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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ig Box

by ji

* 이 글은 KGDVS의 글을 읽고 요약한 것으로 작성자 편의상의 해석으로 인한 내용의 오역 혹은 의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요약한 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것은 거대한 규모를 가진 평범한 건물들을 위한 건축적 전략들에 대한 일련의 조사 중 첫번째이다. 평면의 개발은 (대부분은 실패로 이어지는) 대다수의 건축 작업에서 영감 혹은 알리바이로 작용했지만, 오늘 날 많은 건물들은 사회적으로 실현 가능하거나 경제적으로 흥미롭기 위해 복잡한 평면 개발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건축의 필요성에 대한 싸움은 주택과 공공 건물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고 그 전장에서는 평면이 중요하다. 하지만, 상당한 양의 현대 건축 생산은 이 우주의 변두리에서 발생한다. 많은 건물들은 너무 구체적이지 않게 정의된 내용물을 위한 실용적인 의복에 불과하며, 이런 실용적으로 틀이 잡힌 조건에서 파생된 건축을 개발하려는 시도들은 대부분의 경우 희망적인 생각을 드러낸다. 평면과 그 사용의 복잡성이 무관해지면 건축을 주장하는 지렛대도 사라지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규모가 맥락과 관련하여 중요해 보일 때, 이해관계는 너무 첨예하여 사라질 수 없다. 이러한 경우 건축은 지나치게 야심적이지 않고 현명해야 한다. 건축은 절대 완전한 건축이 되기를 바랄 수 없으며, 그러나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간과되어서는 안 될 만큼 충분히 필수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준거 체계의 문제이다. 이 준거 체계의 야망은 무엇이야 할까? 거대한 상자를 정의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1970년대 초 그리고 로버트 벤츄리의 건축 생애의 두 번째 단계에서, 그는 인식되는 것의 현상학에 대한 실용적인 대답으로서 위장된 일련의 그래픽 원칙들을 실험했다. 이 팝아트에서 영감을 받은 허위의 아이러니와 재현의 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략과 암묵적인 원칙은 여전히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처럼, 연속 개념 혹은 기능에서 분리된 건축은 핵심이기 때문에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내용 없는 건축은 어떤 건물의 기능이나 내용을 그 존재의 알리바이로 삼는다. 기능이나 내용은 촉매이지만 본질은 아니다. 벤츄리의 ‘상자’를 오리와 장식된 창고로 분류하는 것은 컨텍스트와 주소가 GPS와 웹 공간에 의해 정의되는 과도하게 연결된 사회에서 구식으로 보인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담긴 것과 담는 것 사이에 불필요한 연결을 만든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프린스턴 대학에 위치한 Lewis Thomas Laboratory(1986)와 같은 그의 작품의 일부에서 우리는 이 강제적인 주장들이 제쳐 두었을 때 무엇이 가능한지 볼 수 있다: 우리는 소통하지 않아도 되는 원칙들을 찾는 이 건물을 알게 된다 – 경계의 건축에 대한 연습이다. 내용물이 없는 건축은 실시 분야의 한계를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남겨진 가능한 건축적인 전략들을 조사하려는 야망과 함께 이 곳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새로운 건축이 아니라 전통 기능주의 (창고, 홀, 궁궐) 이전의 유럽 건축과 60년대에서 70년대 북미에서 개발된 대규모 컨테이너 건물의 실용주의 건축에 뿌리를 둔 건축이다. 이 첫 화에서, 후반부가 초점이다. 상자의 건축을 위한 가능한 전략들을 추출하기 위한 시도안에서, 우리는 집합적인 외피들의 건축을 간단하게 살펴봤다. 스튜디오는 도시 안에서 거대한 상자들을 위해 사용되는 어휘들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프로젝트들은 덮혀 있는 필드를 위한 구체적인 기계들을 위한 제안들이다. 그들은 가능한 건물들의 초상화로써 존재한다.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지만, 큰 상자의 중립성, 규모, 경제, 그리고 실용주의를 다루기 위한 가능한 도구들과 전략들의 일람표를 보여준다. 각각의 프로젝트들은 수단들의 경제성에 있어서 연습이 되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타당한 원칙들을 찾는 것이다. 만약 프로젝트의 성공을 완성된 복합성, 평면의 경제성, 혹은 모든 종류의 동선들로 인해 평가될 수 없다면, 이것의 관련성을 어떻게 우리가 평가할 수 있나? 그렇다면 다시, 우리는 Palazzo나 Pyramid의 성공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규모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없다.


