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

<처음>

by 박래여

<단편소설>

원점


1.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것은 꼭 30년 전의 가을 어느 저녁나절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가을 운동회 연습을 하느라 늦게 집에 온 길이었다. 짧은 흰 티와 짧은 남색 반바지 운동복을 입고 갈래 머리를 길게 땋았었다. 책 보따리를 등에 비스듬히 메고 흙투성이가 되어, 지치고 피곤한 모습으로 삽짝을 들어서다가 마루에 앉은 할머니의 치마폭에 안긴 그 아이에게 눈이 멎었다. 검은 피부에 입술이 두툼한 그 아이는 무척 못 생겼다. 숨을 쉴 때마다 코에서 누런 콧물이 쑥 나왔다 들어갔다. 아이는 코를 훌쩍거리다 손등으로 쓱 문질러 닦았다. 아이는 머리통만 한 사과를 와작와작 씹어 먹고 있었다. 그 아이도 나를 쳐다봤다. ‘참 멍청하게 생겼네. 더러워.’ 나는 속으로 그런 말을 삼키며 마당에다 침을 카악 뱉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나는 고함을 치다시피 했다. 내가 먹어야 할 사과를 그 아이가 빼앗아 먹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내 목소리에 마루에 앉아 있던 세 사람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우리 새끼 오나?”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며 나를 반겼다. 그 아이가 히죽 웃었다.

“저 아이가 그 막둥이 손녀라 예?”

얼굴이 흉하게 얽은 여자가 비녀를 뽑아 손 빗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다시 쪽을 찌면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곰보딱지 주제에 아는 척은 왜 해.’ 나는 이상하게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는 아첨 끼가 뚝뚝 떨어지는 웃음을 흘렸다. 누른 금을 입힌 이가 살짝 보였다. 자줏빛이 나는 남색 한복을 입고 있는데 동전 부분이 유난히 희어 보였다.

“연아 이리 온! 니 동생이다. 인사해라.”

할머니는 내게 손짓을 했다. 나는 축담에 올라서며 책 보따리를 풀어 작은 방 마루에다 패대기를 치듯이 던져버렸다.

“할매, 배고파 밥 조!”

나는 통통 불은 수제비 덩이처럼 입을 쑥 내밀며 불만스럽게 외쳤다.

“이것아 손님 있는데 거기 무슨 버르장머리고?”

그때까지 방문 앞에 앉아 천정만 멀뚱하게 바라보던 아버지가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꾸지람을 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모습이 예전처럼 당당하지 못하고 어딘가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어머니는 어디 갔을까.

“할매, 옴마는?”

“와서 인사 하라쿵깨 와 뚱딴지 소리만 하노?”

“우째서 내 동생인데?”

앙칼진 목소리로 할머니를 향해 눈을 흘겼다.

“저 저 저것이…….”

할머니는 아버지를 쳐다봤고, 아버지는 슬그머니 축담을 내려서며 마루 밑에 신을 찾는 척했다.

“아가, 오늘부터 자가 니 동상잉깨. 잘 데리고 놀거라.”

여자가 내 팔을 잡더니 손바닥에 100원짜리 지폐를 한 장 잡혀 주면서 웃었다. 곰보가 웃으니 그 얽은 자국이 더 흉측해 보였다. 나는 돈을 마루에다 획 던져 버리고는 진저리를 부르르 치면서 정지로 도망을 쳤다.

“저저 버르장머리 없는 것 보소.”

할머니가 화를 버럭 냈다.

“어머이 참으시오.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기라요. 지도 놀랬실 거 아닙니까. 난데없이 동상이라니.”

나는 정지 문턱에 올라서서 그 여자를 향해 혀를 쑥 내밀었다. 그때까지도 그 아이는 아귀처럼 사과만 먹고 있었다.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철이 없기는 왜 없어. 나도 알만큼은 안다고. 곰보딱지 주제에. 우리 할매가 우째서 아지매 어무인가 말이다.’ 혼자 구시렁거리면서 윤기가 반질반질 나는 무쇠 솥의 뚜껑을 열었다. 속이 깊은 사발에 보리쌀에 하얀 쌀 알갱이가 논두렁에 두렁 콩처럼 드문드문 박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밥그릇을 부뚜막에 꺼내 놓고, 부뚜막 옆에 마루와 이어져 달린 찬장을 열어 무김치 보시기를 찾아내서는 볼이 미어지도록 허겁지겁 밥을 퍼 넣었다.

