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옆대나무숲>에 어느 의원실 보좌관의 갑질로 고통받은 이의, 절규와도 같은 호소의 글이 올라왔었습니다. 피해자 일방의 주장이어서 적힌 내용의 전부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웠지만, 쓴 글의 절반만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피해자가 겪은 충격과 심적 고통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입법행위를 하고, 그들을 보살피고 지원하는 정책을 고민하고 논의하는 국회에서조차 아직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면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비극입니다.
우리가 흔히 ‘갑질’이라고 표현하지만, 직장에서의 언어적 괴롭힘은 그 자체로 용납하기 어려운 폭행입니다. 물리력을 동원한 행위만 폭력이 아닙니다. 모멸적 언어와 업신여기는 눈빛 따위를 이용한 가해행위로 인한 고통과 상처의 깊이는 참으로 크고 깊습니다. 신체에 대한 물리적 폭력의 후유증을 능가하며, 인간의 영혼에 심각한 위해를 가하는 린치(Lynch) 행위입니다. 몸에 든 멍은 이내 사라지지만, 마음에 든 멍은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죄와 반성이 없다면 오래도록 깊게 남습니다. 더러는 그 상처와 고통을 견디다 못한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합니다. 어떠한 유형의 폭력도 있어서는 안되고 용납해서도 안될 범죄행위입니다.
신체적 갑질이건, 심리적 갑질이건, 가해자 역시 피해자였던 경우가 많습니다. 시어머니에게 모진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나중에 자기 며느리에게 그보다 더한 시집살이를 시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상처를 입은 피해자가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주는 가해자로 변하는 일은 흔하게 발견됩니다. 어느 의원실 보좌관이 심한 갑질을 일상적으로 일삼는다면, 해당 국회의원의 행실도 의심해보는 것은 별로 이상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사나우면 키우는 개도 사납다는 말도 있듯, 보좌직원들에게 폭언을 일삼는 국회의원이 있다면, 그 의원실 보좌진까지 그렇게 변할 공산이 큽니다. 그렇게 폭력은 대물림되고, 되풀이됩니다.
같은 의원실 직원에게 가해지는 보좌관의 폭력적 언행이 일상화되면, 그로부터 고통받는 직원들이 대관업무를 하는 외부인이나, 공직자들에게 함부로 하는 방식으로 전이되기도 합니다. 의원실을 찾은 방문객을 복도에 오래도록 세워두거나, 모멸적 언어를 구사하는 보좌진들을 자주 봤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냄새를 풍깁니다. 좋은 향기는 멀리 전파되지 않지만, 악취는 저절로 멀리까지 갑니다. 지우기도 힘듦니다. 쉬쉬하며 감춰주는 어설픈 의리는 이런 폭력적 행위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나쁜 토양이 됩니다. 독버섯이 자라는 토양을 밝은 태양 아래 드러내도록 하는 것, 그것이 보다 건강한 직장문화를 만드는 기본입니다.
직장내 괴롭힘, 따돌림, 폭언 따위를 근절하려면 음지의 ‘대나무숲 속’이 아니라, ‘양지의 심판대’가 필요합니다. 신고자는 철저히 보호하되, 가해자가 다시는 동일 직장에 근무하지 못하도록 아주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유사한 사건이 3번 발생하면 관리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은 해당 국회의원까지 그 직을 박탈하는 삼진아웃제를 도입하는 등 철저한 조사와 책임추궁이 제도적으로 마련되어야 핮니다. 그런 신고체계와 조사 및 처벌, 퇴출이 자연스럽고 일상적으로 이뤄지도록 하는 구조가 상식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방적 차원의 교육도 현실성 있게 이뤄져야 합니다. 국회를 비롯한 대부분의 직장문화가 여전히 폭력적 폐습을 극복하지 못한 이유는, 가해자의 행위를 감춰주고 눈감아주는 ‘가해자 동조현상’이 한몫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KarlAdolfEichmann)의 재판 과정을 담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Holocaust)이 광신도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아닌,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고발합니다.
보좌관이 동료 직원에게 그런 폭력적 언행을 했을 때 그들 곁에는 아무도 없었을까요? 곁에 누군가 있었다면 그는 왜 그런 행위를 제지하지 않았을까요? 상사의 위세가 두려워 눈을 감고 입을 닫는 방관자 역시 가해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만 합니다. 누군가 불을 지르면 함께 끄고, 누군가 물에 빠지면 함께 건져내야 합니다. 그게 제대로 된 직장의 풍경이고, 소위 ‘동료(同僚)’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직장인들이 가져야 할 공적 의무입니다. 직장의 성과는 강압적 지시에 의해서는 달성되지 않고, 직장의 평화와 안정 또한 폭력적 언행에 대한 침묵으로는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