Contemporary Monuments

건축은 점점 더 구축된 환경의 가장자리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그 곳에서는 작은 추가(little extra)가 허용된다. 건축은 점점 변방적이된다. 이 스튜디오는 이 자칭 망명의 경계를 공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상되지 않거나 심지어 허용되지 않는 건축 프로젝트를 제안함으로써, 우리는 신비로운 단체에 의해 현재 지어지고 있는 작업이나 일반적으로 상업적이라고 불리는 작업들을 수용하기 위한 건축가의 작업 범위를 넓히려고 한다. 이 영역에 접근하는 것은 대가가 따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진입하기 위해 아마 완전한 통제권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건물은 다른 특징들을 가질 지도 모른다 – 일반적인 개념의 좋은 디자인에 맞지 않는 특징들이다. 일반적인 외관, 크기, 이것이 땅과 만나는 방식이 핵심적이다. 기술을 향한 실용적 접근, 프로그램에 대한 일정한 관용,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기대가 핵심이다. 우리는 스튜디오를 통해 Paris의 도시 조직을 위해 거대한 건물들을 개발했다. 각각은 영민하게 사이트에 안착함으로써, 특정한 도시 풍경을 구성하는 능력을 지닐 만큼 충분히 거대해야 한다. 다양한 인지 척도에서 수행될 수 있도록 세심하게 개발했고 상세하다: 멀리서 보면 둔하고 크며, 가까이서 보면 실용적이고 정제되었다.

Monuments for Paris

우리의 도시들은 우리가 무시하기를 선호하는 기계들에 의해 운영된다. 기계들은 그 프로젝트가 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항의 부재로 추진되는 처벌받지 않는 지역에 서 있다. 주변부가 통제와 욕망의 영역 밖에 있는 한, 이것은 눈에 보이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5년 전, Paris는 도시와 그 주변 지역을 Le Grand Paris로 개칭하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이 단순한 명칭 변경은 상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인정했다. 형벌은 더 이상 면할 수 없다: 이 영역의 모든 법규, 물건, 그리고 디자인이 의도적이 된다. 이것은 역사를 통틀어 다른 도시에도 발생해 왔던 과정이다. 19세기 초반에 공동 묘지와 병원들 같은 거대한 공공 복합 건물들은 건강과 봉쇄의 이유로 도시 밖에 놓였지만, 오늘날 훨씬 확장된 도시안에서는 공공 기반 시설의 중요한 파편들이 되었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별 특징 없는 기계들의 독립적인 박스들은 이미 공공 인파라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 데이터 센터들, 재활용 공장들, 그리고 창고 공간들은 동일한 위계로 고려되어야 한다. 18세기와 19세기의 건축가들은 도시 기반 시설의 본질적으로 진부한 프로그램을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우리의 도시를 구성하는 시민 프로젝트로 끌어올렸다. 우리는 야망을 줄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들을 건축 용어로 다루려는 모든 시도는 극단적인 실용주의의 태도를 요구한다. Economy of means는 제시된 프로젝트들의 본질적인 의미를 규정하는 속성이다. Paris에 ‘거대한 상자들’을 위한 30개의 디자인들은 21세기 도시의 구조 요소를 위한 최초의 가능한 어휘를 시도하려는 시도를 나타낸다. 우리가 오늘날 계획하고 있는 Plaine Saint-Denis의 건물들은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 아니다. 그들의 순수한 매스는 그들을 피할 수 없게 만들고, 매혹적으로 강력하게 만든다. 이 힘을 도시 공동체에게 유리하게, 도시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우리는 도시가 그 것의 내부에 공동체의 핵심을 가져야한다고 믿으나 진정한 시민 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기념물을 공유할 때만 경험될 수 있다고 믿는다. ‘거대한 상자들’은 우리 21세기의 기념물이다.