점심을 굶은 탓이었다. 오후 수업이 있는 날은 집에 와서 밥을 먹고 갔었다. 우리 집은 학교 근처였다. 점심시간에 집에까지 뛰어 오가도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놀 시간은 있었다. 오늘은 친구들과 땅따먹기 내기에 정신이 팔려서 점심시간을 건너뛰었다.

나는 도시락을 싸다니지 않았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의 도시락에는 멸치 볶음이나 달걀말이가 들어 있었지만 내 도시락에는 장아찌나, 김치가 고작이었다. 학교에서 강냉이 죽을 끓여줄 때는 빈 도시락과 숟가락만 있으면 됐지만 강냉이 죽이 없는 날은 굶거나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갔다. 시래기에 무, 고구마, 감자 등, 잡곡이 섞인 밥이기 일쑤였다. 그 시절에 산중에 사는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다들 그만그만했다. 농사를 짓는 집이라 해도 양식 걱정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논 한 떼기 없는 우리 집은 양식을 팔아먹어야 했다. 할머니는 우리 집을 지지리도 가난하다는 것이었지만 내가 보기엔 우리 동네에서 가장 돈이 많은 집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온 날 저녁이면 내 믿음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곤 했다. 아버지는 허리에서 무명으로 만든 두툼한 전대를 끄집어냈다. 전대에서 시큼한 땀 냄새가 났다. 개구리를 잡아먹은 뱀처럼 가운데가 불룩한 전대의 한쪽을 잡은 아버지는 내 키 높이만큼 쳐들고 아래로 쩔쩔 흔들었다.

“연아 이 속에 머가 나오는지 봐라. 아부지 마술 솜씨 좀 볼래?”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싱글거렸다. 나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군침을 삼키며 지켜보곤 했다. 매번 그 속에서 푸른 지폐 다발이 방바닥에 뚝뚝 떨어지곤 했다. 아버지는 돈다발을 한 묶음 씩 왼 손의 새끼와 약지 손가락에 세모꼴로 끼웠다. 돈뭉치를 비스듬히 눕혀 삼각뿔처럼 만들어 오른손 엄지와 금지로 침을 퉤퉤 뱉어가며 셌다. 내가 하나 둘 셋을 세기도 전에 엄지와 금지를 딱 소리 나게 부딪혔다. 돈다발을 방바닥에 탁탁 쳐서 가지런하게 만들어 쌓았다. 또 부챗살처럼 좍 펴서 다섯 장씩 세기도 했다. 그 속도가 유난히 빨랐다. 돈다발을 다 헤아리고 나면 문종이를 자잘하게 오려서 만 원권 한 묶음씩을 만들었다. 돈을 다 헤아려 보고는 얼마가 남았다느니, 얼마를 손해 봤다느니 하셨다. 셈을 끝내고는 기분이 좋은 날은 백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던져 주곤 하셨다.

“공책이나 공부하는데 필요한 거 사거라. 주전부리하지 말고 배 고푸모 장터 국시 집에 가모 칙사 대접 해 주 끼다. 내 딸래민 줄 안 깨네.”

나는 아버지가 일러 준 말 중에 꼭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 그 뒷말이었다. 장터 국수 파는 집에 들르라는 말은 정말 듣기 싫은 소리였다. 그 국숫집 아주머니는 나를 유난히 반겼다. 어쩌다 그 국숫집 앞을 지나치다가 아주머니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속절없이 붙잡혔다. 맛깔스러운 국수 곱빼기는 듬뿍 얻어먹을 수 있지만 나는 그 국수의 맛을 전혀 음미하지 못했다. 국수 한 그릇 신나게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아이들도 많고 많았던 시절인데도 나는 그 집의 국수는 정말 먹기 싫었다.

“박 샌 딸내미가 행인물이 아니네.”

“저거 어미 애비가 행 인물이 가.”

“기집들이 환장을 한다니께. 물건이 쇠말뚝 겉은 가베.”

“아지매 맞소?”

“아가 듣거마 지랄 겉은 소리만 골라서 하네. 하도 예뿌서 국시 멕이 보낼라꼬 델꼬 왔거마 쓴소리 고마하고 퍼떡 묵고 일 나소.”

