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안 나오네
영어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애증의 대상이죠.
오랜 시간을 쏟아부어 공부를 해도 정작 영어로 말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머릿속이 텅 빈 도화지처럼 되어버립니다. 그동안 유튜브를 보며 열심히 외웠던 “실제 원어민이 사용하는 표현”도, 단어장에서 수없이 봤던 유용한 단어도 도무지 떠오르질 않죠.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안 나온다니, 뭐 어쩔 수 없지요. 내 영어 내공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묵묵히 지식을 쌓아 올리는 수밖에요.
그런데, 과연 영어로 말을 못 하는 이유가 정말로 영어 지식이 부족해서 일까요? 정규교육 과정까지 포함한다면 그래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영어를 공부해 왔을 텐데 말이죠. 참고로, 영어권 국가의 평균적인 다섯 살 아이는 약 2천 개의 단어를 사용할 줄 안다고 합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상당히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도 가능해서, 어른과 소통할 때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참 이상하죠? 알고 있는 단어 개수만 본다면 우리도 2천 개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하는 능력은 왜 그렇게 큰 차이가 날까요? 혹시, 원어민들만 알고 있는 비밀의 공부법이라도 있는 걸까요?
*해당 글은 필자의 주관적인 경험 및 통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학문적 지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영어 단어를 배우는 방식
여러분들은 영어 단어를 어떻게 공부하시나요?
아마 단어장을 달달 외우거나, 미드나 영화를 보는 도중 모르는 표현이 나오면 영한사전에 검색해 보며 단어의 스펠링을 외우고, 모국어로 번역된 사전적 의미를 외우는 경우가 일반적일 겁니다. “Increase (동사) = 증가하다 또는 올리다”와 같은 정보를 머릿속에 욱여넣는 식이죠.
Expand... 확장하다... Extend... 연장하다...
이런 방식의 단어 공부는 짧은 시간 내에 빠르게 수동적 어휘(내가 잘 사용하진 않지만 보거나 들었을 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의 폭을 늘리는 데에 아주 유용합니다. 단어 시험이나 토익 시험과 같이 단순히 최대한 많은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 유리한 상황을 앞두고는 이런 공부법이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여러분도 경험을 통해 느끼셨겠지만, 이런 식으로 암기한 단어들을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면 꼭 사용해야지!’하고 달달 외웠던 단어나 표현들도 막상 그걸 사용하기에 적합한 상황이 오면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오르질 않죠.
그렇다면 언어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 단어를 암기해야 할까요? 그 답은 어린아이들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른과 갓난아기
성인과 아기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상이합니다. 성인은 모국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새 언어를 학습하지만, 아직 모국어조차 익히지 못한 아기들은 언어적 매개체가 아닌 맥락을 통해 언어를 학습할 수밖에 없죠.
말이 좀 어려운 것 같으니, “apple”이라는 영어 단어를 예시로 들어보죠.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성인에게 저 단어를 이해시키고 싶다면, “apple 은 사과다”와 같은 간단한 설명 한 번이면 됩니다. 한 번만에 완벽히 외우는 건 힘들지 몰라도, 단어의 표면적 의미를 아주 빠른 시간 내로 이해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죠.
반면 갓난아기들에겐 저런 식의 설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직 한국어도 할 줄 모르는데, 한국어로 영어 단어를 설명해 준들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죠. 아기들이 “apple”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직/간접적인 경험, 즉 맥락을 매개체로 사용해야 합니다.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르더라도 사과의 모양, 색깔, 식감, 맛, 냄새 등을 인지하고 느끼는 건 할 수 있잖아요? 아기들은 그렇게 사과에 대한 직/간접적인 경험을 먼저 쌓고, 이후에 그것을 “apple”과 차츰차츰 연결 지으며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성인들처럼 모국어를 매개체로 영어를 습득하는 경우, 빠른 시간 내로 여러 지식을 주워담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단점은 그렇게 주워담게 된 지식의 깊이가 표면적인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예시로 "responsibility = 책임, accountability = 책임"라는 설명 자체는 이해하기 굉장히 쉽습니다. 다만 "responsibility"와 "accountability"라는 영단어에 그나마 가장 비슷한 느낌을 주는 한글 단어 중 하나가 "책임"이라서 저렇게 설명하는 것 뿐이지, 결코 저 세 단어가 동의어라는 뜻으로 설명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저 둘을 "책임"이라고 외운 학습자는, 저 두 단어의 느낌에 완전히 익숙해지기 전까지 저들을 "책임"의 동의어로 사용할 확률이 높습니다. "이건 너의 책임이야"라는 문장을 가끔은 "It's your responsibility"로, 또 가끔은 "It's your accountability"로 번역하는 것처럼요. 실제 저 둘의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번갈아가며 쓰는 거죠. 구글에 검색해서 저 두 단어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찾아본다 한들, 설명으로 얻은 지식을 체화시켜서 내가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직관으로 만들어낼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다면 아기들처럼 맥락으로 언어를 습득할 때의 장단점은 무엇일까요? 단점은 상대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지만, 장점은 익혀만 놓으면 훨씬 잘 사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특정 단어가 지닌 사소한 뉘앙스까지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죠. "자르다", "끊다", "가르다", "썰다", "오리다", "베다" 등의 비슷해보이는 단어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굳이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우리 모두 직관적으로 그 차이를 알고 있는 것처럼요.
