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0 서울 서촌 책방과 북카페
내 앞에 놓인 여행길에 어울리는 기분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것도 거기에서 그렇게 경치를 구경하고 있을 때였던 것 같다. 분명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여러 가지 흥미로운 경험들에 대한 건강한 기대감이 왈칵 치솟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으니까 말이다.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p.43
오후 반차, 사용하겠습니다.
직장인들에게 휴가란 '휴식'이라기보다는 '일의 부재'가 더 맞는 개념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연차나 반차를 쓰려고 해도 나의 일정 또는 팀의 업무 일정을 고려해 비어있는 시간을 찾아야 한다. 휴가는 그 사용의 시작부터 업무와 회사의 여유지점을 직원이 찾아내고, 상급자로부터 결재를 받아, 회사라는 공간을 잠시 벗어나는 행위이니 말이다.
이전에 독서 모임 때문에 갑자기 오후 반차를 쓸 일이 있었다. 일정을 헷갈렸던 나의 착오가 만들어낸 사소한 사건이지만 그때의 경험은 꽤 오래 기억에 남을 듯했다.
8등분으로 먹기 좋게 잘라져 있는 케이크처럼 시간은 늘 편집되고 짜여 있었다. 업무는 이때, 휴가는 이때. 그러다 계획에 없던 반차가 들어오면서 오후 몇 시간이라는 뭉텅이를 덥석 건네받았다. 정갈하고 흠집 하나 없는 온전한 케이크 하나를 받아 든 느낌이었다. 어떻게 자르든, 어떤 모양으로 먹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을 겪어 보니 시간의 물리적 느낌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이틀 연속으로 오후 반차를 사용하겠다는 말에 팀장은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여태껏 그렇게 반차를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한테도 반차 여정은 새로운 시도였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전에는 모임으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미 시간과 목적지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온전히 오후 반나절이 주어졌다. 뭘 해야 할까? 어디를 가야 할까?
2~3전부터 반차 때 무엇을 할지 고민하며 서울의 갈만한 곳들을 검색해 봤다. 서울에 직장을 두고도 서울 구경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으니 어디서 뭘 봐야 할지 찾는 것도 일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차에 출근길에 늘 지나치는 카페가 머리에 떠올랐다. 레몬 마들렌을 파는 개인 카페가 있는데 언젠가 그곳에 들러 여유 있게 차와 마들렌을 먹으며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만 할 뿐 실행에 옮기지 않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 서울 구경
- 카페, 책과 독서
하고 싶은 것들을 조합하며 찾아보니 서촌에 독립서점과 책방들이 모여 있었다. 더구나 옆에는 바로 가까이에 경복궁도 있으니 돌담도 한 번 볼 수 있을 테고. 서촌에는 북촌만큼은 아니지만 한옥들도 좀 있는 듯했다. 반차 당일, 점심 시작 시간에 맞춰 회사를 나서 3호선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서울 서촌이다.
경복궁역
경복궁역에 내리니 눈에 띄는 건 외국인 방문객들과 유물들을 본떠 설치한 설치미술 작품들이었다. 지하철 출구로 나와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에도 이곳저곳 외국인들이 자주 보였다. 가장 한국적인 과거가 담긴 장소에 이국적인 사람들이 방문하는 공간을 보며 잠시나마 '다른 한국'의 모습을 엿보았다.
나는 출퇴근길과 뉴스를 통해서 한국을 접한다. '나'라는 존재의 세계에서 내가 아는 한국의 모습은 그것이 전부다. 한국의 안에 살고 있지만 나 자신은 내부인이기 때문에 밖에서 본 한국을 알지 못한다. 내가 지금 향하는 서촌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서울과 한국의 또 다른 모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다른 이들 모두 각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한국이 늘어날수록, 한국의 층위와 각도가 다양해질수록 즐거움도 늘어날 것이다.
식사를 위해 미리 찾아본 식당으로 이동했다. 날이 춥고 평일 점심이어서인지 개시하지 않은 음식점들이 제법 많았다.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수제비 집을 택했다. 거리를 볼 수 있는 바깥자리가 있어 그곳에 앉았다. 생각보다 수제비를 간판으로 내세우거나 주 메뉴로 판매하는 식당을 보기 어렵다. 분식집에서 파는 수제비들 중에서는 기성 수제비 제품 반죽을 쓰는 곳들도 있기에 사람 손이 빚어낸 '못생긴' 수제비를 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곳을 택한 건지도 모른다.
