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왜 말을 못할까-2

by 통역사 J

단어가... 중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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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단어를 단 하나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영어로 말을 할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무리 간단하다 한들, 아는 단어가 없다면 그걸 문장으로 옮길 수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영어를 편하게 구사하기 위해서 반드시 모든 영단어를 알아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역시 한글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모든 단어를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적절한 단어가 안 떠오르는 바람에 의사소통에 심각한 문제를 겪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잖아요? 굳이 상황에 딱 맞는 단어가 안 떠오르더라도,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 돌려서라도 원하는 바를 표현해낼 수 있으니까요.


즉, 영어로 말을 잘 하기 위해 영단어 공부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내 영어회화 실력이 내가 암기한 영단어 개수와 꼭 정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다르게 이야기하면, 단어 암기가 유창성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나 그 효용성에 있어서는 일종의 한계점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한계점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미국의 평균적인 성인은 약 4만 개의 영어 단어를 알고 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우리도 일단은 4만 개 정도의 영단어를 암기할 때까지는 주구장창 단어장만 붙들고 있어야 하는 걸까요?







얼마나가 아니라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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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 단어의 개수보다는 단어의 종류가 그러한 한계점을 더 잘 정의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언어는 마치 레고와 같습니다. 레고 블록(단어)을 정해진 규칙(문법)에 따라 조합하여 원하는 작품(문장)을 조립하는 것이죠. 유창성을 레고로 비유하자면, 마음만 먹으면 어떤 형태의 레고 작품이든(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조립해낼 수 있는 능력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턴 영어를 이 레고에 빗대어서 쭉 설명해보겠습니다.


다양한 작품을 조립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1차원적인 접근법은 가능한 한 많은 수의 레고 블록을 여러분들의 레고 박스(어휘)에 확보해두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레고 블록의 수가 많고 그 종류가 천차만별일수록, 그들을 조립할 수 있는 경우의 수도 증가하겠죠. 이론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의 레고 박스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블록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필요한 때에 원하는 부품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물론 오랜 경험을 쌓은 전문가들은 수많은 레고 블록 속에서도 자신들이 원하는 블록을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지만, 이건 초심자들에겐 해당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가끔은 운 좋게 레고 박스에서 원하는 블록을 바로 찾아낼 때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블록이 너무 많다보니 레고 박스를 아무리 헤집어도 원하는 블록을 발견하지 못하고 시간 낭비만 하게 됩니다. 그렇다보니, 그중 상당수는 평생 쓰지도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는 “예쁜 쓰레기”로 전락할 확률이 높죠.


즉, 레고 블록의 활용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초심자의 경우 보유한 레고 블록의 수를 적절히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동시에 조립할 수 있는 작품의 종류를 최대한 다양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레고 블록의 “개수”가 아닌 “종류”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뻔한 형태지만 활용 범위가 넓다


일부 레고 블록(A블록)들은 활용도가 무궁무진 합니다. 사각형 블록, 막대기 블록, 원통 블록과 같이 단순한 모양일수록 활용 빈도가 높죠. 이들은그 어떤 작품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지만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정 상황엔 아주 유용하지만 활용 범위가 좁다


반면 다른 레고 블록(B블록)들은 디테일이 살아있지만 활용도가 굉장히 제한적입니다. 이들은 특정 상황 내에서는 그 어떤 블록보다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나, 그러한 상황을 제외한 나머지의 경우엔 별다른 쓸모가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유한 레고 블록의 개수를 적절히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제한하면서도 최대한 다양한 작품을 조립해내고 싶다면, 당연히 B블록 보다는 A블록을 확보하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단순한 모양의 블록이 많을수록, 디테일은 부족할지언정 각양각색의 작품을 조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영어 학습자들은 A블록보다는 B블록을 확보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A블록은 활용도는 광범휘한데 디테일이 떨어지다보니, 당장 저 녀석을 언제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 구체적인 활용 예시가 잘 떠오르질 않거든요. B블록은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활용도는 상대적으로 낮지만 디테일이 살아있기 때문에, 저 블록을 정확히 어느 상황에 사용할 수 있을지 떠올리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A블록은 심드렁하게 보다가도, B블록을 보는 순간 ‘저건 꼭 필요하겠는데?’라고 느끼는 경우가 드물지 않죠. (악어 블록? 악어를 조립하고 싶을 때 기가 막히게 유용하겠군!)