특정한 단어를 떠올리기 위해선 그 단어에 맞는 일종의 트리거(trigger)가 발동되어야 합니다. 이 트리거는 간단히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지금은 이 단어를 쓰면 되겠군!’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신호인데요. 흥미롭게도 우리가 단어를 어떤 방식으로 습득하느냐에 따라 트리거의 형태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모국어(한국어)를 통해 영어 단어를 습득한 사람들은 외웠던 단어를 떠올리기 위해 주로 언어 트리거에 의존하는 반면, 맥락을 통해 영어 단어를 습득한 이들은 언어 트리거와 맥락 트리거 모두를 활용하여 단어를 떠올릴 수 있죠.
그게 무슨 말이냐구요? 이번에도 설명이 좀 복잡하니, 역시 예시를 통해 파헤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언어, 그리고 맥락
먼저 언어 트리거부터 알아볼까요?
"To require"라는 단어를 "요구하다/필요로 하다" 로 암기한 학습자들은 아마 예문 1.을 이렇게 번역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문 1.
"이 정책이 요구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What this policy requires is as follows."
이 원문을 번역할 땐 "to require"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영한사전에서 "to require"를 "요구하다"로 번역하고 있고, 많은 한국인들이 이를 그대로 외우게 되니까요. 이런 식으로 영어를 접근할 경우, 이미 각 단어에 대한 대응어가 정형화되어 있는 분야에 한해서는 굉장히 편안하고 효율적으로 영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격식 있는 어휘를 사용하는 분야일수록 이런 식의 접근법이 잘 통할 때가 많죠. 아래 예문 2. 는 청와대에 업로드된 대통령 연설문의 실제 번역본을 발췌한 것인데, 이 문장 역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법한 구조로 번역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문 2.
"한국판 뉴딜은 코로나 대유행으로 전 세계가 최악의 경제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탄생했습니다."
"The Korean New Deal was created at a time when the entire world faced the worst of the economic crisis caused by the COVID-19 pandemic."
물론 이런 기계적 번역은 편한 만큼 부작용도 큽니다. 우선, 특정 단어에 정확히 대응하는 언어 트리거가 나오지 않았을 경우 그 단어를 떠올리기가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to require"를 "요구하다"라고 외운 사람은,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한국어 원문에 "요구하다"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으면 "to require"를 쓸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죠.
또한, 예문 3.처럼 똑같은 단어라도 맥락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어색하거나 틀린 해석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문 3.을 기계적으로 번역할 경우엔 "요구한다"가 되어 마치 환자가 능동적으로 케어를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원문이 의미하는 바는 "케어가 요구되는 환자이다"라는 형태에 가깝기 때문이죠.
예문 3.
"The patient requires immediate medical attention."
"이 환자는 즉각적인 의료적 관심을 요구한다." = X
"이 환자는 즉시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 O
그렇다면 맥락 트리거는 어떨까요?
거의 대부분이 대응되는 단어와 1:1로 짝지어져 있는 언어 트리거와는 달리, 맥락 트리거는 특정 단어와 1:1로만 대응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맥락은 한 번에 여러 가지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일례로 우리에게 "apple"이라는 단어의 언어 트리거는 일반적으로 "사과"라는 한국어 단어 하나뿐이지만, 맥락 트리거는 그보다 훨씬 다양합니다. 사과의 냄새, 맛, 모양, 색깔 등 사과를 연상시키는 모든 것이 "apple"의 맥락 트리거로써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죠.
