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1 강남 리벤벨레프, 대치동 서점
오후 반차, 사용하겠습니다.
한 달 전쯤 인사팀에서 각 부서로 공문이 왔다. 회사는 연차촉진제를 적용하고 있으니 연말까지 각자 남은 연차를 소진하라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공지라기보다는 지시에 가까운 내용이다. 수당을 지급할 의무가 없으므로 유급휴가가 허망하게 사라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전부 사용해야 하니까.
남은 연차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고민하다 이틀 연속으로 오후 반차를 쓰고 회사 주변 서울을 구경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첫날에는 서촌을 다녀왔다. 어쩌면 앞으로 한 달에 한두 번은 이런 식으로 반차를 쓰며 책방이나 서점을 구경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갈지 한동안 찾다가 대치동에 동네서점이 있는 걸 확인했다. 책을 거의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어쩌다 구매하더라도 인터넷을 이용하니 서점에 직접 가보는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마침 블로그에서 누군가 본인이 원하던 절판 도서를 서점에서 찾았다는 후기를 보자 머리에 불꽃이 튀었다. 온라인에서 정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중고서적을 보며 입맛만 다시곤 했는데 어쩌면 운이 나에게도 찾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리벤벨레프, 주인과 방문객의 공존
점심시간에 맞춰 회사에서 나와 강남역까지 걸었다. 대로와 상권의 골목 할 것 없이 곳곳에 식사를 위해 나온 인파가 가득이다. 어찌어찌 식사를 해결하고는 첫 번째 목적지인 리벤벨레프로 향했다. 대로와 차도에서 조금 들어간 위치이고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식당가로부터도 떨어진 곳이다. 위치부터 첫인상이 느껴졌다. 시간을 따로 내어 찾아오지 않는 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오지 않을 곳이었다.
사람과 차량 그리고 소음의 무리로부터 떨어진 채 위로 향하는 리벤벨레프 건물이 주변의 3층 빌라의 벽돌색과 대비되어 더 눈에 띈다. 건물의 외견만 보면 하얀 외장재에 간판이 전혀 없어 스튜디오 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의 발길로부터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자리한 백색의 건물은 외딴 상아탑 같기도 하다.
1층에는 '쿠지 커피'라고 하는 카페가 있는데 서울 몇 곳에도 지점이 있다. 다른 지점들은 방문해보지 않았지만 검색해 보니 건물에 책방이 있는 곳은 강남역점 뿐인 듯하다. 건물 밖의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의 계단을 따라가도 되고, 카페 안의 건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내려갈 수도 있다. 커피를 즐겨마시지는 않기 때문에 향이 있는 차를 주문하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이동경로의 시선은 자연스레 '사랑이 이긴다'는 글귀 장식을 보게 된다. 다녀올 때까지만 해도 몰랐지만 후에 찾아보니 리벤 벨레프(Lieben belebt)는 괴테가 말한 문장으로 '사랑이 살린다'는 뜻이다. 괴테가 사망하기 2년 전에 남긴 글이라는데 죽음을 앞두고 사랑의 가치를 몸과 정신으로 체득한 뒤 남긴 말일까.
건물 지하로 내려가는 느낌이 다소 묘했는데 낮의 태양이 비추는 지상과 달리, 안으로 들어갈수록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조금씩 그림자가 지고 있었다. 통로의 조명이 발목 높이에 있어서인지 빛이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대신 카타콤이나 동굴을 비추는 은은한 횃불 같다. 한 계단씩 내려갈 때마다 인간과 각종 복잡한 세상사가 가득한 지표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며 땅 밑으로 내려가 모든 것들로부터 고립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책방의 주인이 건물의 여러 층을 두고 지하를 선택한 점은 괴테의 문장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다시 나무 재질로 가득한 공간과 조명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12월이라 크리스마스 캐럴과 성가대 음악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벽면 곳곳에 책방 주인의 추천 도서와 더불어 판매용 책들과 일부 굿즈가 진열되어 있다.
선반의 책을 비추는 조명과 배치 때문인지 보다 보면 박물관이나 전시관에 온 느낌을 준다. 유리창 너머에 있어 눈으로만 봐야 했던 고문서나 문헌을 마치 직접 집어 들어 펼쳐볼 수 있는 박물관에 온 기분. 책을 집고 싶게 만드는 구성이다.
중앙 테이블의 빈자리에 앉아 한 시간 넘게 독서를 했다. 살짝 아쉬운 점이라면 스피커의 음악 소리가 다소 크다는 점, 수도관이 천장에 있어 물 흐르는 소리가 종종 들린다는 점이었다. 전자는 음악 소리에 민감한 나의 기분 탓일 수도 있다.