The Urban Paradox

다음 12개의 프로젝트는 한 가지 중요한 고려 사항에 의해 추진된 실험의 산물이다: 주어진 형태의 이용과 변형을 통해서 특정 프로그램 및 사이트를 위한 실행 가능한 건축적 해결안을 개발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한가? 이 제안이 극단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기능과 지역성의 고려와 디자인 과정을 분리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의 의도는 건축의 모든 작품이 그것의 물리적, 문화적 맥락에 다하는 충성의 균형을 재고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 실험이 성공적이라고 판단하고 싶은 유혹을 많이 받는 만큼, 이 프로젝트의 원형에 대해 무지한 관찰자가 프로젝트들을 평가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인정한다. 각각의 프로젝트들은 궁극적으로 전통적인 건축적 판단 기준에 반하여 평가되어야 한다: 특히 집합 주택의 주어진 프로그램을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대략 100x200m의 직사각형 부지에 조화시키는 능력. 12개의 부모 프로젝트들은 아마도 사이트나 프로그램의 고려 없이 선택되었겠지만, 우리는 그 프로젝트들을 도시 형태에 대한 특정한 입장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았다. 약 한세기에 걸친 지어지거나 지어지지 않은 프로젝트들을 포함하여, 그들은 도시를 향해 넓은 범위의 정확하고 급진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실제로, 각각은 아마도 도시의 건축을 다루는 특정한 선언문이라고 주장될 수 있다. 그들은 도시를 구성하는 부분으로 인지된다, 역설로 가득 찬 조건이다. 모든 거대한 건물은 도시를 부시기도 하고 만들기도 한다. 이것의 거대한 크기는 건축이 영토의 규모로 운영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이웃을 정의하며, 그러나 동시에 큰 건물은 그것이 속한 도시의 일부를 흡수한다. 이 순수한 크기를 통해, 건축은 도시 안에 도시를 만든다, 이 도시 안의 도시는 완전히 관리할 수 없는 콘텐츠’content’이다. 건축가로써, 우리는 그 사적인 검은 박스의 환경과 공동적으로 살아가는 도시를 어떻게 중재할 수 있는지 이해하여 노력해야 한다. 도시의 형태는 적합한 수단을 제공한다.


Book of Copies

이 사회의 아이들은 점점 소통에 집착한다, 근대 건축은 일련의 거짓된 약속, 개념, 그리고 얼어붙은 다이어그램들을 재현하게 되었다. 건축 교육은 이것에 대해 적지 않은 비난을 수반한다. 시스템과 다이어그램은 가르치기 쉽고 미사 여구는 우리 주변에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교육은 상업 프로젝트의 거짓된 약속들을 모방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발전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건축의 문화적 뿌리, 그것의 원리 원칙, 예시, 엄격한 지성, 서투름, 그리고 추악함을 다시 고려해야 한다. 다시 단순한 참조 건물로 돌아가서 그들을 다시 그리자면, 우리는 이미 실행된 것들을 교정해야 한다. 건축이 발명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제안하는 각 운동들의 기초가 되는 의도에 관한 것이다. 이 방법을 통하여, 우리는 위대한 자유를 얻는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가지고 작업하면서, 우리는 그 대단히 중요한 매스를 어떤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발견한다. 여기에 나타난 프로젝트들은 다른 건물들의 평면, 단면, 그리고 관점으로부터 조립되고 복사되었다. 또한, 이 작업들은 현대 도시 안에서의 삶에 대한 진정 근대적인 대답을 나타낸다. 여기에 향수는 없고, 단지 비활성화된 덩어리가 있다. 이 교육 방식(copy method)을 허무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economy of means에 대한 조사에 가깝다. 어떤 프로젝트들은 잠재적인 타협의 영역에 남아있다. 건축을 문화적인 실무이자 경제적으로 실행가능한 주체로써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야망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마 가까스로 우리의 직업을 형편없는 의사 소통 부서로 만들지 않고도 생존하게 만들 것이다. 콘텐츠가 없는 건축은 의도로 가득하다.