반죽과 면 그리고 들어간 구성물이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이 집에서 더 만족한 건 의외로 수제비보다도 그 식사에 곁들여 나온 작은 껌 하나였다. 연인이나 관광객들을 위해서인지 식사 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작은 향기껌 하나가 곁들여져 있었다. 배려의 흔적이다. 개인적으로 배려는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매너'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좀 더 공적인 자리로 이동할수록, 규모와 정도가 확대되어 하나의 정형화된 의식이 될 때 배려는 매너로 발전한다. 따라서 배려는 대개 매너의 전 단계이기에 사소하다. 때론 배려받는 사람은 그것이 배려였는지 의식조차 못할 수도 있다. 배려는 결과 그 자체나 인정을 받기 위함보다는 상대를 생각의 앞에 두는 마음가짐이다. 아무리 작고 사소하더라도 배려가 가치 있는 이유는 그런 성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식사를 할 때 식사 전의 기대감, 식사 중의 충족감, 식후의 쾌적함이 매끄럽게 이어질 때 만족을 느낀다. 껌 하나에 담긴 배려만큼의 기분 좋은 상쾌함을 갖고 다시 길을 나섰다. 식후의 마무리까지 신경 쓰는 그 배려가 기억에 남아 다음에 또 오게 될 듯싶다.
서촌칼제비(일요일 정기휴무)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4분 거리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194
거리탐방
서촌 한옥골목으로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가로수 이불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뜨개질 무늬인 줄 알았으나 하나하나가 다양한 장식과 디자인을 담은 하나의 '작품'들이었다. 모든 가로수에 이불이 있고 하나도 같은 종류의 것이 없다. 양측에 늘어선 가게들 못지않게 가로수를 보는 재미가 있다. 각 작품들에는 QR코드를 넣은 태그가 붙어있어 핸드폰으로 작품의 제작자나 설명을 읽어볼 수 있다.
가로수 작품들과 더불어 가게들도 다양하다. 미술관이나 갤러리도 있고, 커피를 내리는 사장님들도 종종 보인다. 식당들은 정취를 감상할 수 있도록 넓은 유리창으로 장식되어 있어 밖에서 안을, 안에서 밖을 볼 수 있다. 늦은 시간에도 식사를 하는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그렇게 가게들을 보다 보면 한옥골목이 나타난다. 골목 안에서는 되도록 조용히 걸어 다녔다. 북촌 한옥마을 외에도 한동안 인기였던 양양도 그렇고 사람들이 자주 방문하는 관광지 거리에 사는 주민들은 카메라 셔터, 대화소리, 터벅터벅 발소리, 캐리어 끄는 소리 같은 자잘한 생활소음 공해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방문자에게는 관광지일지 몰라도 그곳의 주민들에게는 생활권인 지역에 대해서는 서로의 존중이 필요하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움직여 본다.
하지만 꼭 조심성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곳에 들어오니 저절로 모든 활동과 인식과정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전선과 전신주, 돌담과 목재, 콘크리트와 창살, 한옥문과 현대적 도어록이 함께 섞인 이 공간은 그 자체로 매력이 있다. 그 매력들을 감상하기 위해 잠시 멈춰서 보고, 때론 다시 뒤로 좀 돌아가서 더 전체적인 구도를 감상하다 보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진다.
오히려 순수 전통 가옥만 있었다면 민속촌에 온 듯한 '관광지'의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주민들이 만든 다양한 세월의 흔적은 전통과 현대라는 양 축 모두에 걸쳐 있었고, 그 의도치 않은 어우러짐이 둘을 자연스럽게 하나의 풍경으로 녹이고 있다.
대오서점, 나를 잊지 말아 줘
한옥골목을 좀 더 지나면 상가가 나온다. 방문객과 외국인들을 의식한 듯 현대적이고 세련된 가게들이 많다. 근사한 카페와 디저트 가게, 헤어숍, 장신구와 옷 그리고 그 사이에는 간간이 한약방이나 이발소 같은 골목의 옛 흔적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옥골목의 변주곡과 같은 느낌이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사진을 찍다 한 서점이 계속 눈에 밟혔다.
