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트기 전의 여명인 듯, 어스름한 저녁인 듯 밝음을 덜어낸 공간. 그림에 쏟아지는 은은한 빛이 시선을 붙잡는다. 민화 전시장 한쪽 벽에서 호랑이 세 마리가 나에게 눈 맞춤을 한다. 책거리와 장생도가 화려한 색채로 다가선다. 그림 한 폭에 온 우주를 담았다는 일월오봉도는 그 크기와 색감이 나를 압도한다. 그 틈에서 보일 듯 말 듯 수줍게 걸려 있는 그림, 소박하고 다정한 초충도에 마음이 머문다. 나비의 작은 날개가 팔랑이고 꽃잎은 살아 있는 듯 생기가 있다.
민화는 섬세한 선과 채색, 바림으로 완성하는 예술이다. 현실적인 염원을 담은 소박하고 진실된 그림이기에 더 마음이 끌렸다. 민화를 배워보기로 했다. 변화 없던 일상에서 나의 오늘을 새롭게 하고 싶다. 아침을 여는 햇살처럼, 빛을 품고 날아가는 새처럼 마음은 들뜨지만 설렘과 걱정이 함께한다.
붓을 든다. 마음은 훨훨 나는 새들, 예쁜 꽃들과 품고 있는 향기까지도 다 그려낼 성싶다. 마음과 달리 손은 떨리고 긴장이 된다. 초보자가 연습용으로 해보면 좋다는 모란을 그리기로 했다. 밑그림을 그리는데 선이 삐뚤삐뚤 제 갈 길을 잃는다. 분채와 물감을 섞어 모란 꽃잎에 하얗게 바탕색을 칠해준다. 다음으로 꽃잎 안쪽에 붉은 색을 칠하고 바깥으로 향해 바림을 한다. 선명했던 색이 빨강에서 분홍빛으로, 분홍에서 흰색으로 은은하게 풀어진다. 꽃잎마다 색을 입히고 풀어주고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바림은 색을 칠한 후에 붓으로 펴서 한쪽을 짙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츰 엷게 나타나도록 하는 채색 방법이다. 화폭에 살랑 바람을 일으키며 나비의 날갯짓을 만들고 꽃잎을 피워내는 신비의 순간이다. 응축된 색의 경계가 힘을 풀고 부드러워지는 이 시간만큼은 내 마음도 경계가 풀어지는 시간이다. 진한 색의 물감에서 물붓을 사용하여 색을 펴고 물감을 들어내듯 내 삶의 무게에서도 풀어주고 덜어낼 일이 많은 것 같다. 색을 여러 번 올리고 바림을 하는 과정이 반복되지만, 얇은 한지가 견뎌낼 수 있는 물감의 두께는 무한하지 않다. 그림에 욕심을 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들뜬 마음으로 시작한 민화 수업이지만 몇 시간을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차분하고 깊어지는 나를 만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화폭에 또 하나의 나를 담아내는 작업이다. 붓이 지나간 곳에는 삶의 희로애락을 보는 듯 자국이 남는다. 서툰 바림으로 순지 위에 곱게 얹어 놓았던 색이 벗겨지기도, 화사하게 피어나기도 한다. 화실에 걸려 있는 궁모란도를 본다. 금색 테를 입힌 푸른 바위가 가파르게 서 있고 수십 송이의 모란은 화려하게 피어 있다. 거칠게 표현한 푸른 바위처럼, 붉은 꽃잎처럼 내 삶에도 푸른 멍이 들고, 붉은 피도 흘리면서 수많은 흔적이 그려지고 있다.
아픈 기억은 생각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오른다. 삼십여 년 전, 자식을 잃을 뻔했던 그 순간은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된 상흔이다. 병원에 입원 중이던 딸은 뇌수막염이 의심된다며 정밀검사를 받았다. 첫돌도 안 된 아기가 검사실에서 나오자마자 숨을 못 쉬고 온몸이 푸른빛으로 변해갔다. 의사는 산소 호흡기를 꽂고, 아기의 작은 가슴을 수없이 누르고 떼는 동작을 반복했다. 나의 심장도 함께 멈추는 듯했다. 어느 순간 딸은 기적처럼 다시 ‘숨’이라는 생명줄을 붙잡았다. 나는 온몸에 힘이 풀려 생사의 갈림길에서 다시 돌아온 아이를 안아 줄 힘조차 없었다. 아득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것들, 기억하고 싶어도 어느새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 것들까지 여러 색으로 삶의 흔적들이 펼쳐진다. 그림은 그리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그대로 담겨지나 보다. 붓질을 할 때 마음이 성급하면 거칠게 벗겨진 흔적이 남고 너무 조심스럽게 바림을 하면 색은 예쁘게 풀어지지 않아 오히려 지저분해진다. 어느 정도는 대범하게, 때로는 차분하게 붓질을 하다보면 만족스러운 그림을 만날 수 있듯이 내 삶도 그렇게 그려가고 싶다.
이젠 내 삶의 바림도 조금은 유연하고 능숙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속에 빨갛게 맺혀 있던 상흔도 조화롭게 풀어주고 행복했던 기억들과 은은하게 섞어본다. 붉은 꽃잎을, 푸른 잎사귀를 바림하면서 세월이란 붓으로 선명했던 내 상처들도 바림을 한다. 한지 위에 나만의 작은 세상이 피어난다. 한송이 모란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