A블록을 이용한 호랑이 작품; 디테일은 부족하지만, 동일한 블록으로 다른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


B블록으로 만들어진 용 작품; 디테일은 살아있지만, 동일한 블록으로 다른 작품을 만들기가 굉장히 까다롭다


그저 유용해 보인다는 이유로 B블록들을 줍줍하는 버릇은 유창성 향상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부턴 여러분의 레고 박스를 A블록 위주로 채우는 데에 집중해보세요. A블록을 활용하는 빈도수를 훨씬 높이고, B블록은 거기에 살짝 곁들이는 느낌으로만 사용한다고 이해하시면 좋을 겁니다.







첫째도 기본, 둘째도 기본


그렇다면 A블록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A블록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들은 여러분이 영어를 맨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접해왔던 가장 기본적인 단어들입니다. 이제부터는 A블록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A단어, B블록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B단어로 지칭하겠습니다.


*A단어의 예시: things, people, to get, to bring, to think, of, across, in, between, within…


*B단어의 예시: testimony (증언), to subjugate (정복하다, 복종시키다), to concede (인정하다), to suffice (충분하다), albeit (비록~일지라도), lest (~하지 않도록)…


보면 아시겠지만, A단어는 영어를 어느 정도 공부해보신 분들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단어들입니다. 심지어는 영어 공부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접해봤을 법한 단어들이죠. 반면 B단어의 경우, 분명히 유용하고 좋은 단어들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활용도가 굉장히 제한적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굳이 저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더 쉬운 단어들로 우회해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럽게 들리죠.


A단어는 B단어에 비해 종류가 그렇게 많지도 않고 기본적인 의미 자체도 상대적으로 단순하기 때문에 자칫 암기하기 쉬워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활용도는 넓지만 디테일이 떨어진다’라는 특성으로 인해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시시각각으로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암기의 난이도로만 따지자면, 오히려 사용할 수 있는 상황과 가리키는 의미가 굉장히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B단어가 훨씬 더 쉬운 편입니다. A단어의 경우 어떤 단어와 조합되느냐, 어떤 상황에 사용되느냐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바뀌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완벽하게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죠.


때문에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은 학습자라면 반드시 A단어의 숙련도를 늘리는데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들의 가장 표면적인 의미(예: get = 얻다, bring = 가져오다)만 암기하는 수준에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수십, 수백 가지의 예문에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노출시키면서 각기 다른 맥락 속에서 이들의 의미가 어떤 식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를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감을 길러 나가는 쪽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암기'를 하는 게 아니라 '감'을 길러나가야 합니다.


똑같은 단어가 여러 맥락 속에서 다른 의미로 활용되는 상황에 반복해서 노출되다 보면 그 안에 있는 패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이 단어를 왜 이 의미로 사용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생기지만, 그 단어가 포함된 예문을 다양하게 접할수록 ‘아, 이 단어의 느낌이 이렇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사용되는 거구나?’라는 직관이 차차 형성되게 됩니다.


물론 그러한 패턴이 항상 논리적으로 설명 및 이해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일부 단어들의 경우, 사회적/문화적 관습으로 인해 그 단어의 원래 느낌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 경우에는 그냥 ‘아, 이쪽의 문화가 이렇구나’하고 넘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한 건, A단어가 포함된 예문을 폭넓게 접할수록 그들이 지니고 있는 추상적인 느낌에 대한 직관이 생겨나게 되고, 그러한 직관이 두터워질수록 그 단어를 다양한 상황 속에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향상된다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모르는 단어가 아닌,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단어들을 더 깊게 파악하려는 공부를 해보세요. 겉으로는 단순해보이는 단어들이 표면 밑에 숨기고 있는 다양한 모습들을 주의깊게 관찰하며 그들에 대한 느낌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충분히 거치고나면 그들에 대한 '직관'이 자리잡게 되고, 그때서야 비로소 그들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여러분의 영어 말문이 트이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글로써 설명될 수 있는 '논리적인 지식'이 아니라 영단어에 대한 '추상적인 직관'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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