Necessary Architecture: a Different Whole

데이터 센터는 우리의 근대 세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건물 유형이다. 사적으로 소유된 우리의 디지털 세계안에서 가장 밀도 있는 장소는 우리의 공유 인프라 스트럭쳐의 정점을 보여준다. 불행히도, 그 건물들은 대부분 볼 수 없게 남아있다. 기술적이고 환경적인 요구 조건에 따라, 그들은 세계의 가장자리에 숨었다; 그들은 점점 더 드물어진다. 데이터 센터에 거주자인 클라우드는 우리의 귀중한 콘텐츠가 저장되는 장소로써 그것의 비가시성과 투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터 센터들은 본질적인 컨텐츠 때문에 집합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최근에 개발된 건축 유형에 속한다고 주장될 수 있다. 이년 전, Architecture without Content라고 불린 콜롬비아 대학교에서의 첫 스튜디오에서, 우리는 순수한 매스의 방법으로 인해 균등하게 뒤덮인 지형을 조직하기 위해 거대한 박스들의 능력을 연구했다. 이 스튜디오에서, 우리는 도시의 중심으로 돌아가 현재는 뉴욕의 중심이지만 예전에는 맨하튼의 변두리였던 루즈벨트 아일랜드에 그 거대한 건물들을 제안했다. 루즈벨트 섬은 전략적으로 위치하며 도시와 고도로 연결되어 있다. 가장 최근에 실행된 칸의 루즈벨트 기념비의 사후의 실행과 많은 논문 프로젝트에서 묘사된 것처럼 이 장소는 상징적 표현에 있어 보이지 않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코넬 대학교의 하이테크 캠퍼스를 개교하려는 계획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장소는 우수한 중심으로써 재 탄생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 이 모든 과정안에서, 전체전이 프로젝트는 부족하다. Architecture without Content 4는 벤츄리의 ‘the difficult whole’의 개념과 연결된다. 그룹 형태도 요소들의 집합체도 아닌 ‘난해한 전체(the difficult whole’은 오히려 변곡을 통해 부분들의 화합적인 구성을 추구하는 형식적인 전략이다. 루즈벨트 아일랜드의 데이터 센터들은 같은 것을 하길 희망한다. 그들의 내용물은 건축적인 형태를 위한 알리바이가 되고 반면에 그들의 위치는 섬을 위한 전반적인 프로젝트에 기여한다. 이 거대한 박스들의 불변의 형태는 보이지 않는 콘텐츠를 활용하여 우리의 정보 시대를 위한 일회용 보호 구역을 만든다. 루즈벨트를 위한 프로젝트는 완공되는 날에 이것의 붕괴를 선언한다. – 텅 빈 중앙 지구.


