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번 다녀온 녀석이 아이들의 우상이 되고, 그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마른침을 삼키며 귀를 기울였던 어릴 적, 내가 살던 마을은 그야말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두메산골이었습니다. 학교는 20여리나 떨어진 읍내에 있었는데, 읍내 역시 여느 지방 읍내와 비교하더라도 규모면에서나 시설 면에서 매우 초라한 그런 곳이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때까지 단 한번도 읍내를 벗어나본 적이 없었던 나의 ‘갇힌’ 눈에 비친 세상은 고만고만한 산들과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전부였습니다. 그나마 부모님을 따라 도회지를 다녀오는 녀석들의 입에서 다른 세상의 모습을 전해 듣기는 하였지만, 단 한번도 직접 보지 못한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인가로 기억됩니다. 한 친구가 “라디오에서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들었는데 참 좋은 곳 같다”며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늘 산 너머 세상에 대해 항상 동경하던 나는 그것이 얼마나 웃기는 생각인지 상상도 못한 채 선뜻 동의했습니다. 역시 읍네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시골촌놈들 몇 명과 함께 바다로 가서 배를 타기로 하고 자전거를 타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두어 시간 정도나 갔을까. 이내 배도 고프고 두렵기도 한 우리는, 혹시 산 정상에 올라보면 배가 있는 항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을지 모른다며 근처의 제일 높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세 시간이 넘도록 끙끙대며 오른 거기에 마침내 새로운 세상이 있었습니다. 거대한 건물이나 요란한 복장을 한 사람들은 볼 수 없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산들의 장엄한 모습과 까마득히 펼쳐진 생전 처음 보는 넓디넓은 산 너머 광경에 큰 충격을 받은 우리들은 한참동안이나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고, 누구 할 것 없이 구름 사이로 펼쳐진 광경에 넋이 반쯤 나갔습니다.
그날 미국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부터 가슴속에는 온통 산 정상에서 보았던 그 끝없는 세상이 가득했습니다.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어 병이 다 날 지경이었습니다. 며칠을 몸부림치다, 그 광경이 눈에 아른거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부모님 몰래 소형 라디오와 큰형의 텐트를 몰래 훔쳐 가지고 마을에서 제일 높은 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시골이다 보니 친구 집에서 자고 오겠거니 생각했는지 아무도 찾지도 않았습니다. 밤중엔 온갖 짐승들의 울부짖거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마음 졸이기는 했지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람의 말소리를 위안삼아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서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에 두려움도 잊고 하루를 꼬박 흥분된 상태에서 머물다 돌아왔습니다. 그 후로도 틈만 나면 산에 올라 산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는 재미에 한동안 푹 빠져 지냈음은 물론입니다.
지구촌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우리는 여전히 두메산골에서만 살아온 소년마냥 좁은 공간 속에서 마음의 문마저 닫은 상태에서 소란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제프리 카첸버그(Jeffrey Katzenberg) 감독의 디지털 애니메이션 '개미‘(Antz)에서 처럼 치열한 전쟁과 음모, 암투가 난무하는 좁디좁은 개미세계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우리의 언론들이 나라사람의 진정한 마음을 읽지 못하고 ‘사오정’ 행세를 한다는 소릴 많이 합니다. 과거의 숱한 얼룩을 씻어내고 진정한 참회를 통해 바른 언론이 되려고 애쓰기 보단 오히려 곡필을 일삼으며 독자를 현혹시키고, 권력을 비판하기보다 스스로 권력이 되려고 안달합니다. 아니, 이미 권력이 되어 오만한 힘을 함부로 행사하는 재미에 푸욱 빠져 있고, 이제 그 권력에 약간의 손상이라도 입을까 싶어 안달하다 못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언론이 이렇게 된 데는 품성과 자질보다는 성적위주로 기자인력을 충원하거나, 경영상 독점적 소유구조의 문제 따위의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출입기자제도도 큰 원인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자들의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약간의 장점도 있겠지만, 세상을 향해 뛰어야 할 기자를 출입처라는 제한된 공간에 고립시켜 마침내 ‘울타리 기사’가 양산되도록 만드는 단점이 훨씬 많았던 출입기자단 제도를 바꾼 일은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해봅니다.
울타리 안에 고립된 사람은, 마치 우리 안에서 사육되는 짐승들처럼 주인이 던져주는 먹이 맛에 길들여져 야성과 사냥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취재’ 보다 ‘보도자료’에 의존하는 기자는 마침내 기자로서의 본능마저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게다가 취재를 하더라도 만나는 취재원들이 다들 고만고만하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또한 거짓과 가공이 많다보니 사람들의 마음과 귀를 시원하게 해줄 진짜기사가 나오길 기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짐승들이 살 곳은 야생이듯, 기자들을 있을 곳은 현장입니다. 미국內 애완견들의 90%이상이 치아관련 질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던져주는 가공된 먹이에 길든 짐승은 사냥능력을 잃어버립니다. 주어지는 보도 자료는 기자의 취재능력을 죽이고, 결국엔 기자의 정신마저 망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 그들을 울타리 밖으로 풀어주어 진짜 살아있는 기사를 쓸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싸늘한 냉소와 비웃음을 자아내는 삼류 저질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방송사의 일부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오히려 시청률 운운하며 자신을 옹호하기에 바쁩니다. 여의도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곳이 마치 세상의 전부인양 착각한 채 객관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시청률이란 방패막이를 들고 언제까지 남의 나라 프로그램 베끼기와 한심한 오락 프로그램과 삼류 드라마를 쏟아낼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들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이제 시청자가 나서서 ‘여의도’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들을 해방시켜주어야 합니다.
국회의사당과, 국회의원회관이란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는 국회의원이나 의원 보좌진들, 관공서라는 울타리에만 틀어박혀 있는 책상머리 공무원들, 청와대라는 견고한 울타리 안에 버티고 선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 좌우니 보수 진보니 하는 고리타분한 이념의 울타리 안에서 상대에게 상처 입히기에만 골몰하는 여야 정치권과 언론들,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호시탐탐 더 견고한 울타리로만 이동해 가려고 눈치를 보는 교수들, 한미 동맹관계 라는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 주권국가의 군대가 되길 포기하려는 국방부……. 이들 모두가 울타리 밖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세상은,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속도와 규모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울타리 밖으로 달려 나가 본래 가졌던 ‘야성(野性)’을 되찾아야 할 시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