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지유 Nov 01. 2024

그곳엔 달수네 커피가 있다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아카시아 잎 사이로 진주알처럼 하얀 꽃봉오리들이 조랑조랑 매달려 있다. 터질 듯 부푼 꽃봉오리가 열리며 진한 향기를 바람에 날린다. H대 후문을 지나 낙산공원길로 들어서는데, 아카시아 꽃향기도 느끼지 못할 만큼 어디선가 진한 커피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커피 향을 따라 가보니 작은 자동차카페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나도 긴 줄 끝에 섰다. 하얀 트럭 위 조그만 나무 간판엔 ‘달수네 커피’라고 쓰여 있다. 달수라는 이름이 정겹다. 수제커피, 더치커피, 아이스커피, 세 가지의 단출한 메뉴지만 정성이 느껴진다. 

  달수 씨의 하얀 얼굴엔 박꽃 같은 웃음이 살포시 피어 있다. 수줍은 듯 맑은 눈빛은 욕심 하나 없이 순수해 보인다.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수제도구로 갈아서 한잔 한잔마다 정성을 담는다. 서두르지도 않고 조용히 움직이는 달수 씨는 은은한 풍미의 더치커피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 찬물로 우려내는 기다림의 커피, 약간의 쓴맛과 고소한 맛이 조화를 이룬 부드러운 더치커피를 난 좋아한다. 가끔 기분이 우울할 땐 약간의 산미(acidity)가 있는 것도 뒷맛이 깔끔하고 상쾌해져서 좋다. 더치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낙산의 초록에 내 마음도 젖어든다.

  며칠 전, 단골 카페에서 전화가 왔다. 마침 더치커피를 내리는 날이라고 시간이 되면 놀러 오란다. 일주일에 한두 번 우려내는데 오늘은 내가 마실 커피를 직접 만들어 보라고 했다. 더치커피 기구 상부 물탱크에 찬물 500ml를 넣고, 커피 탱크에 로스팅한 케냐 커피 원두 50g을 갈아서 넣었다. 커피가루에 균일하게 물이 스미도록 조금씩 적시면서 톡톡 두드려 다졌다. 물탱크의 조절레버를 2초 간격으로 맞추고 돌리자, 물이 한 방울씩 탱크로 떨어져 커피가루를 촉촉하게 적신다. 드디어 우려진 커피가 한 방울씩 나선관으로 내려온다. 액체가 떨어지는 압력에 의해 투명한 유리나선관이 아주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마치 꿈속에서 환상의 왈츠를 보는 듯하다. 커피서버에 한 방울씩 모아지는 갈색 액체에서 피어오르는 아련함, 아담한 카페 안은 부드러운 커피 향으로 가득 찼다. 

  조용한 말씨와 기품 있는 미소를 지닌 카페 사장님도 커피를 만드는 게 좋아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도 그만두고 카페 개업을 했다. 동네 시장 입구에 자리 잡은 작은 카페여서 수입은 적지만 청년시절부터 꿈꾸던 일을 하니 마음이 행복하다고 한다. 카페 사장님은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던 일을 이제라도 시작해서 좋고, 젊은 달수 씨는 꿈을 현실로 이루어서 좋다. 맑고 조용한 눈빛이 닮은 두 사람처럼 언제든 자신의 꿈을 이룰 수만 있다면 행복한 삶이 아닐까. 

  달수네 커피를 마시며 낙산 성곽 길을 천천히 걸었다. 거뭇거뭇 이끼가 낀 수백 년 전에 쌓아진 돌들 틈틈이 새로 복원된 깨끗한 돌들이 흑백사진처럼 아련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두 손을 꼭 잡은 연인들, ‘까르르’ 해맑은 웃음을 터트리는 어린아이 뒤를 따라가는 젊은 부부의 흐뭇한 미소, 콩콩 뛰어다니는 강아지까지 행복해 보이는 이곳에선 내 마음도 한껏 여유로워진다. 이 길을 지나간 사람들의 많은 사연들이 이끼처럼 돌담에 켜켜이 세월의 두께를 더해간다.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고 공원을 산책하다보니, 다시 달수네 커피로 발길이 향했다. “이름이 달수 씨인가요?” 그는 본명은 수철이지만 ‘꿈을 향해 달리는 수철’을 줄여서 ‘달수네 커피’라 지었다고 한다. 차 옆면에는 ‘여행이란, 유를 하다’ ‘용기청년 꿈달수’ 라고 쓰여 있다. 하얀 트럭은 ‘꿈을 그리는 도화지’라며 수줍게 웃는다. 소박한 자동차카페로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꿈을 되새겨주는 달수 씨는 행복해 보인다.

  공원의 푸른 숲과 돌담을 따라 이어진 꼬불꼬불한 하얀 길, 군데군데 나타나는 조용한 마을이 어우러진 모습은 동화 속 그림 같은 풍경이다. 분위기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도 닮아가나 보다. 이 길에선 뛰는 사람도 없고 큰 소리를 내는 사람도 없다. 마음이 저절로 평화로워지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커피를 만들고 싶다는 달수 씨. 그가 만들어준 향기로운 커피는 한 박자 쉬며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너무 조급해 하지도 말고, 나태하지도 말고 세월의 흐름대로 놓아두고 싶다. 한 잔의 커피가 주는 여유로움으로 성급함을 달래고 은은한 향기로 마음을 다독인다. 

  저녁이 이슥해지고 낙산공원엔 가로등이 켜진다. 유유자적 여유를 행하며 남다른 삶을 추구하는 달수 씨의 하얀 꿈도 수은빛 날개를 단다. 이 밤, 달수네 커피 한 잔엔 꽃향기가 어리고 별빛이 한소끔 내려앉는다.

이전 06화 그때, 그리고 지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