A Short History of Architecture Without Content

이 책은 콘텐츠 없는 건축의 네번째 현현을 보여준다. 컨텐츠 없는 건축은 콜롬비아 대학에서 2년 전에 시작했다. 당시에 이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우리의 근대 주거를 거주하게 만드는 거대한 대형 볼륨들인 거대한 박스들을 다루는 연구 프로젝트로서 이해되었다. 우리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연구했고, 그런 건축들의 몇 가지 상을 떠올렸다. 스튜디오 도중에, 우리는 우리가 디자인한 건물들이 사람이 살지 않을 것을 염두에 두고 구상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심지어 그들이 보호하는 기계들과 어떤 직접적 연관도 짓지 않았다. 그들의 콘텐츠는 우리의 범위를 너무 벗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스튜디오를 콘텐츠 없는 건축이라고 이름 붙였다. 다음 두 해 동안 같은 주제의 다른 현현에 대해 작업하는 동안, 우리는 초점을 점차 넓혀갔다. Mendrisio와 Graz의 스튜디오에서, 우리는 이 거대한 건물들의 여파를 균등하게 덮힌 필드에서 테스트했고, 이 주제를 ‘주변의 건축’을 향해 더 넓은 범위로 확장시켰다. 콘텐츠 없는 건축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프로젝트는 아마 좀 더 이념적으로 변했을 수 있다. 콜럼비아로 돌아온 것은 한 번도 인지한 적 없던 초기의 아이디어에 내재한 주제들을 탐구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컨텐츠 없는 건축 4’는 더 화려하지만 더 야심차다. ‘컨텐츠 없는 건축 4’는 필라델피아에서 시작했다. 로버트 벤츄리의 흔적을 찾으면서, 우리는 마침내 완전히 그를 중요한 참고 렌퍼런스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결국 루이스 칸의 지어지지 않은 필라델피아 시민 센터를 축하하게 되었다: 불변의 매스가 된 그의 인프라스트럭처 벡터는 ‘big box’와 뉴욕 둘 다에 대한 야심찬 이해를 위해 주요한 레퍼런스가 되었다. 우리가 칸을 뒷문으로 삼아 벤츄리를 소개해도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확실히 개의치 않는다. 축소된 ‘프로그램’은 스튜디오가 다시 스파르타 정신을 회복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 있는 모든 프로젝트들은 데이터 센터이며, 가장 시급하고 현대적인 프로젝트들이다. 이러한 범위의 축소는 더 높은 정밀도를 가능하게 했고 새로운 도전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컨텐츠 없는 건축 4’는 개인적 예외가 아닌 그룹 형태(a difficult whole)인 도시의 집합적 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big box’의 능력을 테스트했다. 여기, 각각은 기계이자 묘비이다. 각각의 현현안에서, ‘big box’는 스스로의 가능성과 불가피한 종말 두 가지를 나타낸다 – 박물관을 위한 현대 건축 혹은 우리 사회를 작동시키는 기계들의 물리적 부활로써. 필수적인 건축이다. 데이터 센터들은 우연히 루즈벨트 섬에 불시착한 것이 아니다. ‘거대한 박스들’은 섬과 섬이 길러온 전통을 연결시킨다: 도시 인프라 스트럭처의 변두리 프로그램을 수용하는 전통. 맨하탄의 동쪽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작은 섬으로서, 루즈벨트 섬은 어딘가 멀리 떨어진 도시의 변두리를 나타내면서도 매우 가깝다 – 그것의 아주 가까운 경계에 있는 버려진 땅의 조각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것은 비교적 빠르게 전원지역의 한 섬에서 필요한 건물들과 구조물들을 수용하기 위한 완벽한 위치로 변모했다. 병원과 교도소의 시대가 이어졌다. 그 후 – 그리고 70년대에 가장 활발했던 – 루스벨트 섬을 주택으로 도시화하자는 제안들이 잇따랐다. 이 실패는 이 제안들은 항상 그 섬을 작은 맨하탄으로서 상정한다는 사실로 인해 생긴다 – 이미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도시 구역의 기이하고, 녹색이고, 더 이상적인 버전이다. 이 모든 예상들은 쓸모없다. 오늘날, 무게 중심은 이동했고 맨하탄의 자치구는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도시 안에서 하나의 중요한 구역일 뿐이다; 특히 일구 밀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갑자기 그 중심에 루즈벨트 섬을 발견하게 되는 거대한 도시 집적지이다. 특이한 방법으로, 칸의 Memorial은 코넬 대학의 새로운 과학부 개발이 발표된 것과 더불어 좋은 예이다. 우리는 이러한 최근의 발전을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가능한 미래의 징조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 프로젝트를 위한 촉매재는 상대적으로 높은 섬의 토지 가용성과 관련하여 튜브와 와이어 네트워크에서 섬의 예외적인 위치이다. 두 가지 요소 모두 루즈벨트 섬을 끊임없이 확장되는 (디지털) 클라우드의 물리적(그리고 가시적인) 허브로 변형시킨다. 루즈벨트 섬을 위한 프로젝트는 섬을 21세기 뉴욕의 불변의 중심지로 만든다 – 도시의 중심지에 있는 신비롭고, 기반시설 성격의 허브 리서치 헤테로토피아 이다. 12개의 건물들은 무형의 디지털 인프라 스트럭처의 표현과 근접성을 고려한다. 이것의 실용성과 불가피한 쓸모없음을 고려할 때, 각각의 프로젝트는 이런 컨테이너를 디자인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다룬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디지털 저장 수용능력을 비추어 볼 때, 어떤 디자인도 완성되는 순간 구식이 된다. 하지만 아마 이런 느림이 우리 직업의 유일한 자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내부에서 정말 일어나는 것들을 번역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다른 도전과 다른 긴급상황에 대처해야 한다. 모든 것이 엄청난 속도로 가상화되는 시대에서, 이런 느린 건물들은 안에서 영원히 변하는 정보들과 우리의 도시 바깥에서 집합적 순간들을 찾으려는 욕망 사이의 한계 값(threshold)이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각 건물은 가장 자리에 위치한다 – 섬의 가장자리와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의 가장자리에. 건물들은 말 그대로 도시와 관련하여 섬의 둘레를 철저하게 형성한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나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필수적인 건축을 축조한다.


A Short History of Architecture Without Content

이 책은 콘텐츠 없는 건축의 다섯 번째 현현을 보여준다. ‘컨텐츠 없는 건축’은 3년 전에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big box’를 연구로써 의도했다 – 여전히 많은 것들을 담는 거대한 산업 건물들. 시간이 가면서, 컨텐츠 없는 건축은 ‘경계’에서 가능한 건축의 개념을 나타나게 되었다 – 이것은 여전히 급진적이고 정확하게 유지되는 실용적인 건축이다. ‘컨텐츠 없는 건축 5’는 EPFL에서 열였다. 이번에 우리는 ‘축적 장소’를 다루었다. ‘축적 장소’는 생산의 장소이자 저장의 장소이다. 그들은 근대 기반 시설의 바로 그 본질에 집중하는 건물들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축적 장소들은 건축적 프로젝트들이 불가능한 장소들로 여겨지지 않는다. ‘축적 장소’는 특별한 건축적 관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건물들에 대한 형식적인 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사한다. 그들의 존재는 그들이 가진 전부이지만, 아마도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축적 장소는 건축이 컨텐츠를 무시할 수 있으며 여전히 정확한 건축을 만들 수 있다는 가정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 이유들로 우리는 형태를 먼저 만들고 추후에 내용을 검토한다.


