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 학들이 날아다닌다. 한 쌍의 사슴은 사랑을 나누는 듯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탐스럽게 핀 매화와 국화는 봄인 듯, 가을인 듯 계절을 다 품었다. 아담한 대나무 숲 연못가엔 하얀 억새가 바람에 날리고, 연못에는 백조 두 마리가 동그란 물결을 만들고 있다. 우리의 삶이 평화롭고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며 한 점 한 점 자개를 붙였을 장인의 마음이 세월을 건너온다.
일꾼들의 손이 바쁘다. 분잡한 손길로 잡다한 짐들이 나오고, 이내 덩치 큰 자개장이 끌려 나와 짝을 맞춰 섰다. 키 작은 거실장도 장롱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거리로 나앉은 자개장 위로 눈치 없이 햇빛이 쏟아진다. 방 안에선 안 보이던 먼지 덩어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한때 큰방 한편을 화려하게 차지했던 장롱이 햇빛 아래서 더없이 초라하다. 새까맣던 옻칠은 수십여 년 세월동안 희끄무레 바래지고 자개는 누렇게 변했다. 자개장을 아끼며 살던 엄마의 기나긴 이야기가 조개껍질 사이에서 아련하게 새어 나온다.
엄마의 자개장은 미닫이문이었다. 칙칙한 살림살이 속에서 유난히 빛나던 까만 자개장은 오히려 마음 둘 곳 없는 이방인처럼 겉돌았지만, 엄마는 자식들의 삶이 자개처럼 빛나기를 기도하며 닦고 또 닦았다. 어린 내가 장롱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장난을 치면 ‘장롱 다 부서진다’며 혼을 내던 엄마도 장롱이 낡아지고, 당신의 삶에 지치면서 무심해졌다. 도르래는 낡아서 덜컹거리고 검은 옻칠이 바래졌다. 단정하게 들어앉았던 이불이며 옷가지들조차 정리가 덜 된 채로 몸을 숨겼다.
자개장은 엄마의 금고이기도 했다. 은행 통장까지 만들어 모을 만큼의 여유가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열심히 일은 하셨지만 목돈이 생기면 여지없이 노름으로 날리고 빈 손으로 들어오셨다. 엄마는 어려운 살림에 보태기 위해 집에서 기른 콩나물과, 밭에서 나는 약간의 채소를 머리에 이고 매일 시장으로 나갔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장롱 속에 넣어뒀다. 엄마의 금고는 자식들의 학비가 필요할 때나 가족이 많이 아플 때 힘들게 열렸다.
어느 날, 산에 약초를 캐러 갔던 아버지가 함께 갔던 친구에게 업혀오셨다. 발을 헛디뎌 바위 위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골절과 터진 상처로 아버지의 고통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병원으로 모셔 갈 수 없었던 엄마는 의사를 부르고 약을 사오셨다. 몇 달을 누워 지내시던 아버지가 거짓말처럼 회복된 것은 엄마의 금고 속 쌈짓돈과 눈물 어린 간호 덕분이었다.
오빠의 결혼을 앞두고, 엄마의 자개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산 등기가 나왔다. 큰아들의 신혼집 마련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산을 팔아야만 했다. 장롱문을 열어 놓은 채 엄마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한참 후 떨리는 손으로 문서 봉투를 쓰다듬고 있던 엄마의 등이 조용히 흔들렸다.
자개장은 엄마에겐 마음의 은신처였는지도 모른다. 늘 고되고 지친 몸을 기대고 앉아 커가는 자식들과 앞으로의 삶을 고민했을 엄마. 장롱 속에 몇 푼의 돈을 넣을 때마다 엄마의 얼굴에 주름 하나 펴졌을까. 그런 날은 그나마 행복했을까. 그 속에 엄마의 예쁜 옷 한 벌 제대로 넣지 못했지만 장롱에 새겨진 평화로운 작은 세상에서 마음 한 줄기 다듬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십 년의 세월 속에 사람도 늙어가고 자개장도 낡았다. 병석에 계시던 아버지가 떠나시고 혼자가 된 엄마는 낡은 장롱이 보기 싫어 작은방으로 옮겨버렸다. 빛을 잃은 칙칙한 장롱은 삶에 지치고 힘들었던 엄마의 무거운 시간을 품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힘들었던 시간을 바꾸려는 듯 원목으로 된 새 장롱을 들여놓았다. 자식들을 다 결혼시키고 나서야 만든 엄마의 통장 몇 개도 새 장롱 속에 자리를 잡았다.
세월의 무게를 이길 사람은 없다. 70여 일의 입원을 끝으로 엄마도 우리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가족을 보듬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고 살았던 87년의 세월, 희로애락의 끈을 놓고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지는 순간은 정말 찰나였다. 자식들만이 들풀처럼 억세게 살았던 한 여인의 단출한 삶의 흔적이다. 오 남매의 가슴속으로 영원한 자리를 옮기고 오랫동안 엄마를 기다리던 아버지를 만나러,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났다. 엄마가 떠난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엄마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뿐. 울컥울컥 올라오는 슬픔을 가슴에 안은 채 우린 다시 각자의 삶으로 회귀했다.
날이 저물며 이슬비가 내린다. 눈물인 듯 빗물인 듯 엄마와의 애틋했던 시간들을 적신다. 낡은 장롱에 새겨진 사슴의 눈에서도 조용히 눈물이 흐른다. 백조의 등에서도 또르르 빗방울이 굴러 떨어진다. 번쩍번쩍 빛나던 자개장이었지만, 지금 길가에 나앉아 비를 맞는 장롱이 더없이 초라하다. 퇴색된 옻칠 사이로 틈을 드러내는 나뭇결에 스며든 빗물이 자개를 밀어내 ‘툭’ 떨어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