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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한 가지 일만

N에게 단순노동이란

by 루이덴


생각이 많을 땐 단순 노동이 좋다고 한다. 단순히 반복되는 작업을 하다 보면 집중에 의해 잡념이 사라진다고. 생각이 너무 많은 요즘 마침 규격봉투를 거의 다 소진하여 재정비할 때가 되었다.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정기적으로 규격봉투를 구매하고 정리하는 게 얼마나 적절한 단순 노동인지, 당장 작업에 착수했다. (사실 몇 주째 미뤄두고 있다가 접어둔 봉투가 이제 2-3장씩 밖에 남지 않아 방 청소 끝나자마자 봉투 들고 앉았다)


공간이 협소해서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터넷에 공유되는 규격봉투 보관 법(싱크대 하부장에 작은 커튼 봉 설치해서 걸어두는)은 나의 상황에 맞지 않아 찾아낸 방법이다. 묶음을 풀어 쫙 펼친 뒤, 3등분으로 세로 접기 후 엇갈려가며 삼각모양으로 접은 뒤 손잡이 부분을 안으로 쏙 넣어주면 끝난다. 촉감 좋은 얇은 비닐을 확- 펼치고 각 잡아 접고, 끝 마무리 후 모양을 잡아주는 단순 작업. 10L 한 묶음과 20L 한 묶음 총 20장을 접어주면 끝난다. 소요시간은 약 20여분. 평소에는 노래도 틀거나 유튜브를 틀어두고 작업해서 세월아 네월아 인데 이 번에는 아무 방해 요소 없이 봉투 접기에만 집중해 금방 끝낼 수 있었다.


다만 봉투를 접는 20분 동안 나는 구청 소속 미화 직원도 되어보았다가 무너지는 빌딩 속 유일한 생존자도 되었다가 잘못 버린 쓰레기로 인해 과태료 폭탄을 맞기도 했다가 봉투 접기의 달인이 되어 방송에도 출연했다. 봉투를 다 접고 나니 기진맥진, 기가 쭉 빠졌다. 생각 좀 덜어내려고 시작한 작업이었는데... 그래도 평소보다 집중해서인지 예쁘게 각 살려 접힌 봉투들을 수납장에 채워두니 알찬 아침을 보낸 기분에 뿌듯해지긴 하더라.


생각을 안 하는 것. 머리를 비우는 것. 그건 어떻게 이뤄낼 수 있는 성취일까. 가만히 멍 때릴 때조차 내 머릿속은 너무 바쁜데... 제일 심란할 때는 역시 아무래도 밤에 잠들기 직전인 것 같다. 그래서 요즘엔 술렁이는 마음을 잠재우고자 구글미니에게 바닷소리를 틀어달라고 하고 있는데, 파도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역시나 또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는 내가 되어버린다. 가끔은 조난객으로, 어쩔 땐 바다의 왕 포세이돈이 되어보기도 하고 바위에 앉아 파도와 수다 떠는 인어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지금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평행세계에 대해 상상하거나 내일 작업해야 할 것들에 대해 고민한다. 제발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집중해 주겠니.


어제의 비가 거짓말인 양 날씨가 정말 화창한 일요일이다. 나의 글이 닿는 사람들 모두 행복한 하루를 보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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