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속물이 아닌 줄 알았다.

오늘만 속물이면 안될까.

by mini

지금으로부터 35년전에 나는 결혼을 했다.

대학을 다닐때 알게 된 남편은 편모슬하에 6남매 막내였다.

초등학교 4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연히 경제적으로 아주 어렵게 살았고 결혼을 할 당시에도 여전히 어려워 보였다.


상견례하는 날, 남편의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매형만 나왔다.

형님과 형수님은 왜 나오지 않았는지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내 부모 앞에서 담배를 빼어물던 예비시어머니 모습에 나는 너무 놀라 그저 아무말도 못하고 내 부모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대화가 오가는 도중 오만불손한 예비시어머니와 예비시누이의 모습에, 나의 엄마는 내 손을 잡아끌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내 옆에서 늙어 죽어라' 이 한마디와 함께.

나도 예비 시댁의 예상치 못한 태도에 놀라긴 했지만, 그들만의 세상을 감히 짐작 할 수 없었기에 내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어리석게도 지금의 남편의 손을 잡았다.


나뭇가지 하나만 잘라서 새로운 땅에 비옥한 거름을 줘 가면서 정성껏 가꾸면 전혀 다른 품종의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는줄 알았다.

사과나무를 잘라서 새로 심어도 사과나무인것을 그때는 몰랐다.


빈손으로 시작한 내 부모는 손톱이 닳도록 일을 하고, 그 덕에 우리는 끼니 걱정이랑 학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새벽동이 트기도 전에 땔감나무를 한짐 해서 지게에 지고 대문을 들어서는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흔한 술과 담배도 하지 않고 그저 우리 오남매와의 대화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찾아내는 아버지는 내 인생의 스승이다.

새벽4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호롱불에 구멍난 양말을 꿰매고, 동이 트면 마당을 쓸고, 텃밭을 가꾸고, 그리고 겨울이면 오남매의 세숫물을 큰솥에다 데우는 어머니는 나의 훌륭한 교과서다.

내 부모한테서 떨어져 나와 35년을 남편과 함께 살았지만, 지금 나는 점점 더 나의 부모와 닮아가고 있다.

싫지 않다.


결혼을 하면서 시어머니는 우리에게 생활비를 요구했다.

1988년도 그 당시 대기업에 다니는 내 남편의 월급은 30만원 정도였는데 10만원을 달라고 했다.

월급의 3분의 1이다.

나는 별 말없이 월급날이면 미리 마련한 봉투에 10만원을 제일 먼저 채워 넣었다.

거의 2주에 한번씩 시댁을 가야했다.

술과 담배가 온 집안을 휘감아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부담스러웠다.

우리가 갈때마다 반쯤 타 들어간 담배를 입에 물고 술에 취해 있는 시어머니는, 별말이 없는 내게 자꾸 새로운 요구사항을 이야기 했다.


내가 나의 부모를 닮아가듯 나의 남편도 그러했다.

술과 담배 그리고 회사생활 여기까지가 남편 인생의 전부다.

육아와 경력단절로 인한 재취업 그리고 살림을 살아야 하는 건 모두 나의 몫이었다.

남편의 역할과 아버지의 역할을 배우지 못한 내 남편은 그저 모든것을 내게 미루었고 잘못된 부분은 나를 탓했다.

설거지를 자주 하는 사람은 그릇을 깨기도 하지만, 설거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은 그릇을 깰 일이 없다.

그릇을 깬 사람이 부족한 걸까, 그릇을 한번도 깨지 않은 사람이 현명한 걸까.

예전 어느 대통령이 한 말이다.


남편이 퇴직을 한지 7년째다.

한 공간에서 그릇을 자주 깨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함께 살기가 어렵다.

내 부모님이 원하는 배우자와 결혼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따뜻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란 사람.

적어도 자녀들에게 마중물이라도 부어줄수 있는 부모 아래 자란 사람.

술과 담배 그리고 거친말투와 거리가 먼 사람.


지금이 아닌, 젊은 시절 내가 지독한 속물이었다면 어땠을까.

뒤늦은 나의 속물이 쓸데없이 보이는 오늘 아침이다.

오늘 하루만 정말 단 하루만 속물로 살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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