오일 장날 장돌뱅이를 하다가 그 국숫집 여자에게 붙들려 곱빼기 국수를 먹고 있을 때였다. 허름한 형색의 남자 장꾼 몇이 들어와 앉아 국수를 시켜놓고 그 여자와 수작을 벌이면서 하던 말이었다.

장날만 되면 나는 장돌뱅이가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장 구경을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신기한 구경거리도 많았다. 약장수가 온 날은 파장이 되도록 장바닥에 죽치고 앉아 구경을 했다. 약장수도 가지각색이었다. 각설이 타령을 하는 축도 있었고, 원숭이를 가지고 재주를 부리게 하는 축도 있었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들이 번질거리는 웃통을 드러내고 날카로운 칼을 가슴에 대고 엎어졌다가 일어나기도 하고, 광대들이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고, 신파조 노랫가락을 뽑기도 하는데, 장날마다 다른 놀이가 있었다.

나는 늘 혼자 다니는 편이었다. 숙이랑 점이라는 동네 친구가 있었지만 내 또래는 아니었다. 숙이는 나 보다 한 학년이 높았고, 점이는 나 보다 한 학년이 낮았다. 그러니 등굣길 친구는 되지만 하굣길 친구는 될 수 없었다.

나는 마루에 앉아 있는 곰보 여자보다는 그 국숫집 여자가 더 젊고, 예쁘고, 싹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 국숫집 여자와 곰보 여자 생각을 하자 하릴없이 등 너머 밭두렁을 어슬렁거릴 어머니가 생각났다. 밥맛이 싹 가셔 버렸다. 그래도 꾸역꾸역 밥숟가락을 입안으로 디밀었다.

“아이구마. 체하것다 물이라도 마심서 묵어라.”

그 여자가 정지 문 앞에서 들여다보며 자기 딴에는 환심을 사 볼 요량인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나는 당황해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얻어먹는 비렁뱅이 같구나.’ 어머니가 보셨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부엌데기나 바가지에 누룽지를 긁어 담아 김치 가닥 몇 개 걸쳐서 부뚜막 앞에 앉아 묵는 기니라. 니도 에미처럼 부엌데기 될래?’ 나는 귓불이 화끈거렸다. 그 곰보 여자가 나를 업신여길 것 같아서 창피했다.

“부끄럽은 가베. 괘안타. 우리 개똥이 잘 부탁한데이.”

여자는 정지 문 앞에 있는 축담을 내려서며 마루 쪽을 보고 말했다.

“어머이 지는 고마 갈랍니더. 성님은 늦을랑갑네 예. 개똥아 에미 간다.”

“와? 저녁밥 해 묵고 있다가 자고 가거라. 개똥이가 울모 우찌 달래라꼬 벌써 일어서노?”

“일어 선 김에 갈랍니더.”

“참말로 갈라나? 그람 그리 해라. 고맙데이. 이리 잘 키아서 핏줄 찾아 주니 내 그 은혜 잊지 않으꾸마. 아가 보고 잡으모 언지든지 오거라.”

할머니의 목소리가 참 살갑다. 그 곰보 여자는 아무리 예쁘게 보아도 울 어머니보다 대 여섯 살은 많아 보였다. 그런데 어머니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여자가 가는 기척을 느끼면서도 정주간을 나가지 않았다. 아니 정지 문을 소리 나게 닫아걸었다.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연아, 가서 에미 찾아 오니라. 빌어무울 년이 밥때가 됐는데 오데 가서 안 오는 기고? 보오쌀도 삶아야 할 낀데. 저녁 때꺼리나 있는지, 살강에 보오쌀 바구리 열어 봐라.”

나는 입이 쑥 튀어나온 채 밥그릇과 숟가락을 설거지 사구에 사납게 담그고 김치보시기를 찬장에다 넣은 다음 찬장 문을 부서져라 닫았다. 살강에 가서 보리쌀 바구니를 열어 보았다. 저녁거리는 있었다.

“아이구 불쌍한 내 새깽이, 지 에미가 올매나 구박을 했시모 에미가 가는데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노. 자식새끼 내질러 놨시모 진작 챙기 올래 기지. 가로 늦게 친 애비 찾아 보내고로 있어. 이 등신아. 기집 년을 갈아 치울 라모 진작 갈아 치우든지. 밖에서 내지르기는 말라꼬 내 질러.”

