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글보글 삶이 맛있게 익어가는 시간

by 해운대 줌마

여행지에서는 가끔씩 내가 나 아니어도 좋다.


육십 넘은 김치 냄새 풍기는 아줌마가

센티멘탈한 소녀 감성으로 변신해도


낭만과는 사촌의 팔촌쯤 되는 아저씨가

멜로드라마 남자 주인공처럼 변신한대도

신박하고 아름다운 반란이다.



휴양림에 가면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느긋하고 평화롭게 잠에서 깨어난다.


퇴직 후 클래식 공부에 홈빡 빠져 있는

남편이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들려준다.


‘저 남자 저렇게 낭만적이지 않았는데?

숲(좋은 공간)이 사람을 다 바꿔 놓네!’


"당신 오늘 좀 멋진데! 선곡 짱! 센스 짱!"

목소리에 오글오글 애교를 잔뜩 실어 엄지척을 날린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의 입꼬리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는지 살짝 올라가며 엷은 미소를 띤다.


'행복이 뭐 별 건가 싶다. 요런 게 행복이지!' 히히


숲 속 아침 산책은 우리 부부의 최애 취미다.

안개비가 자욱하게 깔린 아침 숲길

태초의 시작처럼 조용하고 평온하며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 새로움! 이 오롯함! 이 청량한 숲길을

레드카펫을 밟은 여배우처럼

나무와 풀들에게 다정한 눈인사를 건네며

최대한 우아하게 걸어본다.


불쑥 재밌는 아이디어 하나가

알밤처럼 통하고

머릿속에 떨어진다.


'리마인드 웨딩! 이 분위기 놓치고 싶지 않다.'

세상 어느 고급 예식장보다 더 근사한 장소를.

나이 들어가니 추억을 먹고 산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든다.


뼛속 깊이 유교사상 쩌는 남자

말끝마다 나잇값 따지는 남편에게


미친 척 용기를 내본다! 여행의 힘인가?

"여보오, 우리 숲 속의 리마인드 웨딩 어때요? "


남편의 반응을 관찰하듯 살핀다.

이 남자, '응'이라고도 '노'라고도 안 한다.

이 정도면 반응이면 '긍정이다'는 뜻이다. 긍정! 히힛

나름대로 결론을 땅땅땅! 고다 고!


"나처럼 해봐요!"

"나 서 00 은 류 00을 죽을 때까지 보물처럼 아끼며 살겠습니다."

"당신도 나처럼 해봐요. 어서요."

남편도 못 이기는 척 따라 준다.

"나 류 00도서 00을 죽을 때까지 보물처럼 아끼며 살겠습니다."


내 남편이 젤리처럼 말랑말랑해졌다.

더 많이 다정다정해진다.

행복 한 스푼이 더 추가되는 느낌이다.


"딴따단! 딴따단!"

웨딩마치 구음을 내며 팔짱을 쓰윽 끼자,

남편은 장난스레 내 팔을 뿌리치며


"오늘은 여기까지! 다 늙어가며 주책 고만 부립시닷!"

하하하 하하하

남편이 웃는다.

헤헤헤 헤헤헤

나도 그이 따라 웃는다.


남편의 얼굴이 말해준다.

싫다기보다는 쑥스러운 거라고...


초록초록 한 수풀 속에서 풀꽃 하나 부케 삼아

얼렁뚱땅 맹세를 했다.

잡티와 주름진 얼굴에 세수까지 안 한 얼굴로

부스스한 머리에 운동복 차림으로

아차! 눈곱은 안 붙어있었나? 히히


그래서 더 유쾌하고 재미나다.

꼬꼬 할미할배가 되면 이 순간 또한

추억의 곶감이 되겠지?


“ 아무튼! 우리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삽시닷! ”

“ 이 약속은 무조건으로 절대적으로다가 지켜야 해요. 00 씨! ”


요즘 남편과 뒤늦게 즐겨보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황용식 버전으로 너스레를 떨어본다.


내 밋밋한 삶이 보글보글 맛있어지는 시간이다.

방전된 삶의 배터리가 빵빵하게 충전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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