특정 단어에 대한 트리거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실생활에서 해당 단어를 떠올리고 사용하게 될 확률이 더 높아집니다. 또한 발동되더라도 머릿속에서 생각을 거쳐야만 입으로 나오는 언어 트리거와는 달리, 맥락 트리거는 직관적인 감각들(시각, 청각, 후각, 감정 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발동되기만 하면 생각을 거치지도 않고 해당 단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어의 의미가 아닌 느낌을
언어는 평면이 아닌 입체 도형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의미만 알고 있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소한 뉘앙스와 감정까지 파악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이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에 정말로 익숙해지고 싶다면, 영어 단어의 사전적 의미만을 암기하는 단순한 접근법을 뛰어넘어 보다 고차원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 단어가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는지, 어떤 감정을 전달하는지, 어떤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지, 어떤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지 등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단어를 공부하고 나면, 특정 단어가 지닌 느낌에 부합하는 맥락 트리거를 포착했을 때 그 단어를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이용해야 단어의 느낌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추천드리는 것은 어린이 동화입니다. 어린이 동화만큼이나 각 단어와 표현이 전달하는 직관적인 감정 및 이미지 묘사에 진심인 매체가 또 없기 때문이죠.
"Be fit to burst"라는 표현을 예시로 들어볼까요? 네이버 영한사전에선 해당 표현의 의미를 “매우 힘 있게[기운차게]; 몹시, 가슴이 메어 터질 정도로”로 정의하고 있네요. 이것만 봐서는 당장 이 표현을 사용해서 문장을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10분 내로 까먹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이 동화에선 이 표현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아마도 “The dog is fit to burst”라며 밥을 실컷 먹어 치운 뒤 배가 너무나 빵빵해져서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개를 그려 놓을 겁니다. 아니면 “Tommy's backpack was fit to burst”라며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책가방을 메고 있는 남자아이를 그려 놓거나, “The stockings were fit to burst with toys and treats.”라며 선물이 넘치도록 가득 담겨 있는 크리스마스 양말을 그릴지도요.
저 세 가지 예시를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시면 "be fit to burst"라는 표현이 “뭔가로 가득 차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상태”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죠. 그런데 왜 영한사전에선 저 단어의 의미를 “매우 힘 있게[기운차게]…”와 같은 식으로 정의하고 있는 걸까요? 무언가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빵빵하게 부풀어 있는 상태가 어떻게 저런 의미로 이어질 수 있는 거죠? 예문 4.는 해당 영한사전에 있는 실제 예문입니다.
예문 4.
"We sang our song fit to burst at the school competetion."
"교내 경연대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노래를 기운차게 불렀다."
앞서 보여드린 예시에선 해당 표현이 실제 사물이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었지만, 이번 예시에선 보다 더 비유적인 느낌으로 사용되고 있군요. 크고 풍부한 소리를 내기 위해 숨을 잔뜩 들이마셔서 배와 가슴을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부풀린 만화 캐릭터의 모습을 떠올려보세요. 입을 여는 순간 쩌렁쩌렁한 소리가 터져 나오겠죠?
이제는 저 표현을 기운차게라고 번역한 이유가 조금은 짐작이 가는군요. "Be fit to burst"는 단순히 음식이나 책처럼 내용물이 가득 들어차서 빵빵하게 부풀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감정이나 에너지 또는 기운처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가득 찬 상태를 가리킬 때도 쓰이는 것 같네요.
"The elephant is fit to burst out of the room"
이런 식으로 예문들이 묘사하고 있는 이미지와 느낌을 몇 번에 걸쳐 확실히 익히고 나면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물체나 상황을 가리키는 맥락 트리거가 발동될 때마다 이 표현이 머릿속에 떠오를 겁니다. "매우 힘 있게[기운차게]; 몹시, 가슴이 메어 터질 정도로"라는 문장을 기억해 내는 것에 비하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빵빵한 배를 문지르고 있는 개를 떠올리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이기도 하고요.
물론 "be fit to burst"와 같은 표현들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특히나 쉬운 편에 속합니다. 다른 단어들을 외울 때도 이 정도로 생생한 이미지와 느낌을 떠올릴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모든 단어들이 이렇게 친절하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딱딱하고 전문적인 어휘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단어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와 느낌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여러분의 상상력과 동화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동원하여 각 단어와 표현이 지니고 있는 느낌과 이미지를 파악하고, 해당 어휘에 대한 반복적인 노출을 통해 그것을 완전히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게 이뤄지고 나면, 해당 어휘와 관련된 맥락적 트리거가 발동되는 순간 그 어휘가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를 확률이 굉장히 높아지니까요.
앞서 말씀드렸듯, 이런 방식으로 단어를 익히면 시간이 상당히 많이 소요됩니다. 하지만 언어 활용 능력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는 "얼마나 많은 단어를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단어의 느낌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느냐"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도 여전히 말이 안 나온다면, 알고 있는 단어의 개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본적인 단어들의 느낌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맥락 정보를 활용하여 외우고 싶은 단어의 느낌과 이미지를 파악하는 데에 집중해 보세요. 느낌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어휘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