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잘하고 있어

성장은 고통과 비례한다.

by 예니

입사 환영회 겸 팀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시끌벅적한 양꼬치 집에서 빠르게 1차를 마무리하고 2차로는 조용한 룸 형식의 이자카야를 갔다. 1차와는 달리 왠지 진지한 이야기들이 오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코너라도 열린 듯, 팀원들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마음속 이야기, 남모르게 사무실에서 일어났었던 많은 일들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앞으로 험난해질 내 미래가 살짝 보였다.


이어서 팀장님이 내가 입사하기 전, 당시 면접 상황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이 나로 집중되었다. 괜스레 긴장도 됐지만 나도 내가 어떤 기준으로 합격했는지 궁금했던 지라 겉으로는 담담한 척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스펙이나 경험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광고에 얼마나 열정이 있는지, 자신이 준비해 온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봤어. 매니저님이 그걸 가장 잘해서 뽑았어요.”


어느 정도 예상했던 형식적인 답변이었지만 뭐가 됐든 면접 본 사람들 중에 내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는 건 사실이니까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러면서 팀장님은 내가 이 팀에 합류하고 나서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며 벌써부터 부담 아닌 부담을 주셨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넵, 알겠습니다!’ 라고 당차게 대답하는 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마치 에이스 신입사원이 들어온 것마냥 내 어깨를 툭툭 치시며 ‘기대가 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민망하리만큼 고요한 사무실에서 30분에 한 번씩 내 이름이 불린다. 새로운 일거리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가며 설명을 듣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익히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점심시간 10분 전인 11시 50분부터는 탕비실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드디어 합법적으로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왔다는 뜻이다.


대리님과 단둘이 나가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회사 일은 할만하냐는 물음에 솔직히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답하며 소심한 모습을 보였다. 주로 하는 일은 문서 작업과 자료 조사였기에 하루 종일 ‘전달 드립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만 반복하는 나로서 그런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신입일 때는 큰 실수만 하지 않아도 잘하고 있는 거예요. 매니저님 지금 일 잘한다고 다른 팀에 소문났어요ㅎㅎ.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요.”


대리님의 위로 한마디가 먹고 있던 쌀국수 국물보다 내 속을 더 뜨끈하게 만들었다. 입사 후 처음으로 ‘내가 정말 잘하고 있구나’ 느꼈다.


하지만 방심하긴 일렀다. 제대로 된 업무는 이제 시작이다.




입사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쯤, 팀장님께서는 상대적으로 내가 회사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며 안도하셨다. 그러면서 신입일 때는 많은 일들을 경험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앞으로도 일감은 계속 늘어날 것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대기업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중소기업의 신입사원은 복사기 앞에만 서 있는 존재가 아니다. 빠르게 실무에 투입되어 함께 프로젝트를 실행해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 1개월 차 된 나는 옆자리 과장님보다 일이 많았다. 그 덕에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자료조사나 인플루언서 리스트업, 보고서 작성은 더 이상 가르침이 필요 없을 정도로 능숙했고 내가 작성한 SB(스토리보드)는 항상 꼼꼼해서 보기 좋다는 평을 받았다. 데드라인을 넉넉하게 잡아줘도 수정 작업까지 생각해서 무조건 하루이틀 미리 처리해서 넘겼다. 잘하는 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그랬다.


광고의 핵심인 SNS 운영 업무도 새롭게 시작했다. AE(광고기획자)로서 처음으로 아이디어 회의에 참여할 기회가 왔다. 사실 아이데이션 하나만 보고 광고 기획에 도전했다고 봐도 될 정도로 평소에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던 엉뚱한 말들이 허용되는 그 시간이 좋았다. SNS를 담당하던 과장님과 주임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회의를 진행했다. 소심하게 내민 아이디어도 다들 과감하게 디벨롭 해주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기대하던 그 감정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내 아이디어가 채택되고 SB(스토리보드)까지 작성하여 콘텐츠 디자인 작업까지 들어갔을 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성취감이 든다. 반대로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았거나 열심히 작성한 SB가 반려되었을 때는 그동안 쌓아왔던 자신감이 한 번에 무너지는 듯했다. 이것이 AE의 숙명이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계속해서 새로운 일을 배우며 지내다 보니 어느덧 6월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를 믿고 맡겨 주시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더 이상 다른 업무를 받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부하가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나는 B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도 투입되었다. 기존에 B셀 매니저님이 맡았던 업무를 넘겨받으면서 또다시 인수인계의 늪에 빠져버렸다.


성취감을 느끼기 무섭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업무가 이제는 두려워졌고, B셀 사람들과 일을 시작한 순간을 기점으로 나의 회사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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