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부여한 무거운 등짐 진 나귀

by 권태윤

국회에서는 ‘돈 더 달라’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사시사철 이어집니다. 그런데 ‘내가 먼저 세금 더 내겠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나는 돈 덜 내고, 남이 낸 돈은 더 많이 받겠다’는 심보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입니다. 목사나 스님들도 연말정산 환급받으면 봄꽃처럼 얼굴이 활짝 핍니다. 정치인, 자치단체장은 이런 인간의 본성을 누구보다도 잘 꿰뚫습니다. ‘무상(無償)’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현금 퍼붓기로 한번 재미를 보면 쉽게 끊질 못합니다.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도 있고, 뿌린 만큼 거두는 곳이 선거판이라는 우스개도 있습니다. 오고 가는 탐욕의 거래입니다.


현직대통령은 그동안 현금 뿌리기를 자양분으로 지금의 위치에까지 온 ‘입지전(입紙錢)’적 인물입니다. 재정자립도가 고작 10.1%에 불과한 전북의 김제시장은 몇년전 추석에 예산 810억 원으로 시민 8만1천여 명 모두에게 1인당 100만 원씩 ‘일상회복지원금’을 뿌렸습니다. 그해 김제시(본예산 기준) 예산 8,624억 원 중 지방세 등 자체 수입은 869억 원에 불과해 재정자립도 순위가 전국 177위였습니다. 이런 몰염치하고 대책 없는 매표행위가 일상이 된 나라가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요. 질병이 전염되듯, ‘무상(無償)’도 중독성과 전염성이 강합니다.


오죽하면 ‘나랏돈은 먼저 보는 놈이 임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너도나도 돈 달라, 돈 더 내놓으라고 악다구니를 씁니다. 2년 전 국회 국방위 법안소위에는 월남참전전우회가 야당 의원실을 통해 ‘청탁’한 법안이 상정됐습니다. 월남전에 참전했지만 ‘전투근무수당을 못 받았으니 내놓으라’는 내용의 법안입니다.


하지만 기존 법령해석과 판결례 등에서 월남전 참전군인은 전투근무수당 지급대상이 아니라고 결정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정부가 「해외파견군인의 특수근무수당 지급 규정」에 따라 수당을 정상적으로 지급하였다는 것은, 당시 김성은 국방장관과 비치 주한미군사령관 간 서신(브라운 각서), 「해외파견군인의 특수근무수당 지급 규정」(대통령령), 美 의회의 월남전 관련 청문록(사이밍턴 청문록, 1970년)에 기록된 수당자료, 참전용사들의 수당 수첩에 기록된 금액에서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월남전 참전군인들은 당시로서는 일반인들은 쉽게 만져보지도 못할 큰 금액을 수당으로 받았고, 현재까지 참전수당도 별도로 받고 있습니다. 이날 법안소위에서 결론을 내지 않자, 월남참전전우회 회원들이 자정에 이르도록 소위위원에게 문자폭탄을 날렸다고 합니다. 가히 목불인견(目不忍見)이 따로 없습니다. 어디 이들 뿐일까요.


2023년 기준 설립된 보훈단체만 17개에 이릅니다. 회원 수는 1,161만 9,357명입니다. 대한민국 인구의 1/5입니다. 이중 보훈 대상으로 등록된 인원은 2022년말기준 83만 4,126명(본인 56만 9,189명, 유족 26만 4,937명)입니다. 이들 모두에게 2023년기준 적게는 39만1천 원에서 많게는 684만6천 원씩 매달 보상금 또는 수당으로 지급됩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게 국가가 적절한 보상을 해줘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근거나 자료도 없는 보상금이나 수당을 더 내놓으라며 청부입법으로 국회의원들을 겁박하는 행위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보훈(報勳)대상이고, 자신들이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면서 그것을 현재 세대에게 돈으로 계산해달라는 행위를 지켜보는 심정은 우울합니다. 이들의 논리라면, “한 달에 봉급 몇백 원, 몇천 원을 받고 3년 이상 군 복무를 했으니 현재 우리 병사들 급여기준으로 과거에 적게 받은 봉급을 계산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요.


우리 조·부모 세대들은 그야말로 참혹한 시절을 겪어 왔습니다. 일제에 수시로 생목숨을 도륙당하기도 했고, 이역만리 탄광에 끌려가 강제노역으로 죽을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강토에서 동족상잔의 참극을 겪기도 했고, 지독한 가난으로 인한 굶주림과 군사독재의 엄혹한 세월을 견뎌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오직 자식과 손자 세대의 안녕과 행복한 미래를 위해 참고 견디며 희생해 왔습니다. 그분들의 고통을 알기 때문에 예우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명예와 존경은 필요 없고 돈으로 달라면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예산은 재물이 계속 나오는 화수분이 아니다. 희망을 잃은 청년세대와, 폭증하는 노인인구는 대한민국의 암울한 미래를 보여줍니다. 미래세대는 혼자서 한 명의 노인을 부양해야만 합니다. 지금부터 국가 재정을 튼튼히 만들어 위기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하고, 국민연금, 건강보험, 군인연금, 공무원연금, 사학연금도 모두 개혁해 미래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세계 최고의 저출산과 고령화 시대의 고통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대가 부여한 무거운 등짐을 진 나귀 신세입니다. 각자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노고에 대해 현세대에게 빚을 갚으라는 요구는 온당하지도 명예롭지도 않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몰염치한 모습으로 변했나요. 공짜, 퍼주기가 불러온 파괴적 욕망의 흔적이 이토록 너저분합니다. 이래선 안됩니다. 모든 세대의 국민이 짊어졌던 등짐의 무게에 담긴 피와 땀을 더 이상 모욕하지 말아 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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