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준비
1988년도에 결혼을 했다.
가난한 집안의 둘째 아들인 남편은 그저 직장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우리의 미래를 생각했다.
아이를 낳아그들을 교육시켜야 할 것이고, 집도 사야하고, 자동차도 사야하고, 시어머니에게 생활비도 보내야 했고, 우리의 노후대책까지 세워야 했다.
850만원 전셋방에서 나는 무수히 많은 계획을 세우고 부수고 또 세웠다.
내 친정부모님은 손톱이 닳도록 일을 해서 그 옛날 시골에서 노후대책을 마련해 놓았고, 오남매가 선물한 반지는 한번도 끼지 않은채 곱게 싸서 보관만 하고 있었다.
내 시어머니는 도시에서 살아서 그런지 손톱이 닳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손가락에는 항상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부자는 아니지만 결코 가난하지 않은 내 부모님과, 가난하지만 가난을 모르는 시어머니는 대조적이었다.
나에게 있어 친정 부모님은 든든한 태산같은 존재였고, 시어머니는 내가 돌봐야 하는 나약한 온실속의 화초같은 존재였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선 은행잔고에 100만원은 항상 두기로 했다.
그때는 카드가 없었기 때문에 월급이 종이봉투에 현금으로 담겨져서 나오던 시절이었다.
모든 현금은 은행에 직접 가서 통장에 넣어둬야 했다.
삶이 궁핍하지 않으려면 통장에 잔고가 어느 정도 있어야 힘이 난다.
요즘과는 달리 갑자기 식구들 중 누군가가 병원에 입원할 수도 있으니 미리 준비해야 한다.
850만원 전셋방은 목소리를 크게 해서도 안되고 수돗물도 전기도 많이 사용해서는 안된다.
주인과 함께 거주하는 일반주택은 발자국 소리도 크게 낼수 없음을 살면서 알았다.
심지어 주인집 아들의 공부를 봐달라는 요구도 들어줬다.
예고없이 불쑥불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주인 아주머니는 하루종일 내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루는 집을 나섰다.
무작정 길을 따라 가다보니 아파트 분양관련 내용이 전봇대에 붙어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은 경북이라는 지방이라 그다지 금액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시내 한복판이 아닌 약간의 외곽지였다.
2300만원의 20평 새 아파트는 5층으로 여러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세금을 빼고 내 퇴직금과 결혼자금으로 준비한 돈을 아껴서 남겨둔 돈이 있었고, 그래도 약간 부족한것은 은행 대출로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남편을 졸라서 그 집으로 이사를 했다.
결혼 1년만이었다.
좋았다.
든든했다.
처음으로 내집을 가졌고 그것이 재산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곧 태어날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더 큰집으로, 그리고 시내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야한다는 계획을 세우기 위해 펜을 잡았다.
그리고 기꺼이 내 친정부모님처럼 살기로 다짐했다.
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새로운 가족을 꾸려 그들의 미래를 설계할 때, 적어도 부모인 나를 배제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