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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경 Jul 22. 2020

그냥 일기: 피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면

2020-07-21 화요일


내일은 새로운 병원에서 초진을 받는다. 많은 정신과가 그러하듯 3주 정도의 기다림이 있었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약이 필요해 원래 다니던 병원을 방문했었다. 그 병원을 좋아했던 이유는 예약제가 아니라는 점과 직원분들이 무척 친절하다는 것, 상담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좋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직접 대면하는 의사와는 묘하게 불편한 지점이 있어 옮겨야겠다 싶기는 했다.


나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준비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의사는 왜 이런 것을 이야기하느냐는 표정으로, 정확히는 내가 한 이야기가 맥락에 맞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내 말을 정돈시켰다. 그래요. 이 주 분의 약을 처방해줄게요. 나는 맥이 빠졌다. 맥이 빠지고 허탈하기도 하고 분노가 차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처음 다녔던 정신과 의사는 내게 윽박을 지르기도 했다. 그 이야기는 맥락에 맞지 않아요. 뜬금없어요. 문제에 대한 해답을 푸는 사람처럼, 그 해답에 맞지 않는 정보를 들이밀자 의사들은 화를 내거나 곤혹감을 표출했다. 


이것은 내가 솔직하지 못했기에 벌어지는 일일까. 여러 번 반복되는 패턴에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많은 의사들은 나의 문제를, 내가 대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시험을 치고, 졸업하고, 다시 시험을 쳐서, 편입을 하고, 재학 중인 상태에서 내가 느낀 불안감의 모든 것을 찾으려 한다. 물론 내가 털어놓은 신상정보이기 때문에 이에 맞춰 진료를 보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번 의사는 내가 나의 가정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매우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전 의사는 내가 편모가정임을 밝히자 "그럴 줄 알았다."며 이제야 퍼즐의 한 조각을 맞춘 사람처럼 굴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곤혹스럽다. 


그러나 내일, 정확히는 날이 밝아 오전이 되는 날에는 솔직히 얘기하고자 한다. 3주 정도 진료를 기다리며 나는 내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가장 크게 든 생각은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전 게시글에서는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쓴 적이 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고, 그 당시에는 그러한 감정을 크게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미안하다는 말보다도, 내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괜찮아지는 법을. 


내 곁의 많은 어른들은 힘든 티도 내지 않고 그것들을 감내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그들에게도 과일의 속살 같이 여린 마음이 존재하겠지만 나는 그걸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신기하다. 말하지 않고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 것인지. 그 말캉한 마음으로 무너지지 않고 하루를 버텨내는 방법에 대해서. 혹은 무너지더라도 안전지대를 두고 있는 것인지, 누군가 털어놓을 사람이 있는 것인지, 무언가를 위해 버티고 있는 것인지.




오늘 체육관에서 관장님은 피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더킹에서 위빙으로 이어지는 자세인, 상대의 주먹을 피하는 자세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자세를 취할 때 고개를 떨구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도 관장님이 미트를 잡아주실 때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내리깔게 되었다. 관장님은 무섭죠? 라고 물어봤다. 나는 딱히 무서운 것 같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버릇이 있었다. 때리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농담을 하셨는데 나는 혼자 진지해졌다. 주먹이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람 얼굴 보는 게 낯설었던 것 같아서. 사실 내가 이 버릇을 알게 된 건 열아홉 살 때 처음 좋아하게 된 친구가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물여섯이 된 지금까지도 이걸 고치지 못하고 있구나. 누군가 지적을 해주면 얼이 빠질 만큼. 나는 심란했다. 거의 십 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제자리인 것만 같아서. 더 나빠진 것만 같아서.




출근하는 길에 같이 일하는 분을 우연히 만났는데 퇴근하고 나서 기숙사 올라가는 길에 또 만났다. 퇴근시간도 달랐는데 어떻게 저녁을 먹고 들어가는 시간이 같은 모양이었다. 약 4개월 정도 일했지만 그분과는 거의 근무시간이 겹치지 않고 각자 사정이 있어서 마주치는 일이 많이 없었다. 사실 나는 그분이 같이 일하는 분인지도 몰랐는데 우연히 내가 경비실 근무를 하고 있을 때 먼저 인사를 해주셔서 그때 자각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그분과 긱사로 올라가는 길에 버스를 같이 타며 처음으로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낯설지 않고 매우 편했다. 내가 초면의 누군가를 대하면서 편하다는 느낌을 받은 건 정말 오래간만의 일이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지 않아도 되고 있는 그대로 말해도 되는 사람. 신기했다. 그리고 정말 나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공부터 진로까지. 일을 벌려놓고 수습이 좀 안 되는 타입인 거랑 그래도 정말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거랑. 조금 지친 말투. 그래도 상대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고 반응해준다. '반응'이라는 단어에 새삼스러운 감동을 느낀다. 근무 도중 만난 후배와의 대화는, 내가 그 후배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제대로 이어지지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집중을 하지 못했고 각자의 얘기를 쏟아내는 데 바빴던 것 같다. 그리고 관심없는 태도. 말을 하고 있지만 듣는 이는 아무도 없는 상태. 


요즘은 참 그런 걸 많이 느낀다. 사실 우리 서로에게 관심이 없잖아. 그러면서도 시간을 내서 만나러 오고 아등바등 말을 섞는다. 그렇지만 곧 했던 얘기도 까먹고 이전에 들었던 얘기도 헷갈려한다. 누구든 상관이 없으니까. 오늘 만나고 얘기해야 했던 건 내가 아니어도 되니까. 미안하면서도 지리멸렬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일 년 여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을 때 정말 세 번 정도나 같은 얘기를 물어봤던 적이 있다. 그 친구도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런데 산다는 게 점점 그래지는 것 같다. 나는 잘 웃지만 마음은 웃고 있지 않고 정신은 몽롱하다. 자주 물건을 어디 뒀는지 잊어버리고 사람의 말은 들어왔다가 아무 감흥 없이 흘러나가버린다. 어떤 날에는 하루를 돌이켜보면 심각할 정도로 업무 이외의 말은 하나도 하지 않은 때가 있다. 나는 그냥 도서관에서 명찰을 찬 근로생. 어느 가게의 손님. 같은 학교의 룸메이트. 내가 내가 아니어도 되는 순간의 연속이다. 누군가에게 특별하지 않고 누군가도 나에게 특별할 것 없는 나날들. 다만 꿈속에서만 보고 싶은 얼굴이 나오는 살아있는 시간. 꿈을 꾸는 게 너무 괴로워서 지쳐 잠이 들 때까지 눈을 뜨는 게 버릇이 되었다. 약을 먹고 자면 빠르게 잠이 들지만 여전히 이상한 꿈들과 오히려 자기 전보다 심한 피로가 몰려든다. 저번 날에는 완전히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꿈을 꿔서 아침에 눈을 뜨고 이십 분 가량을 울었다. 반나절 가량을 그 꿈 생각만 하느라 나는 근무지에서도 눈물을 닦아내느라 몇 번이고 화장실을 가야만 했다. 특별할 것 없는 나날. 특별한 것은 오로지 꿈에서만 이뤄지는 삶. 이걸 버텨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언제까지 버텨내야만 하는 걸까. 


모든 게 나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누군가를 특별하게 여기지 못해서. 내가 지루한 사람이라. 재미가 없는 사람이라. 그냥 내가 나인 사람이라서. 이제 사과를 받고 싶지도 않고 나를 끔찍히 여기고 싶지도 않고 그냥 이게 나인 것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걸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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