딱 봐도 옛날 책과 사진들이 가득한 '대오서점'. 산뜻하고 가벼운 느낌을 주는 주변의 가게들과의 대비로 인해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다. 골목 구경을 다 하고 목표로 한 책방으로 이동하려던 참이었으나 결국 가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대오서점으로 돌아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을 보고 가지 않으면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가게로 들어가 핫초코를 하나 시켰다. 핫초코가 나오는 동안 가게 안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며 안을 둘러보았다. 둘씩 짝지어 온 손님들이 보였다. 외국에서 온 관광객도 있었는데 벽 한쪽에는 그동안 이곳을 찾아온 외국인들의 글귀가 적힌 카드가 한가득이었다.
여기저기 꽂혀 있는 책들 중에는 워낙 오래되어 눈으로 볼 수만 있을 뿐 손대서는 안 되는 책들도 있었다. 펼쳐볼 수 있는 책들은 주로 90년대를 전후로 출간된 것들이었다. 벽이나 선반에 꽂힌 옛날 만화책들을 보니 초등학생 시절 동네 이발소에 가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파트 바로 앞 상가 2층에 이발소가 있었는데 그곳을 좋아했던 이유는 만화책이 한가득 있었기 때문이다.
참을성이 부족한 어린아이들 입장에서는 아빠랑 같이 또는 혼자 갔을 때 다른 손님들을 기다리는 시간을 인내하기가 쉽지 않다. 주인아저씨도 그걸 알아서인지 여러 만화책들을 가져다 놓았다. 그중에는 짱구도 있었고 접지전사에 국내 만화잡지 '챔프'도 있었다. 그 이발소는 이발만이 아니라 얼굴마사지와 면도, 눈썹정리도 해주던 곳이었기에 앞에 먼저 온 다른 손님들이 있으면 시간과의 싸움은 기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곳저곳 둘러보다 책장에서 왠지 낯익은 제목을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 한 권을 꺼내본다.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70년대~90년대생 중에는 이 프로그램을 아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전체 이용가 연령에 온갖 신기한 동물들을 퀴즈 형태로 재밌게 소개하던 TV프로그램이었기에 가족이 모여 앉아 보기에 제격이었다.
우리 집에도 이 책이 있었다. 처음에는 겉표지를 보며 이 책이 맞나? 긴가민가 했지만 몇 장 넘기다 보니 어릴 적 기억에 각인되어 있던 익숙한 페이지들이 보였다. 대부분의 내용은 시간이 지나 그림도 기억나지 않지만 극히 일부는 생생하게 머리에 남아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려서부터 파충류를 특히 좋아했다. 아마도 어린 시절 공룡을 좋아해서 이름과 종류를 외우고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파충류도 좋아하게 된 듯한데 이 책을 읽을 때도 파충류 부분을 특히 여러 본 탐독한 기억이 있다.
칼 세이건은 글쓰기가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며, 그 이유로 글을 통해 인간이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 마법사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라도 우리는 글을 통해 그 시대의 가치와 기억을 마주할 수 있다. 이제는 어디서 찾아보기도 힘든 작고 얇은 어린이용 도서를 다시 펼쳐보면서 어릴 적의 나 자신, 잊고 있었던 과거를 떠올렸으니 그의 말대로 난 시간여행을 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대오서점은 과거에 가게를 운영하시던 주인 할아버지/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그 후로는 가족분들께서 유지 중인 상황이다. 과거 이곳에 얽힌 기억과 흔적을 그저 한 순간에 없애버리지 않기 위해서다. 먼저 들렀다가 나가는 손님 중에는 주인 분과 함께 이곳의 과거를 얘기하는 분들도 있었다. 대오서점은 매 순간 낡아가고 있지만 기억 속에서, 누군가와의 대화 속에서 매 순간 새로워지고 있다. 책을 통해 우리가 시간을 넘나들 듯, 대화와 기억을 통해 과거가 반복될 수 있다면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될 수 있다.
대오서점을 지나치려다가 머리에 맴돈 후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쩌면 단순한 생각이 아닌지도 모른다. 이 서점의 책장 귀퉁이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작은 만화책처럼,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과거의 '나' 자신이 보내온 희미한 부름이 아니었을까. 그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돌아선 것에, 그 뜻밖의 만남에 감사한다.
대오서점을 계속 운영하고 계신 가족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고 싶다.
