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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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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경 May 12. 2020

그냥 일기: 이제 우리는 행복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불안하거나 덜 불안하거나


이제 행복이라는 말은 사치로 들린다. 사람들은, 우리들은 한동안의 행복 열풍이 휩쓸고 간 자리를 웰빙으로 대신하더니, 요즘은 힐링으로 대체된 듯이 보인다. 더 이상 행복이라는 단어는, 어떠한 암묵적인 금기처럼, 혹은 그러한 생각조차 불순하다는 것처럼 많이 논의되지 않는다. 대신 행복이라는 단어 자리에 새롭게 자리를 잡은 힐링은 회복된다는 뜻이고, 회복이란 어딘가 망가져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불안장애를 진단 받은지 1년 반 정도가 지났다. 진단을 기준으로 한 시점이기에 아마 내가 때때로, 혹은 대체로 주체할 수 없이 불안한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것이다. 처음 심각성을 느낀 건 시험을 준비하면서 합격과 불합격의 경계, 그리고 그 이후의 미래에 대한 막연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사는 나에게 다른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고, 이후 병원을 옮기고 나서 상담을 받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아 상담을 진행했다. 상담은 금전적, 시간적인 이유를 비롯해 내 거주지가 일정치 않은 문제로 한차례밖에 진행하지 못했다.


 상담에서 나는 내가 ‘잊고 있다’고 생각했던, 혹은 ‘잊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감정들과 조우했다. 그 감정들은 나의 과거로부터 나온 것이었고, 사실 나는 어떤 장면들만을 기억하지 그때의 나의 감정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상담사는 나의 ‘묻어둔’ 감정을 꺼내 들여다볼 것을 권했다.

 

 나는 어른이란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밥을 먹다가 문득 알게 된 엄마의 과거를 듣고, “그렇게 오래 된 일인데 아직도 그래?”라는 말을 내뱉을 정도로 냉정한 사고방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 역시 그러지 못한 사람이었다. 나는 내 스스로가 과거에 붙들려 있다는 게, 혹은 과거로 회귀하여 그 감정에 갇혀버린다는 게 수치스러웠고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상담사는 내게 말했다. 감정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그 말은 너무 흔해서,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딘가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감정을 들여다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굉장한 에너지가 소비되는 일이고, 나의 일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기에 나는 깊이 생각하는 대신 청소를 하거나 빨래를 하고, 운동을 하고, 책을 읽거나 이렇게 아무 글이나 쓰거나 하여튼 무언가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루를 보낸다. 나는 지칠 때까지 그러한 일에 에너지를 쓰거나 혹은 일이 없는 날에는 그냥 잠을 잔다.


 엄마는 언젠가 왜 자신이 집에 오면 TV만 보는지 아냐고 울분에 차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혼나고 있었고, 엄마는 화가 많이 나 있었다. TV를 보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오래 내 기억에 남아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문득 떠오르고는 한다.


 그리고 이십 대의 후반에 들어서, 이제야 나는 공감한다. 생각하는 것은 들여다보는 일이고, 들여다보는 일은 힘이 든다. 차라리 잊어버리거나 무언가에- TV든 유튜브든 넷플릭스든 접하기 쉽고 저렴하거나 무료의 콘텐츠로 덮어씌우면 되는 일이다. 


 나는 잠들기 전이나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체크리스트로 만들고 날이 밝으면 그걸 하나씩 지워나간다. 그 편이 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고민조차 내게는 큰 불안이 되어서, 그걸 방지하고자 차라리 통제할 수 있게 시간을 쪼개버린다. 그리고 일과를 마친 늦은 저녁이면 게임 스트리밍 같은 것을 하릴없이 보다가 잠에 든다. 


 이러한 경험은 내가 이곳을 할애해서 글을 쓰지 않아도 될만큼 흔한 일상일 것이다. 그 매체가 게임 스트리밍이 아닐 뿐, 우리는 정말 많은 것에 중독되어 있다. 정말 많은 매체, 정말 많은 이야기에. 우리는 이렇게 보내는 시간을 힐링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이러한 힐링은 어쩌면 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태인- 무언가의 중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제 이러한 중독은 더 많고 흔하고 저렴하게 우리 곁에 존재한다. 차라리 나의 보잘 것 없고 정신병으로 하루하루를 일으켜 세워야 하는 삶에 비하면, 인터넷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멋진’ 사람들이나 이야기에 내 하루를 맡겨버리는 게 효율적이고 즐거워 보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올 3월과 4월에 처음으로 질병으로 인한 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으며, 거의 하루 종일 누워 잠만 자면서, 수많은 꿈이 현실과 분간이 되지 않아 내가 마치 꿈에서 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이 지루한 시간들을 견디며 사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삶이 들여다보기 힘든 것이어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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