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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에는 흔적만 남는다

베지밀

by 루이덴



정신 차려보니 벚꽃비가 내리고 있어서 후다닥 나갔다 떨어진 꽃들을 주워왔다. 압화 만들기 전에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침을 먹기로 했다.


지인이 사다 준 베이글 중 블루베리로 골라 빵칼로 반을 자르고 미리 예열해 둔 미니 오븐에 굽는다. 버터를 꺼내두고 (상온 버터 즐기려고 버터벨도 샀는데 활용이 안되네 조만간 다시 도전!) 베이글이랑 같이 마셔- 하며 챙겨준 두유를 꺼냈다.


검은콩 볶은 귀리 두유. 가만 바라보다가 문득 학창 시절 어느 날이 떠오른다.


유제품을 안 좋아한다고 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건 우유였던 거 같지만... 아무튼, 편의점에서 흰 우유를 고르는 나를 보며 '우유 좋아해? 신기하네' 하던 그는 베지밀을 집어 들었다. 종이팩에 담긴 거 말고 유리병에 담긴 베지밀. 그전까지 나는 두유나 베지밀을 안 마셔봤는데, 그날 이후로 편의점을 들리게 되면 괜히 베지밀을 사 마시곤 했다. 물론 시간은 흘러 각자의 삶을 살며 자연히 멀어졌고 나는 여전히 우유를 좋아하고 어느 순간 베지밀은 안 사 마시게 되었다.


아마도 좋아했겠지, 베지밀만 마신다고 하던 그 사람을. 그래서 공통점을 찾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베지밀을 볼 때면 그 사람이, 그날의 상황이 그리고 그때의 나와 내 감정이 떠오른다.


문득, 어린 시절 좋아했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나는 이런 방면으로는 영 둔감해서 사실 살면서 누굴 좋아한 경험이 매우 적기 때문에, 그 특정 인물들은 모두 기억한다. 하지만 재밌게도 그들의 얼굴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까? 아마 연락이 되어 약속 잡고 만나는 게 아닌 이상 그저 우연히 길에서 스쳐 지나간다면 전혀 알 수 없을 것 같다. 나 역시도 그렇게 지나간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들도 내 생김새 같은 디테일한 정보는 잊었을지라도 나라는 존재에 대한 어렴풋한 무언가는 남아있겠지. 모쪼록 떠올렸을 때 '그런 애도 있었지'정도라면 좋겠다. 너무 과하지 않은, 어린 시절 추억의 한 장면 정도로만.


지인이 준 검은콩 두유가 쏘아 올린 의식의 흐름. 오랜만에 마신 두유는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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