대오서점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8분 거리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33
책책冊冊, 골목의 삼각 오아시스
대오서점에서의 기분 좋은 추억을 안고 원래 목표로 했던 첫 장소인 독립서점 '책책'으로 향했다. 책책이 주는 첫인상은 오아시스다. 좀 더 고층의 상가와 주거건물이 가득한 종로의 한복판에 1층 독립서점이 자리 잡고 있다. 콘크리트와 보도블록의 바다 한가운데에 떠다니는 조각배 같기도 하고, 광활한 들판이나 사막 한 곳에 있는 호수나 오아시스 같기도 하다.
복잡하고 붐비는 것들로부터의 '눈에 띄는 고립감'을 원한다면 책책이 제격이다. 음악과 벽면의 책장들이 인파와 소음으로부터 방문객을 차단하고 고요함을 느끼도록 해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유리창을 통해 창 밖으로는 여전히 세상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고립되어 있지만 완전한 고립은 아닌 연결성이 공존하는 공간, 그곳이 바로 책책이다.
오프라인/온라인 서점에 가면 때로는 그 규모나 보관장서의 다양성으로 인해 되려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펼쳐 들기가 선뜻 망설여질 때가 있다. 반면 독립서점이나 책방들은 매장의 규모가 작지만 오히려 그 덕에 상대적으로 책의 밀집도가 높다. 각 서점/책방을 운영하시는 분들의 성향이 공간의 배치, 추천 도서, 내부 인테리어와 연결되는 걸 보는 점 또한 하나의 재미 요소다.
책책은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공간, 추천 도서 공간 그리고 굿즈 공간 세 곳이 삼각형의 동선을 따라 구분되어 있다. 그 덕에 물리적으로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각 변의 모서리를 돌 때마다 방이 주는 인상이 서로 다르므로 마치 다른 장소에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한쪽 모서리에서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차 냄새가, 다른 모서리에서는 책장이 사방을 둘러싸며 방문자를 맞이한다.
추천 도서들 중에서는 김겨울의 <책의 말들>과 맥스 디킨스의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가 눈에 들어왔다. <책의 말들>에서는 글쓰기에 있어서 느끼는 크고 작은 고민들을,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가는 인생에서의 고민을 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책들보다 표지와 프롤로그가 눈에 밟혔다.
이전 대오서점에서 이미 핫초코를 마셨다 보니 또 물배를 채우기는 부담스러워 구경만 하다 굿즈 공간에서 얇은 노트와 연필 하나를 구매했다. 책을 읽다 보면, 또는 무언가를 생각하다 보면 메모를 하고 싶은데 매번 일일이 핸드폰을 꺼내 입력하기 번거로운 순간들이 있다. 가방 한편에 두고 다닐 수 있는 필기구와 노트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 집어 들었다.
책책(월요일 정기휴무)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2분 거리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 1나길 11
보안책방, 카페-전시-책-광화문의 교차로
책책을 나와 시간을 보니 아직 오후 4시도 안 되었다. 다음 책방을 향해 이동하던 중 저 너머에 광화문 돌담길이 보였다. 이미 이파리도 거의 다 떨어진 겨울이지만 돌담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큰 대로를 향해 계속 걸어가 광화문으로 향했다. 경복궁이 있어서인지 광화문에 가까워질수록 훨씬 더 많은 외국인들이 보였다. 각양각색의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한복과 갓을 쓰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재밌다. 문을 통해 그들은 과거와 전통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다시금 문을 통해 현재의 한국으로 돌아온다.
광화문에서부터 시작해 돌담을 따라 10분 정도 걷다 보면 보안책방이 나온다. 보안책방의 장점은 다목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1층은 사람들이 모여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 2층은 책 소개와 전시를 하고 조용히 독서를 할 수 있는 책방, 3~4층은 5개의 객실이 있고 지하는 전시공간이다. (방문했을 당시에는 다음 전시를 준비하느라 공사 중이었다) 서울 방문 차 숙박을 겸한다면 보안책방 한 건물 안에서 여러 문화생활과 체험을 한 번에 경험할 수 있으니 혼자든 또는 친구나 연인과 방문하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기 좋은 장소다.
독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 방문한 세 곳 중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대오서점은 의미와 상징성 그리고 기억의 공간으로서 뜻깊지만 오래 독서를 하기에는 자리가 협소한 편이다. 책책冊冊은 삼각형의 공간 배치가 특이하고 추천 도서를 감상하는 재미가 있지만 책을 읽을 수 있는 자리가 차를 마시는 곳과 겹치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손님이 많을 경우 다소 방해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반면 보안책방은 각 층별로 목적과 기능을 나누고 있기 때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방문한 이용자들의 공간이 겹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고 흥겨운 음악이 나오는 1층과 달리, 2층은 독서실처럼 조용하고 정적인 분위기다. 여러 가지 목적을 한 건물 안에 담으면서도 각 영역을 구분하고 침범하지 않으며 존중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 같다.
