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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경 May 12. 2021

그냥 일기: 인생은 무시무시한 벌

2021-05-12 수요일


얼마 전에 SNS였나 어떤 작가의 말을 통해 “인생이란 좋은 직장, 학교로 커다란 변화가 올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뉘앙스의 글을 보았던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유예지만 어쨌든) 올해 들어 그 말을 더욱 실감하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나는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무시무시한 벌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살아왔던 삶의 테두리에는 우수한 학벌과 유명한 직장을 우선시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아무런 생각도 의지도 없던 스무 살, 어영부영 입학하게 된 대학교는 내가 아닌 주위 사람들을 면목 없게 했다. 나는 서울 어디쯤에 있는 대학교에 다닌다고 자주 소개되고는 했다. 나는 그럴 때면 내가 다니는 학교가 창피한 것도 아닌데 왜 학교명을 밝히지 않지? 하는 심정이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레 그 말에 담긴 의미에 기가 죽었으며, 어느덧 나 역시 “서울 어디쯤에서 학교를 다녀요.”하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학교는 한 학기를 마치고 반수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반수 후 학과만 다르고 또 똑같은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일을 지나 스물다섯의 나이로 다시 다른 대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목표로 했던 대학, 혹은 나의 주변 사람들이 기대했던 대학교의 위상(?)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어찌 되었든 4년제라는 점이 이제는 내 소속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은 인생에 지나가는 계단 같은 것 같다. 그 계단으로 내가 원하는 목표에 조금 일찍 도착하거나, 득을 볼 수는 있겠지만 확실한 건 그건 최종 목표가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아주 일류의 대학이 아닌 이상 학벌 같은 건 그냥 다 비슷비슷한 영향력을 준다. 나는 학교를 다시 다닌 것을 후회하지 않고,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공부 외에도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렇다고 내 인생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태어날 때의 나와 별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한 개인이, 나라는 존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고, 대부분의 일은 선택하기 전에 이미 결정이 되어 있다. 나는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들로 이 기나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말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내가 좋아했던 작가들은 나라를 위해 개인을 희생했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동반자살을 하려 했거나 미쳤거나 스스로 생을 끊었거나 하여튼 이미 스물일곱의 나보다도 젊은 나이에 드라마틱한 선택을 하여 생을 마감했다. 내가 성인이 되어 가장 놀랐던 점은, 나는 아주 대단한 것을 바라며 살아온 편도 아니었지만, 내 존재가 사회에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정말로 변두리의 사람이었다. 


언젠가 서점에서 허지웅 작가의 신작을 살펴본 적이 있다. 암 투병 후 작가는 커다란 것을 쓰기 보다는 사소한 것, 바꿀 수 없는 것을 위해 살기보다는 바꿀 수 있는 것에 전념하는 삶을 살겠다고 적은 페이지가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이 굉장히 와 닿아 몇 번이나 곱씹고는 한다. 세상은 이미 태어난 순간 정해진 많은 것들이 나의 평생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를테면 친구를 사귀는 것, 무언가를/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품어보는 것,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것, 해보지 않았던 운동을 하는 것, 타인을 이해하고 도우려 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사소한 것들만이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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