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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유 Nov 01. 2024

새벽 세 시

 잠이 오지 않는다. 뒤척임에 지쳐 창문을 연다. 사월의 봄밤, 싸늘한 공기 속을 밀도 있게 채운 라일락 향기에 온몸의 세포가 깨어난다. 새벽 세 시.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취객의 통화소리만이 고요한 밤을 흔든다.

  어둠은 본능적으로 숨조차 가라앉게 하는가. 살아있는 것들의 숨죽인 고요가 더 가슴을 설레게 한다. 발소리를 숨긴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폴짝폴짝 화분 사이를 뛰어다닌다. 담장 위를 오르내리다 단풍나무 옆에 자리를 잡는다. 주목과 단풍나무 화분을 화장실로 쓰는 무례한 녀석이 바로 이 녀석이란 걸 오늘에서야 알게 됐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이 확연하게 다른 새벽 풍경이다. 밝음 속에서 사는 이들의 쉼표를 찍는 시간, 어둠 속에선 또 다른 삶의 현장이 열린다.  

  누군가에겐 치열하고 바쁘게 살아내야 하는 하루가 이미 시작된 시간이기도 하다. 새벽 배송차가 서서히 골목으로 들어온다. 서둘러 배송물품을 꺼내 잰걸음으로 계단 아래로 내려간다. 시동이 켜진 탑차의 소음이 새벽공기를 흔든다. 신문배달 오토바이도 달려온다. 우편함에 신문을 꽂고 급히 사라진다. 하루를 여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어지럽게 떠다닌다.

바람을 타고 라일락꽃 향기가 일렁인다. 어느 봄날, 친구와 낙산성곽길을 걷는데 라일락 꽃나무가 있었다. 내게 잎사귀를 따 주며 맛을 보라고 했다. 먹어보니 지독하게 쓴맛이다. 잔뜩 찡그린 내가 재밌는지 그녀는 유쾌하게 웃었다. 우리의 삶은 향기를 가득 품은 라일락꽃과, 향기롭고 예쁜 꽃을 피우기 위해 달콤한 진액을 다 소진한 쓰디쓴 라일락 잎사귀를 닮았다며 인생을 논했다. 누구나 가슴속엔 희로애락을 품고 사는 것이니까.

불면의 밤은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로 마치 퍼즐놀이를 하는 듯하다. 나이가 들수록 무뎌지는 감성과 감각도 이 새벽엔 마음의 문을 드나들듯 온갖 희로애락의 순간들이 자유롭다. 수십 년 전의 일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어제 일은 안개처럼 흩어지기도 한다. 잠 못 이루는 새벽,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궤적들이 쓸데없는 상념의 꼬리를 문다. 

어제는 새벽 세 시에 집을 나섰다. 양수대교를 지날 때부터 안개가 짙어졌다. 가로등 불빛도, 앞서가던 차도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빛나던 것들의 빛을 지우고 마치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듯했다. 와이퍼를 작동시켜도 들러붙는 안개의 미립자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마치 거대한 회색 구름 속으로 들어온 듯 착각이 인다. 비상등과 상향등을 켜고 속도를 줄였다. 서행으로 가던 앞차가 갑자기 나타났다. 아찔한 순간을 가까스로 피하고 강변도로를 지나자 희미하게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작 이십여 분 동안 안개를 헤치고 나온 길은 꿈이라도 꾼 듯 아득한 느낌이 쉬 가시지 않았다. 

20대의 청춘은 안개 속에 갇힌 새벽이었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다니던 회사에선 희망이 없었다. 길을 찾지 못해 안타까웠던 방황의 시절이었다. 눈만 뜨면 보이는 푸른 앞산과 들녘이 내게는 권태였다. 서울행 기차를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곤 했다. 기차만 타면 지겨운 고향을 떠날 수 있을 거란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막연한 동경을 안고 늘 떠나는 꿈을 꾸었다. 결혼식 날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 때만 해도 내 앞에 펼쳐질 힘든 세상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쨍쨍한 햇빛 아래서도 밤인 듯 새벽인 듯 짙은 안개 속을 헤매던 날들이었다. 

누구에게나 멈춤의 시간은 필요하다. 불편했던 생의 흔적들을 지우고 때로는 새로 그리며 내일의 삶을 설계할 수 있는 시간, 그것이 나에게는 새벽이다. 삶을 되돌아보면 허기진 마음 한편에도 행복한 순간들은 있다. 밤의 시간은 밝음을 향해 조용히 흐른다. 밤하늘엔 비워지지 않는 마음 한 자락인 듯 그믐달이 창백하게 걸려 있다. 온종일 시달리고 지친 사람들이 편안한 휴식을 하고 에너지를 생성하는 시간. 많은 이들의 꿈이 떠다니는 시간.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려는 작은 소란이 뒤섞이는 새벽 세 시다.

잠은 멀리 달아났다. 열린 창문으로 새벽의 한기가 다시 느껴진다. 따듯한 커피가 생각난다. 커피 가루에 물이 차오르며 강한 향을 내뿜는다. 안개인 듯 여명인 듯 희붐한 새벽 공기 속으로 커피 향이 퍼진다. 커피잔을 가만히 두 손으로 감싸든다.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간다. 작고 소소한 것들의 위로가 마음을 채워준다. 이 새벽, 잠의 일탈은 멈출 수 없는 시간 속에 또 다른 삶의 궤적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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