저녁식사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밀크티 하나를 주문한 뒤 자리를 잡았다. 다음 독서모임에 가져갈 책으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들고 왔다. 이번에 읽으면 벌써 네 번 완독 하게 되는 작품이다. 이미 시작과 과정, 결론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다시 읽게 되는 책이다.
점입가경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고사성어의 기원에는 사탕수수가 있다. 중국의 화가였던 고개지라는 사람은 사탕수수를 즐겨 먹었다. 사탕수수는 자연에서 나는 식물이다 보니 그 줄기의 맛이 균일하지 않고 보통 뿌리 쪽에 가까울수록 단 맛이 많이 난다. 고개지는 항상 뿌리로부터 가장 먼 쪽부터 씹어가며 단물을 음미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며 그 이유를 묻자 고개지는 이렇게 말한다. '(뿌리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재밌어진다' 가까운 생활의 비유로 치면 고개지는 음식 중에서 좋아하는 것을 가장 나중에 먹는 유형인 셈이다.
책도 비슷하다. 흥미롭고 유익하며 재미있지만 한 번 보고 나면 굳이 또 펼쳐볼 생각은 들지 않는 작품들이 있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을 알고 있고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가장 극적인 장면이나 대사가 무엇인지 기억에 각인되므로 처음 읽을 때만큼의 감동이 반복되지는 않는다. 맛있는 부분을 다 즐겼으니 더 이상 파고 들어갈 곳은 없다.
반면 어떤 책은 극적이지도 않고, 마음에 전율이나 울림을 주지도 않는다. 책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처럼 쏟아지기보다는 안개처럼 서서히 스며드는 책들이다. 읽고 나면 어떤 희미한 윤곽이 보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내 마음에 책이 들어왔지만 그 형태와 모양이 아직 구체적이지 않다. 그것을 끄집어내기 위해 책을 다시 읽다 보면 처음의 인상과는 다른 사고와 감상이 떠오른다. 이전에 읽었을 때는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 무심코 지나갔던 부분이 연결되기도 한다. 이때부터 그 책은 같은 책임에도 다른 책이 된다. 맛있는 부분이 점점 드러나는 것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그런 책이다.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분위기와 서사는 침착하면서도 강물처럼 조용하게 흘러만 간다. 급류도 없고, 떨어지는 폭포도 없으며, 감탄을 자아내는 풍경도 없다. 강물을 따라 함께 그 옆을 걷다 보면 비슷한 경치가 반복된다. 하지만 다 걷고 나서 하류에 도착해 보면 어느새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비로소 그 걸어온 과정 전체가 이곳에 오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매일 먹는 집밥처럼 두고두고 머리가 먹을 수 있는 책 하나쯤은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을 한 시간 정도 읽은 뒤 책방의 공간과 추천 도서들을 감상했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볼 수 없는 책들도 일부 있는데 이런 게 책방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서점들은 주문과 조회의 편의성은 높을지 몰라도, 흥행과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편집자의 추천이나 인기 도서 코너들이 있지만 무수히 많은 책의 목록 속에서 독자가 자신이 원하는 유형의 책을 찾기는 쉽지 않다.
책방이나 독립서점이 중요한 이유는 독서/출판업계의 다양성 측면 외에도, 책을 즐겨 읽는 독자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수행하는 점도 있다고 본다. 웹사이트가 쿠키와 검색기록만으로 추천하는 무미건조한 제안보다는 책을 먼저 읽어본 사람의 발자취가 더 가치 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선반과 책장에 꽂힌 추천 도서들 중 두 책이 눈길을 끌었다.
<언더랜드>는 땅 밑 지하세계를 다룬다. 35,000년 전의 원시인들이 남기고 간 지하동굴 속 손자국부터 이집트의 미라, 카타콤과 방사능과 유독 폐기물을 매립하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발 밑에서 일어난 일들을 추적하되 서정적인 문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하는 우리가 안식을 위해 사후세계로 들어서는 공간이자, 미지의 탐험이 기다리는 곳이며, 공포스러운 어둠이자 우리가 숨기고 싶은 것들을 던져놓고 덮어버리는 쓰레기장이기도 했다. 지상에서의 일에만 관심을 갖느라 인간이 애써 무시해 온 지하의 영역들 그리고 그 의미를 조명한다.
