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까지 윤슬이 펼쳐져 있다. 하늘의 별들이 모두 내려앉은 듯 눈이 부시다. 흩뿌린 듯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오종종한 바위 위에 또 하나의 풍경이 된 갈매기들, 수면 위로 튀어오를 먹이를 기다리는 건지, 외로움을 나눌 짝을 찾고 있는 건지…. 어쩌면 저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고단한 날개를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무념무상의 한때를 보낼 수 있는 이곳은 내 마음 쉴 곳이 필요할 때면 떠오르는 그리움의 장소이다. 제주도 바닷가에 있는 작고 아담한 카페 <서연의 집>. 이곳은 예쁘기만 한 카페가 아니다. 나도 마치 자연 속에 한 점인 듯 동화되는 곳이다.
8년 전 시월의 어느 날, 딸과 처음 이곳에 왔었다. 낮은 돌담 너머 끝없이 펼쳐진 바다, 얼굴을 스치고 아린 가슴속을 휘돌던 갈바람, 높아진 햇살에 노랗게 물들던 이층 테라스의 잔디. 아프지만 그리운 추억의 한 조각을 다시 꺼내고 싶었다. 골목길을 돌고 돌아야만 다다를 수 있는 이 카페처럼 8년 동안 우리도 삶의 굴곡을 돌고 돌아 지금 이곳에 왔다.
그때, 딸은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기 싫은 듯, 아니 말이란 것도 생각이란 것도 다 잊은 듯, 그저 조용히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공허한 눈동자는 너무 슬퍼보였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스쳐도, 다 식어가는 찻잔이 앞에 있는지도 모르고 헝클어진 마음을 먼 수평선까지 펼치고 있었을 테지.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함에 짓눌려 날개가 접힌 듯 움츠린 작은 어깨를 보며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공허한 딸의 마음을 어떻게든 채워주고 싶었다. 고달픈 청춘의 꿈을 활짝 피울 수 있는 마술사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허상인 듯 실제인 듯 막연한 삶의 고비를 넘기 위해 힘을 내야만 했던 그날, 딸과 나는 무심한 듯 바다만 바라보았다. 멀리 고깃배를 따라 날아오르는 갈매기의 힘찬 날갯짓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여리고 지친 청춘의 날개도 저 갈매기처럼 힘차게 펼쳐지기를, 아득하게 보이는 망망대해를 건널 수 있는 힘이 생기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작은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때는 이층 테라스의 간이의자에 앉았다. 싸늘한 갈바람을 맞으며 먼 수평선에 초점 없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마시지도 못하고 싸늘하게 식은 커피 잔에 갈바람이 그리는 작은 동그라미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딸은 제주도에 더 머물고 싶어 했고 난 서울로 와야만 했다. 많이 아플까 봐, 많이 울까 봐,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숭숭 구멍 뚫린 거무튀튀한 현무암이 가슴속을 가득 채운 듯 답답했다. 드넓은 바다만이 위안이 되었던 그날의 기억이 지금까지 흑백필름처럼 남아 있다.
현무암으로 쌓은 나지막한 돌담들, 붉은 동백꽃과 호랑가시나무의 새빨간 열매는 핏빛 같은 상흔을 떠올리게 하지만 오늘은 아프지 않다. 귤나무가 줄지어 선 제주도의 한적한 골목길엔 한겨울 된바람도 멈추고 쏟아지는 햇살만이 가득하다. 동박새는 동백꽃 꿀에 취하고 우리는 쇠박새의 아리아에 취한다. 막연하게만 바라보던 바다, 묵묵히 서 있는 빨간 등대, 자유롭게 날고 있는 갈매기들, 파도조차 멈춘 듯 고요함과 따듯함이 적절한 그 풍경 속에 다시 우리가 있다.
맑은 햇빛도 푸른 바다도 마음에 닿지 않았던 그때, 바다냄새가 흘러드는 이곳에서 마음의 허기를 채우던 그날이 떠오른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란 걸 가질 수 있다고 했던가. 웃을 수조차 없었던 그때의 힘든 상황들을 극복하고 다시 찾은 이곳에서 마음껏 웃으니 좋다. 딸의 웃음소리가 햇살 속으로 퍼진다. 쇠박새의 맑은 노랫소리도 그녀의 노래인 양 내 가슴속으로 건너온다.
오늘은 손에 닿을 듯 바다가 펼쳐진 일층의 이 자리가 좋다. 바다는 파도로 깨워주고 물결로 다독이며 닫힌 마음을 열어준다. 조심스럽게 밀려오는 파도에 출렁이는 감정들과 풍경들이 어우러진 완벽한 하모니다. 오늘의 기억은 화려한 유화처럼 선명하게 각인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지금, 이 시간이 아주 느릿하게 가면 좋겠다. 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가 햇살같이 빛나서, 그 미소를 보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 따듯해서. 두 손으로 감싼 커피 잔에 웃음 띤 내 얼굴이 살랑인다. 겨울의 된바람이 불어도 춥지 않을 것 같다. 아무 말이 없어도 서로의 마음이 느껴지는 순간, 마음속을 휘돌던 수많은 언어들이 바다 위의 윤슬로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