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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유 Nov 01. 2024

바람인형

 바람인형을 본다. 변두리를 비추던 태양은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고 어둠이 내려와도 여전히 힘차게 춤을 춘다. 모터는 웅웅거리며 쉴 새 없이 바람을 만들어준다. 빨간 옷을 입은 키가 4미터나 되는 바람인형이 좌우로, 위 아래로 유연하게 몸을 흔든다. 익살스런 어릿광대 같은 표정 때문인가. 인형 속에서 누군가 정말로 춤을 추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주변엔 아무도 없다. 나도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려서 천천히 리듬을 타고 흔들어 본다. 발밑에서부터 스멀스멀 내재된 아픔들이 솟구쳐 오른다. 마음 깊숙이 쓸쓸함이 녹아들고 눈가에 촉촉한 이슬이 맺힌다.

  전화기 속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린다.

   “내 삶에 왜 내가 없지?” 

  물음표를 던지는 그녀의 젖은 목소리가 깊은 공명을 울리며 어둠속으로 스며든다. 결혼 후 30여 년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그녀, 창밖의 세상은 그저 바라보기만 할뿐이다. 어젯밤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응급실을 다녀왔다며 긴 한숨을 토해낸다. 친구의 공허한 목소리가 마음을 휘젓는다. ‘나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우린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한 채 서로에게 아픔을 내비치고 있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던가. 친구의 아들도, 내 딸들도 책갈피 속에 묻혀버린 청춘을 애써 외면하고 날마다 책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열심히만 하면 되는 세상은 아닌듯하다. 명료하게 보이지 않는 길 위에 기하학적으로 세워지는 이정표들. 그 앞에 서서 엄청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자신의 주체를 찾기도 어려운 현실. 고뇌하는 청춘들의 한숨소리가 아프게 들려온다. 

  꿈이란 건 지난 세월 속에 깊이 묻어 두었고 생존의 본능만이 일상이 되어버린 친구와 나의 어머니들. 삶의 동력을 잃어버린 채 자식들의 손길만을 기다리며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부모와,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식들 사이에서 우린 어디쯤에 서 있는 것인지…. 어느 순간 내가 사라져버린 삶. 어디에서 나를 찾아야 하는 걸까.

   ‘언제나 나의 적은 나 자신이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어쩌면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패배라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마음앓이에서 헤어나기 어려운 건 아닐까. 아직도 여물지 못한 내 마음은 현실이 인식되지 않는 묘한 환상 속에 머물고 있는듯하다. 지금 이 순간 내 몸속을 돌고 있는 바람은 어떤 것인지. 

  저 바람인형의 모터처럼 아이들과 어머니들에게 생생한 에너지를 불어넣어주고 싶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꿈을 찾아 높이 날아오를 수 있도록. 세월 속에 묻힌 어머니들의 꿈도 한 조각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접어두었던 내 날개도 다시 펼칠 수 있는 무한의 에너지를 만들어 줄 희망의 모터를 꿈꿔본다.  

  산다는 것은 날마다 새로 꾸어야만 하는 꿈이 아닐까. 바람인형이 속삭인다. ‘나처럼 일어서봐. 이렇게 춤을 춰봐.’ 바람인형을 따라 수많은 내가 상상 속 플래시몹(flashmob)으로 한바탕 춤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바람이 속을 채워주지 않으면 어떻게 춤을 출 수 있겠어?’ 바람인형의 말이 들려온다. 어느 순간 커다란 물음표와 마주친다. 내가 가족들을 위해 쉼 없이 바람을 만드는 것처럼 그들은 또 다른 나의 바람이었어. 따뜻한 느낌표를 본다. 아둔하게도 내 삶에 내가 다른 모습으로 서 있음을 보지 못했다. 힘차게 춤을 추도록 나에게 바람이 되어주는 사람들. 그 사랑의 동력으로 꼿꼿하게 허리를 세워보자. 반쯤 구겨졌다가 두 팔을 활짝 펴며 다시 일어나는 바람인형을 따라 힘차게 일어선다. 

  나도 바람인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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