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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경 Apr 25. 2021

독서 일기: 백은선 도움받는 기분

2021-04-25 일요일


글 쓰는 게 부담스러울 때 간단히 하루를 사진으로 기록할 플랫폼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인스타는 아는 사람들이랑 연동도 되어 있어서 좀 부끄럽기도 하고... 

일단 계정은 @4_etry 입니다. 아무나 팔로워 해주셔도 돼요. 


여하튼 오늘은 사진 위주로 간단히 일기를 작성합니다.



새벽에 와인에 사이다 섞어마시고 숙취에 정신 못 차리다가 

백은선 시인의 신작 시집이 너무 가지고 싶어 장장 40분을 버스 타고 큰 서점으로 나갔습니다. 


왼편 이제니 시인의 시집 역시 구매를 했는데, 서점 근처 카페에서 20분 정도 읽다가 생각이 나더라구요.

이 책이 집에 있다는 사실이... 

영수증도 안 받았는데... 염치불구하고 반품을 했습니다. 죄송했어요.



《도움받는 기분》이라는 제목의 새 시집. 문지 시인선 552번째네요. 

시집 코너를 쭉 훑어보니 문지 500번대 라인에서 꼼꼼히 읽은 시집이 몇 개 되지 않더군요. 반성을...



거의 저의 최애 시인으로 등극한 백은선 시인

가능세계 때부터 정말 좋은 시를 선보이는 시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도움받는 기분은 이를 뛰어넘어 자기 스타일을 더욱 구축해나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실험적인 면모도 엿볼 수 있어 굉장히 신선했어요.


그러면서도 아주 솔직히 적은 시가 소름이 끼치게 다가오기도 했어요.



"사물함 뒤에서 머리카락이 몽땅 잘렸을 때


가윗날이 귀 끝을 스칠 때 차가움과 공포"


앞장에서는 "내가 스무 살이 되어 처음 데이트를 했을 때, 너희는 뒤 테이블에 앉아 있었지. 너희는 크게 다 들리게 욕을 했지. 애인은 나를 창피해했다. 나는 슬프고 무섭고 화가 났어.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어. 왜."라는 충격적인 고백이 적혀 있습니다. 표제작인 도움받는 기분이라는 이 시는 제목과는 전혀 다르게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이야기로 가득해요. 제가 읽기에 이것은 학교폭력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읽히며, 또한 어떤 불우한 청소년기의 경험이라 느껴집니다. 어쩔 수 없이 시란 읽는 순간 시적 주체를 시인과 동일시 보게 될 수밖에 없어서, 이런 무거운 고백을 하는 순간 시인이 어떠한 마음이었을지에 대해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토록 날것의 고백이라니. 참혹하고 슬프고 오랜만에 소름이 끼치는 시였어요.

        



도통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천천히 시집을 읽는데

전문으로 읽고 또 읽을수록 여운이 밀려와서 옮겨 담아볼까 합니다.


기울기 표시가 불가능하여 굵음 표시로 대체하여 적었습니다.

여유가 되신다면 꼭 책의 원문을 읽어보시면 좋겠어요. 너무 좋은 시입니다.




죽도록 생각하다*


쉽게 잠들지 못하는 허공의 줄과

이 비밀 첫니가 나는 아픔 도대체 얼마나 클까

쉽게 잠들지 못하는 손과

할 말 다 하겠다고 결심해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으니까

암수 은행나무들이 마주 심어진 길에서


욕하지 않고 술 마시지 않고

비 맞으면서 걷는다 혼자

나무에도 암수가 있네 생각해

〈왓치맨〉에서 닥터 맨해튼은 로리에게 말해

너는 나에게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하고 싶지 근데 그러지 않아

내가 거절할까 봐 두렵거든


걷다가 알 수 없는 위험에 휘말렸으면 좋겠다고

알 수 없는 힘이 생겨서

비열을 넘어설 수 있을 것만 같고

며칠 전 버스 정류장에서

쭈그리고 앉아 소주를 마시던 할아버지

사는 거 힘드시죠? 조금만 참으세요! 조금만 참으세요!

사는 거 힘드시죠? 사는 게 견딜 수 없죠?

