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세상은 평안한가요?

본래무아

by kaei

새해를 시작하며 아침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1회성으로 시작한 온라인 이벤트가 장기 프로젝트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매번의 수련이 저에게 너무 많은 영감을 선물해 주기 때문입니다.

매주 월수금 아침 6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 동안 온라인으로 모여 함께 수련합니다. 10분 정도 관절을 열고, 수리야나마스까라로 40분 정도 움직입니다. 그리고 10분 정도 고요히 앉습니다.

척추를 바르게 세우고 몸을 반듯하게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나서 움직임 뒤의 숨결을 느낍니다.

수련 뒤 숨은 훨씬 깊어지고 고요해진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숨이 깊게 빠져나가면 다시 새로운 숨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옵니다.

생명을 불어넣는 이 숨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한 숨, 한 숨, 따라가다 보면 마음의 흔들림이 서서히 고요함으로 대체됩니다.

둥둥 떠다니던 생각에서도 잠시 멀어지게 되고 내적인 평화로움이 퍼져 나옵니다.

고요함 속에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이 흐를 뿐입니다.


보통 '명상'하면 '생각을 없앤다'거나 '생각을 비운다'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험은 생각이 없어진다기보다 생각과 분리되어 그 생각의 흐름을 바라본다라는 느낌이 더 큽니다.

우리는 대부분 '나'라고 하는 주체를 중심에 세워두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현상들을 '내가 한다'라고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현상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일어났다가 변화하고 사라집니다. 그럼 영원하지 않은 일시적인 현상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나'는 영원할까요? 영원하다는 건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라고 여기는 '나'는 늘 변화합니다. 외적인 형상도, 내적인 흐름도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건 당연한 거야!"라고 여겼던 나의 신념들도 시간이나 환경이 변하면 당연했던 것도 바뀌게 됩니다.

주변에 고정불변의 영원한 것을 찾아보십시오. 저는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제법무아, 일체개공'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풀어보면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 사라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함의가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나'와 관계를 맺으며 일어나는 현상들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경험하는 이 모든 것은 그럼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 혹은 어떤 힘? 아니면 이 모든 것 너머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존하는 무엇, 그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고 어떤 것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요?

그것을 우린 신이라고 하는 걸까요?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며 지금도 존재하는 그 '무엇' 말입니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느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니라." 전도서 3:15


'그것'을 무한하고 모든 것이 이미 다 창조되어 있는 보물창고라고 비유한다면, 일시적으로 생겨난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서 의식하는 만큼을 나의 세상이라고 인식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조건 지어진 '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체를 보지도 알지도 못하 채 '나'의 한계만큼 인식하며 살아가는 부분일 뿐인 거죠. 그렇게 수많은 '나'들이 모여 살고 있는 이 세상,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만큼의 경계를 세상이라고 하고 그 세상은 내가 투영한 의식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것 또한 저의 세계관 안에서의 의미 부여일 뿐이죠. 설명할 길이 없는 '그것'에 대해 한계적인 언어로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굴려가며 가정할 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설명하는 순간 언어의 한계에 갇히게 되니깐요. 그러나 나는 그것의 일부이니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는 내 마음에 달렸습니다. 내가 인식하는 것이 유일무이한 나의 세상이니깐요. 여러분의 세상은 오늘 평안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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