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폭우, 태풍 등 자연재해로 인해 생명을 잃은 사람들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돌덩이와 같은 무생물체와는 달리, 감정의 동물인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든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눈에 보이는 육체적 상처(physical trauma)는, 깊이에 따라 시간은 다르겠지만 서서히 치유됩니다. 물론 실명하거나, 청력을 잃거나, 마비되거나, 절단되거나 하는 큰 육체적 상처들은 평생 함께 가야 하는 운명입니다. 몸에 남은 상처는 끊임없이 자기를 파괴하기도 하지만, 잘 극복해내면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상처 없는 조개는 결코 진주를 품을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통해 더 단단해집니다.
하지만 정신적 상처(psychological trauma)는 좀 유별닙니다. 피가 흐르거나 끔찍한 통증이 지속되진 않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며 갈수록 자기 파괴적으로 변해갑니다. 극심한 고통이 계속 반복되면서 자신과 타인의 삶까지 파괴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합니다. 트라우마는 ‘증폭성(增幅性)’을 가지고 있어 방치하면 할수록 점점 증폭됩니다. 결국 본인이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가도 상처는 점점 또렷해지고 통증과 분노는 증폭됩니다. 그야말로 ‘브레이크 없는 분노의 질주’가 계속될 여지가 많습니다.
이런 상태를 방치하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입니다. 문제는 이런 자기 파괴적 행위가 자기에게만 그치지 않고, 상처를 준 사람은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옮겨 간다는 점입니다. 특히 인간, 그중에도 가족으로부터 받은 배신감은 극심한 트라우마로 연결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가 증폭되고, 자신에 대한 학대로 이어집다. 그래서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의 〚신곡(La Divina Commedia, 神曲)〛에서도 지하 1층부터 9층까지의 지옥 중 가장 깊은 곳인 9층이 배신지옥입니다. 가족과 친척을 배반한 죄는 불교의 8열(八熱)지옥 중 하나인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무려 1겁(劫) 동안 지독한 고통을 받도록 활활 타는 불로 다스립니다. 1겁은 거의 무한대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특히 강렬한 트라우마, 감정적인 기억은 우리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됩니다. 해마체(대뇌변연계의 양 쪽 측두엽에 존재하며 기억을 담당)에 1순위로 저장된 기억은 인지(認知)를 왜곡시키고 행동을 변화시킵니다. 상대방의 말을 불신하게 되며,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게 됩니다. 평생이 걸려도 지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고통이 가해자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더욱 가혹하다는 것입니다. 방치하면 그 무간지옥에서 스스로 벗어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집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그 이유가 제각각 다르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결혼하여 부부가 살아가다 보면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길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오십대만 되어도 대부분 죽어 나가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80까지도 함께 삽니다. 그들의 공간에 어찌 꽃길만 있을까요. 많은 사람이 행복을 가장하지만, 제각각 다른 이유로 불행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왜냐면, 그것이 자신이나 가정의 완전한 파괴에서 오는 문제보다는 그나마 낫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파국을 막기 위해 결국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쁜 기억에서 가장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는 용서하고 잊으려는 노력에 앞서, 내 마음을 진심으로 들여다보고 솔직하게 분노하고 미워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필요하다면 단호한 분리와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던가요. 고통의 가시밭길을 혼자 걸어가려고 버티기보다는 훌륭한 조력자를 만나려는 의지와 노력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래야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모두가 삽니다. 게다가 부모는 부모의 삶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간절했던 사랑이 남긴 씨앗(자식)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부모의 의무입니다. 부모가 남긴 파국적 결말은, 자녀를 죽을 때까지 고통 속에 살게 할 수도 있습니다. 2020년 상반기 화제작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도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극중에서 “끊임없이 남편을 의심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안다.” 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자기 자식을 죽인 살인범이 사형수가 되어 수감(收監)되어도, 그 살인범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고통받은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가 형벌보다도 더한 잔인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용서’라는 두 글자였습니다. 자신보다 더 귀한 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끝내 용서함으로써 그도 마침내 평화를 얻었습니다. 이런 결말은, 나를 용서라는 더 큰 길로 이끈 조력자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조력자는 깊은 신앙심이 될 수도 있고, 전문적인 약물과 심리치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때 상담과 치료를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상처받은 영혼들입니다. 전부를 포기하고 막다른 길을 기어이 고집하기보다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그래도 의미있게 살아보기 위해 한 번은 더 발버둥 쳐볼 의무가 있습니다. 증오가 자기혐오로 증폭되기 전에 조력자를 찾아갑시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듯, 행복과 불행도 또한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포기는 약자의 도피행위일 뿐입니다. 힘을 내 다시 일어서보세요. 그것만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희망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