소리 질렀지 모두 무심히 버스에 올라탔고

난 청포도에 대한 소설을 쓴 소설가를 인터뷰하는 시를 썼어


청포도, 청포도 하고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고

청포도, 청포도

리버 피닉스가 짊어졌던 삶과 그의 부모 같은 것

인터넷에서 관용적으로 쓰는 영원히 고통받는 어쩌고 그런 말도


난 그냥 사랑이 하고 싶어

북 치는 원숭이 공 위를 구르는 코끼리 줄에 매달린 빛들

잘 지내? 네 생각해 하고

여기저기 전화 걸어봤어 아무도 받지 않고


모두가 함께 있는 상상


영혼이라는 말을 믿을 수 없고 다정하던

우리가 취해 서로 악을 쓸 때

서로의 잘못만 기억할 때

바람에 흔들리는 천막의 수상함


청포도, 청포도

수런거리는 초록 버스의

믿음, 배반, 반복, 순환

죽는다고 믿었어

언젠가 죽겠지 그치만


그림 밖의 화가처럼 돌연히

끝나는 장면을 기다렸어

조금만 참으면

벼락처럼 새로운 사건이 생기고 눈이 내리고 거기서

다 끝날 테니까 절망도 잠시뿐이니까


두 팔이 잘린 몸에서 솟구치는 피를 봐

죽지 않았을 때의 실망감과 안도감

죽은 언니를 생각할 때의 죄책감과 은밀한 기쁨

24시 맥도날드에 앉아 밤새 남의 시를 베껴 적었던 일


왜 내가 아니었을까,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반복해서 물어봐

선생님 그때 그냥 할 걸 그랬죠?

나는 총기 소지에 대해 역사 교과서에 대해 벽돌을 던진 초등학생에 대해

생각하고

돈 생각해


살고 싶어서 빛은 검정 속에 있고

나는 언니를 낳았지

눈물이 많고 떨어지지 않으려 해

쉽게 잠들지를 못해


이런 말 할 수 있을까

밝혀진 쇼윈도를 보면 돌 던지고 싶고

길에 내놓은 화분을 보면 밟고 싶고

의미 없는 살인을 저지르고 반성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왜 나만 여기 남아

가짜 얼굴로 가짜 말을 하고 가짜로 숨

결국 모두 지워버릴

발끝 내려다보고 창에 비친 적막을 듣고

네가 아팠으면 아프다고 보고 싶다고 전화 걸었으면


삶이 시작되려 할 때

바람도 숲도 눈물도 없이

새도 아이스크림도 혓바닥도 없이

삶이 막 시작되려고 두근거릴 때


눈과 눈을 기억하는 사람의 차가운 손과

기침 소리 짧게 공기를 흔들던 순간과

두번째 세번째 이가 나고

스무 개의 영구치를 갖게 될 때까지

몽땅 썩어버릴 때까지


사랑에 대해 믿음은 맞물린 이처럼 단단할까

너는 묻지 않지


두꺼운 옷을 입고 커다란 모자를 쓰고

뭘까 이 부피는 무게는 뭘까 반복되는 배반과

조류의 난망함 같은


아무도 모르는 말들을 잔뜩 적어 산속에 묻고 싶다


욕을 듣고 싶다

얻어맞고 싶다

왜 내가 아니었냐고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런 말도 할 수 있을까

생살이 찢기는 아픔

쉽게 잠들지 못하고 밤새 두근대는

청포도**


* 파스칼 키냐르.

** 노략질을 일삼으며 살았습니다./빛을 빛이라고 말하는 게 싫었습니다./나는 기다렸고/기다림은 내게 삶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거기에도 중력이 있고 물과 공기가 있습니까./나는 믿지 않습니다./섬을, 전신주를, 겨울을, 눈 감은 얼굴을, 고요를./사랑은 웃고 있었습니다.





이 시집은 살아남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요. 빛이 살기 위해 어둠 속에 있는 이야기들. 


최근 엄청 행복했던 날이 있었는데요. 그날 든 생각이 "시련을 견디게 하기 위해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이었어요. 사실 삶은 시련의 연속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감정은 불행인데, 아주 이따금씩 선물처럼 다가오는 약간의 행복 때문에 삶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삶이 내게 다정해질 때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이해한다고 느낄 때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이 행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할지 불안합니다.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준다고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견딜 수 있는 사람만 남은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견디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는 어디일까. 견디지 못한다면 행복도 느낄 수 없고 영영 불행하거나 죽어야만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나는 행복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하고 참 이 세상에 좋아하는 것이 많은데 이제 버틸 힘이 많이 남지 않았어요.



어쩌면 행복은 악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이 없었다면 시련은 시련이라는 이름 대신에 일상이 되었겠죠. 우리가 아주 잠시 맛볼 수 있는 그 감정 때문에 평생을 인내하며 참회하고 살아야만 한다면. 그리고 그런 것이 현실이라면 나는 이것이 지옥과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어요. 우리 할머니는 천국이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천국에 가기 위해 지옥과도 같은 현실을 살아내는 것일까요? 이런 시련들을 견디지 못한 나는 죽으면 무엇이 되는 걸까요. 나는 매우 한계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친구가 가지고 싶어요. 친구가 필요해요. 이연주 시인의 시집에 적혔던 한 대목을 끝없이 되뇌어보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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