어디를 가던 어수선하고 소란이 있는 장소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식사나 회식을 위해 음식점을 가더라도 왁자지껄한 곳보다는 차분한 곳을 선호한다. 예전부터 영화관에 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시작 전 광고영상이나 영화의 음성이 귀에 거슬릴 정도로 소리가 높을 때가 있다. 물론 극적인 상황과 감정의 분출을 위해 장엄한 스크린에 걸맞게 좌우에서 퍼지는 음향이 감동을 줄 때도 있지만 귀가 힘든 건 어쩔 수 없다.
책방은 기본적으로 고립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독서라는 경험은 주변 상황과 환경에 분산된 의식과 감각을 하나의 창구로 집중하려는 노력이다. 게임이나 영화 또는 쇼츠 같은 영상 매체들은 경우에 따라 청각이나 후각이 외부에서 유입되지만 독서는 오로지 글자를 읽는 시각에 기반하여 독자의 상상력을 통해 내면으로부터 감각을 창조해야 한다.
보통 이 상상력의 감각은 책에 몰입하면 할수록, 외부로부터의 감각을 차단할수록 더 생생해진다. 따라서 책방은 기본적으로 안정된 고립감의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한동안 읽은 후에는 선반에 전시된 추천 책들을 하나씩 훑어봤다. 책을 읽고 어떻게 생각하고 느꼈는지, 어떤 관련된 경험이 있었는지 책방 주인의 메모가 주변에 붙어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읽으면 좋을지를 담고 있는 문장들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이곳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책에 대한 서평이나 추천사, 사람들의 리뷰를 여기저기서 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전문적인 평가는 그 전문성으로 인해 책만큼이나 펼쳐보기가 쉽지 않다. 추천사나 책의 서문만으로는 이 책이 주는 느낌이 어떨지 가늠하기 어렵다. 온라인 서점은 그 특성상 알고리즘이나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기에 추천 책이나 베스트셀러가 '나에게는' 좋은 책이 아닌 경우도 있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의 사람이, 누군가 먼저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 생각과 마음을 담아 쓴 글이 있었으면 하는 그 공백을 채워주는 것이 책방의 메모가 아닐까.
여러 추천 책 중에서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가 기억에 남았다. 메모를 보니 얼마 전에 읽었던 <남아 있는 나날>과 비슷한 책이 아닐까 싶었다. 좀 더 어른의 감정을 뺀 맛으로. 나도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한다. 더 정확히는 자전거를 타지 않은지 너무 오래되어 과연 몸이 기억할지 의문이다. 초등학생 때 세발자전거를 떼고 두 발 자전거를 학교 운동장에서 며칠 간 아빠와 함께 저녁마다 나가 연습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할 줄 아는 것과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탈 줄 아는데도 친구들과 만날 때면 대부분 두 발로 걸어가거나 아니면 킥보드를 타고 갔다. 킥보드는 한쪽 발을 지지대에 올려놓고 남은 한 발로 지면을 차야 하는데 그 고정감이 좋았다. 페달이 있다지만 두 발을 허공에 놓는 감각을 싫어했던 것 같다. 지상보다는 지하를 좋아하고, 올라가는 감각보다는 내려오는 느낌이 좋았다. 모험보다는 안정을 선호하는 성향은 이미 어려서부터 정해져 있었나 보다.
그 어린 날의 기억에 더하여, 최근 계속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겹쳐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가 유독 눈에 밟혔다. 자전거를 못 탄다고 하여 아이가 아이답지 않은 건 아니니까.
공간의 배치, 책의 진열방식이나 구비된 서적의 종류와 양 그리고 휴식공간과 독서공간의 겹침이나 구분에 따라 책방과 서점마다 담고 있는 가치가 드러난다. 리벤벨레프가 주는 전반적인 분위기는 '소통'이다. 선반의 메모를 통해 주인은 손님에게 책을 매개체로 방문자와 간접적으로 대화를 나눈다.
안쪽 공간에는 자유롭게 적을 수 있는 방명록 노트가 있는데 주인 분이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하나하나 훑어보고 답장을 하거나 따로 갈무리하여 붙여놓는 듯했다. 손님 또한 메모를 통해 리벤벨레프에게 대화를 건넬 수 있다. 이 대화는 다소 불편하다. 오직 손글씨를 통해서만 주고받을 수 있다. 상대가 언제 내용을 읽고 답장을 할지도 알 수 없다. 답변을 하더라도 '나'는 알림을 받을 수 없다. 편지나 우편처럼 나의 주소로 날아오지도 않는다. 마치 핸드폰이 없던 시절, 몇 날 몇 시 몇 분에 어디서 모이자고 약속을 정한 뒤 오롯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던 과거의 소통방식을 다시 겪는 기분이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리벤벨레프의 특징이자 이곳을 다시 오게 만드는 차별점이다. 이 공간을 마련해 준 누군가를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소통하는 특별함이 있다. 즉각적이지 않지만 그렇기에 다음에 왔을 때 상대가 어떤 답장을 적었을지 기대하게 만든다. 그 답장을 보기 위해서라도 시간을 내어 이 지하의 고립된 공간에 다시 들어오고 싶어진다.