<궁정인 갈릴레오>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과학자로서 소개하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연구를 위해 궁정의 후원이 필요했던 사회인로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추적한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며 객관적이라고 말하지만 고대부터 시작하여 과학은 과학자를 통해 연구되었고, 과학자들도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학계와 후원자들의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진리의 추구자로서 갈릴레오를 설명하거나, 또는 그의 과학적 업적을 소개하지는 않는다.
보안책방에는 특별한 존재가 하나 있는데 바로 '연두'다. 2층에 자기 공간이 있는 연두는 자유롭게 보안책방과 건물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다만 연두가 놀라거나 긴장하지 않도록 너무 가까이에서 사진을 촬영하거나, 플래시를 이용하거나, 만지고 쓰다듬는 건 금지되어 있다.
책방에 있다 보면 이런 소리가 들린다.
찹찹찹찹
연두의 발소리다. 추천 도서를 읽던 중 연두가 처음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일부러 돌아보거나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렇게 가만히 서 있는데 오른쪽 다리 무릎 아래로 약간의 차가운 감촉과 함께 무언가 꾹 누르는 느낌이 왔다. 연두가 새로 온 손님의 냄새를 익히기 위해서인지 코를 묻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개코 특유의 차가움이 기분 좋게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연두에게 코도장을 받았다.
2층에 마지막까지 있던 손님이 나였는데 연두가 책방 문 앞에서 배웅하듯 지켜보는 모습을 뒤로 하고 나왔다.
보안책방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8분 거리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33
중국식 만두를 먹으며
6시가 되어 저녁을 먹으러 다시 상가로 향했다. 사실 서촌에 오기 전 검색을 할 당시 이곳에 오기로 한 이유 중 하나가 이 집 때문이었다. 중국식 만두를 파는 맛집이 있다는데 사진들을 보니 맛이 궁금하여 와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중국이나 홍콩을 배경으로 하는 옛날 만화나 영화에서 나오던 중국식 만두가 어떤 맛일지 상상하곤 했는데 그 궁금증을 꼭 해결하고 싶었다.
가게에 도착하면 큼지막한 검은 건물이 있어 찾기 쉽다. 지금은 겨울이라 닫혀 있지만 날이 풀려있을 때는 1층 출입구 옆을 개방하여 만두를 빚고 찌는 모습을 밖에서도 구경할 수 있는 듯하다. 1층은 주방 공간이기 때문에 포장하는 사람들이 서서 기다리는 곳이고, 매장에서 식사를 하려면 2층으로 올라가면 된다.
식사로 포자만두 하나를 주문했다. 만두 하나로 배가 찰까 고민이 되었는데 나온 양과 만두 개수를 보니 하나만 시키기를 잘했다. 주먹보다 살짝 작은 만두가 8개나 나오기 때문에 양이 제법 된다.
외형적으로나 식감 모두 만두보다는 고기나 야채찐빵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면 된다. 대신 찐빵보다는 더 기름과 돼지고기가 많이 들어가 향이 강한 느낌. 일반적인 고기만두를 생각하고 먹으면 경우에 따라서는 살짝 간이 심심하다고 느낄 수 있어 간장을 찍거나 곁들여 먹는 게 좋다. 만두피 또한 찐만두나 물만두 같은 식감이 아니라 빵의 식감이고 대신 기름이 살짝 안쪽이 절여져 있어 마치 수프를 찍은 빵처럼 부들부들하다.
다만 기름기가 꽤 있고 간이 심심하기 때문에 계속 먹다 보면 물리거나 느끼할 수 있는 편이다. 혼자 식사용으로 먹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왔을 때 다른 중식 메뉴를 시키면서 사이드로 시키는 편이 더 좋아보였다. 사실 군만두와 포자만두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했는데 그래도 새로운 음식을 도전해봐야한다는 생각에 포자만두를 시켰으나 기대가 너무 과했는지도 모른다.
이번 여정이 만족스러웠으므로 다음 번에 다시 온다면 그때는 군만두와 바깥 풍경을 안주 삼아 맥주 한 병 마시는 도전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차이치(월요일 정기휴무)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4분 거리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7길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