할머니의 사슬은 또 시작될 모양이다. 나는 슬그머니 정지 뒷문으로 빠져나와 아래 채 헛간 쪽으로 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살그머니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져 돌아보았다. 그 아이가 헤죽헤죽 웃고 있었다. 앞섶에 커다란 사과를 안고 있다가 내가 쳐다보자 사과를 쓱 내밀었다.

“따라오지 마.”

나는 눈을 세모꼴로 접어 잔뜩 힘을 주며 잽싸게 달려가 사과를 빼앗았다. 할머니가 듣지 못하게 속삭이는 말로 엄포를 놓았다. 아이는 금방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해졌다. 나는 야멸치게 돌아서서 헛간 뒤꼍에 있는 텃밭을 지났다. 울타리 사이에 난 개구멍으로 빠져나왔다. 대나무 밭이 펼쳐졌다. 대나무 밭의 샛길로 해서 못 둑으로 달음박질쳤다. 해거름이면 못에는 커다란 물잠자리 떼가 잠수를 하면서 날았다. 나는 마당 빗자루를 들고 나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물잠자리가 잠방 잠방 꼬리를 못물에 담그는 것을 바라보았다. 문득 저 물잠자리 한 마리 잡아 꼬리에 실을 묶어 그 아이에게 주고 싶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2.


그 해 가을은 내게 특별했다. 그 아이가 우리 집에 오고 나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내겐 아주 잘 된 셈이었다. 남동생을 본 복덩어리라고 할머니와 아버지의 귀염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내 위의 언니가 ‘잘난 가시나’란 소리를 들으면서 할머니의 구박을 받을 때도 내가 ‘할무이 찌짐 묵고 싶다.’ 라거나 ‘할무이 인절미 묵고 싶다.’하면 ‘오냐 내 새끼 쪼끔만 기다리라.’하면서 할머니는 마당 옆에 붙은 텃밭으로 나가셨다. 손바닥만 한 부추 밭에서 부추를 베다가 부침개를 해 주셨고, 찹쌀을 퍼다 다래기에 담아 물에 불렸다. 찹쌀이 적당히 퍼지면 옴팡한 대소쿠리에 삼베 보자기를 펼치고 그 위에 부어 가마솥에 넣고 쪘다. 다 찐 찹쌀은 삽짝 옆에 있는 돌 절구통에다 넣고 절구질을 했다. 할머니는 절구질을 하기 전에 찹쌀 고두밥을 한 덩이씩 만들어 나와 그 애에게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할머니는 물을 적셔가며 절구통에 찧은 찰떡 덩어리를 들어내 함지에 담으셨다. 함지 안에는 언제 준비했는지 노르스름한 콩가루가 고르게 펴져 있었다. 인절미의 고소하고 찰진 그 맛은 입에 넣기도 전에 군침부터 흐르게 했다.

그 시절엔 산골 마을마다 먹고사는 일에 허덕여야만 했다. 가을이었지만 쌀 한 톨 없는 꽁보리밥도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집이 수두룩했고, 점심은 고구마나 감자, 감 등으로 대충 때워야 했고, 그것도 없는 집은 아예 점심을 글렀다. 저녁엔 시래기 국밥이나 무채나 고구마가 섞인 밥을 먹어야 했다.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얻은 곡식은 아껴두었다가 요긴할 때에만 썼다. 어쩌면 할머니는 먹고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에 제사 때나 명절, 아버지 생일날에나 먹어볼 수 있었던 인절미를 해 주신 것은 나를 핑계로 그 아이에게 먹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아이는 우리 집 장손이 되었다. 여섯 살이 되도록 호적에도 올라있지 않았던 머슴애는 태호란 이름으로 박 씨 문중의 장손이 되었다. 그것이 당연한 절차였을 것이나 어머니는 눈에 띄게 수척해지셨고, 날만 새면 산으로 들로 지게를 지고 나가셨다. 집안 살림은 전적으로 할머니 몫이었다. 어머니는 아무 권한도 없었다. 대를 이를 아들을 낳아 주지 못한 죄인이었으니까. 시댁에서 쫓겨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살아야 할 여자 팔자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지도 않았고, 그 아이를 미워하지도 않았다.

“불쌍하기는 니나 내나 마찬가지다. 이리 모자지간이 된 것도 전생에 니랑 인연이 있었는 갑다. 지 새끼 건사도 몬 할 년이 아 새끼는 말라꼬 내질렀던고.”

어머니는 그 아이를 등에 업어주며 혼자 군담을 했다.