즉각적인 수신과 발신, 언제 어디서나 접근 가능한 정보와 콘텐츠가 가득한 시대다. 하지만 세상과의 연결은 꼭 디지털과 스마트한 방향만 있지는 않다. 시간의 비대칭과 높낮이의 격차에서 기다림이 생겨나고, 기다림은 기대를 만들어낸다. 리벤벨레프는 기다림과 기대를 물리적인 공간에 담는 곳이다.
첫 방문 때는 미처 방명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다음에는 흔적을 남기겠다고 다짐한다.
리벤벨레프
강남역 4번 출구에서 6분 거리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로5길 12
은마아파트, 콘크리트의 세월
다음 목표인 대치동 서점으로 버스로 이동한 뒤 인도를 걷던 중 횡단보도 너머 익숙한 글자가 보였다. 은마. 혹시 뉴스로 자주 접하던 그 은마아파트인가 싶어 검색을 했다. 늘 간접적으로 매체나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만 들어봤을 뿐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었던 은마아파트가 내 앞에 있다는 게 신기했다.
홀리듯 발걸음이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은마아파트 안을 돌아다니며 느낀 건 나무들이 참으로 크고 높다는 점이다. 요즘은 세대 안에 심어놓은 나무들도 낙엽 청소나 저층 조망을 가리는 문제 때문에 베어내기도 한다. 전정작업에서 거의 삭발하듯 나무의 기둥만 남기고 가지를 쳐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도시에 이렇게 크고 굵은 나무들이 한복판에 있다는 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의 아파트 고층 높이에 다다를 정도로 높은 나무들이 바로 앞에 줄지어 서있다. 높이만이 아니라 나무 기둥 하나하나의 굵기가 튼실하고 두터웠다. 나무는 이곳의 사람들 그리고 콘크리트와 함께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대치동의 서점들
대치동 주변에는 동네서점이 꽤 있다. 학원과 교육의 장소답게 학습교재와 문제집에 대한 수요가 있기 때문인 듯하다. 출판사나 온라인 대형서점이 운영하는 오프라인 매장이 늘어남과 동시에 학생 시기를 벗어나면 동네서점에 들러야 할 필요가 줄어든다. 어지간한 일반 도서들도 이제는 온라인 주문/배송으로 받을 수 있는 데다 조금만 기다리면 도서관에 신간도 들어오다 보니 책을 보기 위해 서점에 갈 일이 없어졌다.
서점 특유의 내부를 비추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낸 냄새가 가득했다. 코팅된 종이, 프린터 잉크, 갓 인쇄된 따끈한 종이가 뿜어내는 동네서점만의 냄새. 한쪽에는 학생들을 위한 학습지 공간이, 다른 쪽에는 일반인들을 위한 문학과 교양서가 꽂힌 책장이 구분된 공간.
12월이라 학기가 끝나가기 때문인 걸까. 군데군데 비어있는 책장들이 많았다. 아마도 새해에 맞춰 출간되는 책들을 준비하느라 공간을 미리 빼두고 정리하는 것 같았다. 혹시나 노다지가 나올까 싶어 선반과 책장을 놓치지 않고 하나씩 훑으며 지나다녔다.
대형서점은 언제나 정돈된 깔끔함이 가득하다. 모든 진열대에는 각 분야의 신간들이 가득하다. 선반에는 빈자리가 없이 책이 빼곡히 꽂혀있다. 요즘은 책 외에도 굿즈나 앨범, 사무용품 등 다른 상품들도 같이 진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카페도 곁들여져 있다. 사실상 서점이라기보다는 대형마트나 할인매장의 문화코너를 똑 떼어다 놓은 모습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출판사 대형서점이나 온라인 서점들이 운영하는 중고매장은 어디를 가나 방문했을 때 받는 인상이 정형화되어 있다.
원하는 책은 두 서점 모두 없었지만 오랜만에 들른 서점의 냄새와 느낌이 새로워 더 머무르다 나왔다. 마침 예나글방에는 필립 K. 딕 전집이 있었기에 그중 한 권을 구매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매장에서 책을 사들고 나와 상가계단을 오르는 그 과정이 어린 날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동네서점에는 그런 힘이 담겨 있다. 책방이나 독립서점도 주지 못하는,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는 순간.
예나글방
대치역 8번 출구에서 1분 거리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로 151 선경상가 13호
글벗서점
대치역 3번 출구에서 10분 거리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로 516 삼성상가 지하1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