 보니 잔디밭 독서
저녁식사 이후에 모이는 일정이었지만 못해도 4~5시간이 비어있던 나는 처음에는 역 근처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까 생각했다. 어차피 출퇴근 때 지하철로 왔다 갔다 이동하는 시간이 상당하여 항상 책을 들고 다니기에 시간을 때울 거리는 걱정이 없었다. 문제는 '어디에서' 시간을 때우느냐였다. 일터와 집을 제외하면 내가 장시간 시간을 보낼만한 공간, 특히 공공의 장소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카페라도 장시간 앉아 있기는 부담스러울 듯하여 고민하다가 모임장소 주변의 지도를 찾아보았다. 오래전에 가본 적 있는 공원이 마침 근처에 있었다. 호수도 있고, 나무도 있는 이 공원에서 어딘가 조용한 벤치에 앉아 책을 읽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저녁을 먹기 위해 또다시 이동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평소 자주 가던 직장 근처의 샌드위치 가게에 들러 포장주문을 했다. 계획에 없던 메뉴도 추가되었다.
역에서 내려 공원으로 걸어가는데 생각보다 공원 출입구가 멀리 있었다. 공원의 가장자리 모서리여서인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어도 실제로는 개방하지 않은 입구도 있었다. 지도 앱으로 거리를 감안해서 보니 못해도 20분 정도는 족히 걸릴 위치였다. 동선이 길어질수록 모임 시작시간에 맞춰 돌아가는 것도 일일 듯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잔디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또 한 번 생각이 났다. 어쩌다 이 근처를 지나갈 때면 늘 눈에 밟히던 공간이었지만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다른 일, 다른 약속, 다른 일정을 향해 이동하느라 가보고 싶다고 생각만 할 뿐 정작 시간을 내서 올 생각은 못했던 날들이.
횡단보도를 건너 조심스레 울타리의 열린 문 사이로 잔디를 밟아봤다. 아스팔트, 벽돌, 대리석이나 시멘트, 에스컬레이터, 지하철에서의 평평한 밋밋함에 익숙했던 신발 아래로 완만하지만 울룽불룽한 흙의 물결과 풀의 아삭함이 전해져 온다.
아삭아삭
사각사각
그 느낌이 싫지 않아 맴돌다 잔디 근처의 빈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아서 한동안 풍경을 계속 바라봤다. 멀리서 지나가는 차들의 흐름, 잔디밭에 온 사람들, 조금씩 다가오는 구름, 무언가를 계속 쪼고 있는 까치들. 그리고 드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머리 위의 잎사귀들. 찬바람이 조금 불었지만 그 찬 기운이 오히려 좋았다.
그렇게 조용함을 즐기다가 책을 읽었다. 한동안 읽다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바뀐 하늘의 빛깔을 바라본다. 또 책을 읽다가 지루해지면 내려놓고는 기지개를 켜고, 저물어가는 하루에 맞춰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건물과 차들의 헤드라이트를 보기도 한다. 6시가 되자 들고 온 샌드위치를 꺼내 먹었다.
점심시간을 아낀다며 누군가의 밥 먹는 속도에 맞춰 허겁지겁 먹거나 기다릴 필요가 없었고, 흥미는 있지만 그렇게까지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는 않은 누군가의 생활이나 업무의 견해에 보조를 맞춰 줄 필요도 없었다. 눈으로는 도시와 자연의 경치를 맛보고, 입으로는 음식을 맛보고, 머리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를 맛보았다. 시간을 쫓아가지 않고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이 이런 것일까 생각해 본다.
샌드위치를 다 먹으니 어느새 해는 저물고 날은 어두워졌다. 시간이 되어 독서모임 장소로 이동했고 몇 시간 동안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오늘이 아직 평일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기분이 좋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늘 이 하루가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독서 모임은 생각보다 무난했다. 특별히 싫지도 좋지도 않은 기대만큼의 경험이었다. 오히려 예정되어 있던 독서모임보다는 그 모임에 가기까지의 의외성이 내게 가져다준 경험이 신선했다.
휴가를 써도 늘 언제 쓸지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하더라도 다음에는 뭘 해야 하는지 생각하며 살아왔다. 계획이 있는 삶은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하다. 기대할 것도, 실망할 것도 모두 예상되는 범위 안에서 움직이게 된다. 대응하기 쉽지만 대신 자극적이지는 않다.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좀 더 자주 뜻밖의 여정을 나설 것 같은 기분이다.
"오늘 반차, 사용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