Places Of Accumulation: Machines

다섯 번째 컨텐츠 없는 건축은 여러 의미로 종점과 같다. 이것의 우려는 우리가 이전 학기에 개발했던 세번째 스튜디오와 유사하다. 우리의 핵심 주장은 우리의 근대 사회 기반 시설의 순수한 규모는 우리가 더 많은 노력으로 그것의 설계를 다룰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데이터 센터나 유통 시장과 같은 거대한 건물이 직접적 사용자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것의 도시적 컨텍스트를 정의하고 조직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결정적인 매스를 가진다고 믿는다. 따라서 각각의 빌딩들은 우리가 공유하는 ‘균등하게 덮인 필드’의 참조점인 우리의 집합적인 우주의 자산으로써 디자인되었다 – ‘균등하게 덮인 필드’는 우리가 거주하는 완전하게 도시화된 세계이다. 점차적으로, 우리는 이 건물군이 어쩌면 도시를 위한 집합적, 건축적 프로젝트를 위한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우리의 초점은 특정 집합적 가치를 나타낼 수 있는 가장자리의 가능성에 있었다. 이전의 그 어떤 것보다도, 이 최근의 스튜디오는 이 건물들의 있을 법한 ‘특징’을 탐구하는 것에 있다. 학생들은 이것을 직설적이고 순진한 방식으로 했고, 주요 담론은 예시와 복사, 참고와 유용성 중 하나였다. (Example and copy, reference and appropriation.) 만약 우리가 Big Box의 ‘공통’ 언어를 개발한다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집합적 기억이 된 모델들을 다시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7개의 조상들을 정했고, 이 조상들은 우리의 담론에 적절하고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건축적 생산에서 나온 건물들이다. Donato Bramante의 Belvedere에서부터 Norman Foster의 IBM Headquarters 그리고 Aldo Rossi의 Centro Torri까지, 학생들은 도면들과 대규모 모델들을 통해 이 건물들을 연구했다. 모든 양식과 프로그램의 문제에서 해방된 학생들은 건축, 형태,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에 집중했고, 천천히 그들 자신만의 담화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조상 프로젝트들을 탐구할 때 사용했던 그 도구들을 이용하여 그들의 프로젝트를 발전시켰다. 여기에 제시된 컬렉션은 있을 법한 건물들의 묘사를 나타낸다. 그들은 컨텍스트를 가지고 있지 않고, 그들이 표현하지 않기로 선택한 내용만 있다. 적절한 신발 상자로써, 그들은 이 신발의 안쪽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이 결정은 아주 중요하다, 형태와 내용물 사이의 상대적 단절은 우리가 다른 ‘형태’를 고려하도록 한다 – Venturi Scott Brown의 ‘오리’와 ‘장식된 헛간’의 구분을 빌려오기 위한 것이다. 사이트의 지역성과 하나의 연결도 없이, 이 장식된 헛간은 모든 주소가 가상인 디지털로 연결된 문화의 발전에 의해 급격하게 변화된 도시 상황을 수반한다. 그것은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인 무지로 정의되는 도시 상황이며, ‘economy of means의 채택이 중요한 운영 도구로서 기능하는 조건이다. 원칙들과 재료들은 진정한 컨텐츠 없는 건축의 엔진들이다. 이 작업은 학부 이학년 학생들의 첫번째 학기에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것이 개인의 완결성이 보호되는 한 반-집합적인 노력의 가능성을 서술한다고 믿는다. 또한, 이것은 프로그램과 지역성에 관련된 일련의 ‘문제들’로부터 프로젝트를 추출하는 기존 교육의 대안을 개발하기 위한 시도를 보여준다. 대신에, 우리는 문화적 컨텍스트와 형식적 원칙들의 고려를 특별화 시키려고 노력했다. 건축 교육은 우리가 시급히 극복해야 할 난관에 봉착했다. 오직 우리가 건축 문화에 대한 공유 지식을 되살리고 모더니즘의 교육 모델의 거짓 진실과 진부한 말들을 버릴 때, 우리는 우리 현재 사회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도구들을 찾을 것이다. 급속한 변화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도구들이 놀랍게도 오래된 도구들과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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