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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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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un 30. 2022

47. 오디 한 박스


오디 한 박스    


 

  총각이 오디를 한 박스 따다 주고 간다. 오디는 사투리로 오돌개라 한다. 뽕나무 열매다. 새까맣게 익은 오디는 달콤하다. 무공해라 그냥 먹어도 된단다. 고사리 밭가에 야생 뽕나무 한 그루가 있다. 고사리 작업할 때면 오디가 자라면서 익어가는 것을 즐겼다. 새참 시간이면 할머니들과 뽕나무 아래 앉아 오디를 따 먹거나 떨어진 것을 주워 모아 오디주도 담그고 오디효소도 담그곤 했다. 점심때 부드러운 뽕나무 순을 따다 삶아서 기름에 볶으면 맛있는 나물이 된다. 고사리 밭을 총각에게 넘기고 오디 익어가는 철도 잊고 있었다.

 

 엊그제 동네를 지나오다 오디가 새까맣게 익어있는 뽕나무를 봤다. 그 아래 천막을 깔아놓고 오디를 터는 것을 봤다. 늙은 나그네 부부였다. 그 집 뽕나무는 늙어서 아름드리 된다. 간짓대로 털어야 할 정도로 오디도 푸짐하게 열렸다. 낯선 노부부가 오디를 줍는 것을 바라보며 ‘저 오디는 신 맛이 강한데. 우리 고사리 밭에 오디는 참 단데.’하면서 지나왔었다. 이심전심일까. 뜻밖에 총각이 오디를 가져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사리를 꺾는 총각과 그의 어머니를 봤지만 오디 생각은 못했던 나와 달리 ‘뽕나무 밑에 천막을 깔아놨더라.’ 농부는 눈여겨봤던 모양이다.  

 

 마침 입이 궁금하던 참이다. 배는 부른데 입은 뭔가 달라할 때는 꼭 새참 때다. 시집 온 이래 평생 오전과 오후 새참 시간을 건너뛰지 못했다. 습관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무얼 먹어볼까. 물 한 잔 먹고 말까. 궁리하던 중이라 오디를 보니 식욕이 막 생겼다. 씻지도 않고 한주먹씩 먹어댔다. 금세 배가 부르다. 저녁 안 먹어도 되겠다. 하루 삼시세끼 한 끼도 안 굶으니 배는 꺼질 줄 모르는데 입은 때맞춰 궁금하다. 다이어트는 늘 생각에 그친다. 무슨 일이든 실천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남은 거 설탕에 버무려 둘까? 술을 부어둘까?”

  “냉장고 넣어놓고 먹어치우고 말아라. 술이고 효소고 그만 담가라. 먹지도 않으면서.”

 

 농부가 눈을 부라린다. 살짝 흘겨주었다. 과일 효소나 술은 넘치도록 담갔지만 정작 효소도 술도 먹어치우는 사람은 농부다. 올해는 매실효소도 안 담그기로 했다. 단감 산 두렁에 있는 매실은 청년이 따지 않았을까. 노릇노릇 익은 매실을 설탕에 절이면 맛이 기막히다. 풋 매실이 약 된다지만 음식 만들 때 넣거나 물에 타 먹기는 익은 매실이 맛있다. 우리 집 울타리에 있는 매실 세 그루는 농부가 전지를 말끔히 해서 그런지 흉년이다. 따 봐야 한 항아리도 안 나올 것 같아 포기했다. 저장된 매실 효소도 넉넉하다는 것이 관건이다. 

 

 “오디주가 맛있는데. 포도주처럼 색깔도 예쁜데. 피로회복에도 좋다는데.”

 

 쫑알거려봤자 내 입만 아프다. 농부 몰래 술과 설탕을 사다 담그거나 먹어치울 수밖에 없다. ‘무거운 술과 설탕을 사서 어떻게 가져오지?’ 오디 박스를 저장고에 넣었다. 나는 주전부리를 안 하는 편이다. 주전부리를 즐기지 않지만 살이 찌는 것은 식습관 탓이다.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고 밀가루 음식을 좋아한다. 농부처럼 몸을 움직이기보다 정적이다. 들일을 접으면서 온종일 집안에서 종종걸음 친다.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하고 집안일을 하지만 행동반경이 좁다. 농부처럼 감산에 갔다 오면 저절로 다이어트가 되겠지만 ‘같이 갈까?’ 물어보면 ‘거치적거리기만 한다. 당신이 할 일도 없다.’는 농부다. 

 

 내가 늦복이 터졌다. 일복 많은 농부 따라 살면서 늘 허덕였는데 농부가 못 따라오게 하니 노동에서 풀려났다. ‘쓰고 싶은 글 원 없이 쓰고 읽고 싶은 책 원 없이 봐야지.’했지만 어깨와 목, 오른팔에 문제가 생겼다. 열흘 정도 침을 맞으러 다녔지만 효과가 별로 없다. 자꾸 컴퓨터 마우스를 움직이고 자판을 두들기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도 못하면 죽으란 말이냐고 항변하고 싶지만 항변할 대상도 없다. 손가락 끝도 입술도 퍼렇게 오디 물이 들었다. 저장고에 둔 오디가 자꾸 식욕을 돋운다. 오늘 저녁은 오디로 배 채워? 말은 쉽다. 한국인은 밥 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밥을 먹어야 든든한 것도 습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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