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오래 머문 어린 날의 바람
그런 날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고,
마음이 괜스레 가라앉는 날,
햇살은 따스하고, 구름도 화창한데 내 마음만 허전한 느낌이 드는 날.
그런 날엔 평소보다 더 따뜻한 차가 필요하다.
찻잔을 두 손으로 잡으면
‘앗 뜨거워.’라고 놀랄 만큼.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딱 적당한 온도가 내 손안에 감겨온다.
두 손이 절대 놓고 싶지 않을 만큼의 온도.
그런 마음이 들면 내내 들어왔던 허전함은 잠시 도망가고 편안한 내가 찾아온다.
차 한잔에 기분도, 몸도 여유가 생기고 드디어 창밖의 풍경도 자연스레 눈에
담겨온다.
나를 위로해 주는 차 한잔.
나를 설레게 하는 차 한잔.
아침을 행복하게 열어주는 문이다.
이런 한적함에 잠시 묻힐 때면, 나를 붙들고 있는 온기만큼 따뜻한 기억 하나가 스스럼없이 떠 오른다.
중학생이 된 언니에게 아버지께서 선물로 사 오신 초록색 헤드폰이 그것이다.
두 살 터울이었던 나의 눈에도 라디오가 나오는 그 헤드폰은 너무나 멋져 보였다.
그때까지 내 선물이라고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면, 언니의 선물이 너무나 부러워서 그랬을 것이다.
결국 나는 아버지에게 투정과 시샘 어린 한 마디를 하고 말았다.
“나도 이런 거 좋아하는데. 나도 사줘.”
언니에게 웃으면서 헤드폰을 머리에 씌워 주던 아버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했다.
“그런 건 말 안 해도, 때 되면 내가 알아서 다 사준다.”
“치이, 말 안 하는데 아빠가 어찌 알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엄한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대꾸를 했다.
그날 밤, 선물 받은 언니가 부럽고 아버지의 무서운 분위기에 속상해 어린 마음에도 꽤나 잠을 설쳤던 것 같다.
초록색 헤드폰은 그 뒤 틈틈이 내 머리 위에서도 노래했고, 결국에는 언니의
친한 친구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언니와 같은 중학생이 된 나는, 새 신발과 새 책가방에 들떠
초록색 헤드폰은 까맣게 잊혀지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 뒤 어른이 되어 어린이날이나, 부모님의 손을 잡고 선물 가게에 들어와
양손 가득 품에 안고 사 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을 보면 꼭 그때가 생각났다.
내가 처음으로 욕심내어 보았던 선물.
아버지로부터 꼭 받고 싶었던 첫 선물.
그건 아마 초록색 헤드폰이 아니어도 좋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나에게 사 준 어떤 것이여도 나는 좋았을 것이다.
이제는 결코 아버지에게서 받을 수 없는 선물이 되었지만, 지금까지 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면, 이것도 나에게 준 큰 선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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