그 아이는 눈칫밥을 먹고 자라서 그런지 눈치가 백 단이었다. 먹성도 좋았다. 어찌나 아귀같이 먹어대는지 고구마 한 바구니를 삶아 놓으면 언제 바닥이 났는지 몰랐다. 손가락을 입에 물고 빨면서 말도 잘하지 않았고, 웃지도 않았다. 먹을 것만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배가 올챙이배처럼 뽈록해도 무엇이든지 입으로 가져가기 바빴고, 살강이든, 선반이든 먹을 것이 숨겨진 자리면 어디든지 잘도 찾아냈다.

“괜찮다. 배 다른 자슥들 줄줄이 낳아서 키울라니 젖인들 제대로 멕있것나. 젖배를 골아서 식탐이 많은 기다. 우리 집에서 쪼맨만 지내보모 달라질 끼다. 그 새 지 에미가 발걸음이나 안 해야 자가 우리 식구한테 정을 붙일 낀데. 그 에편네가 알랑가 모르것다.”

그러나 어머니의 바람을 비웃기나 하듯이 곰보 여자는 수시로 우리 집을 들락거렸다. 어머니는 그 여자가 오면 아버지의 옆 자리를 내어주고 할머니 방에서 잤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아이의 태도였다.

“개똥아 에미 왔다. 이리 온나 내 새끼.”

하면서 삽짝을 들어서면 어느 틈에 달아났는지 그 아이는 없었다. 어머니가 태호를 부르면 못 이기는 척 나오곤 했지만 그 여자 곁에는 가지 않으려 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쯤 되어서는 아예 그 여자를 야멸치게 몰아붙였다.

“와 당신이 내 옴마고? 우리 옴마는 여게 있는데. 인자 우리 집에 오지 마라.”

그 여자는 울면서 돌아갔다.

그 아이가 자꾸만 마음에 들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 아이를 데리고 꼴망태를 메고 꼴을 베려 다니기도 하고, 소를 먹이려 산으로 가기도 했다. 우리 집 마구간에는 늘 황소 서너 마리는 매어 있었으니까.

그 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공부머리는 한 푼도 없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던 나는 내 동생이 꼴찌를 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역니은을 가르쳐도 깨치지 못했다. 나에게 이마에 혹이 나도록 쥐어 박히고, 공부 못한다고 아버지께 회초리로 종아리가 벌집이 되어도 책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머리는 타고 나는 기다. 우리 집에는 공부 못하는 아가 없는데. 우째서 저런지 모르것다. 일찌감치 일이나 야무지고로 갈치는 기 낫것다.”

“아무리 그래도 국문은 깨치고로 해야 제 앞가림은 할 거 아닙니꺼. 늦 머리가 터지모 공부하지 마라 캐도 지가 할낍니더. 억지로 되는 일이 머 있다고 그리 닦달을 합니꺼.”

학교를 그만두라는 아버지의 호령에 울먹이는 그 아이를 어머니는 감쌌다.

아버지는 그 아이에게 낫질하는 법과 지게 지는 법을 가르쳤다. 아버지는 가지가 벌어진 소나무를 잘라다 앙증맞게 지게와 발채를 만들어 그 아이의 등에 걸어 주었다. 아이는 학교 가기보다 바지게를 지고 꼴을 베려 다니길 좋아하고, 어머니를 따라 산이나 들에 나가 일하길 좋아했다. 책가방을 마루에 던지기 무섭게 그 아이는 지게를 지고 산으로 내뺐다. 어머니는 우리 집 장손이 든든한 일꾼이라고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장삿길에 오르면 할머니의 모진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일을 핑계로 할머니에게서 벗어났다. 들로 산으로 나가시는 것이 생활이었다. 그 아이가 어머니의 그림자 역할을 했다. 나는 샘이 나 죽겠지만 어쩌겠는가. 든든한 엄마의 백이 있는데.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도시로 유학을 떠났다. 공직에 있던 언니 곁이었다. 집에는 그 아이만 남아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도시 생활을 하면서 가끔 만나는 그 아이는 영락없는 농사꾼이었다. 학교 공부는 여전히 꼴찌를 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아이만 농촌에서 썩힐 수가 없다고 했다. 무지렁이 농사꾼으로 만들기엔 어머니의 애정이 너무 컸다. 어머니는 기어이 그 아이를 위해 돈뭉치를 싸들고 인근 사립 고등학교를 찾아다녔고, 어머니의 소원대로 아이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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