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단편소설>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사랑
1.
“간다.”
언니의 책가방이 탱자나무 울타리 위를 휙 날아와 내 앞에 떨어졌다. 길바닥에 패대기쳐진 책가방을 챙겨 뒤를 돌아보자 하늘에서 휙 날아와 내 뒤에 사뿐히 서는 사람은 호랑나비였다. 두 갈래 땋은 머리는 어깨에 찰랑거렸고, 칼라에 청색 띠를 두른 하얀 윗도리에 180도 퍼진 청색 교복 치마를 입은 언니는 장골 키 두 배는 되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장대 하나만 있으면 가볍게 휙휙 뛰어 넘었다.
교복 밑에 하얀 체육복 바지를 입은 언니는 땅에 발을 딛자마자 체육복 바지를 벗어 책가방 안에 쑤셔 넣으며 소리 쳤다.
“이 굼벵아, 빨리 뛰라니까 뭐해?”
언니는 내 손을 낚아채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탱자울타리를 뒤돌아봤다. 한껏 구부러졌던 장대가 탱자울타리를 치며 튕겨나가 마당에 떨어지는 소리 경쾌하고 맑았다.
대문을 열고 나온 아버지는 손에 커다란 몽둥이를 잡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참새들이 일제히 조잘대기 시작하자 탱자 가시 사이에 핀 상아빛 탱자 꽃이 저희들끼리 낄낄거리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2.
우리 집은 사방이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었다. 삼천 평이 넘는 산비알은 벚나무, 소나무, 목련나무, 은행나무, 사철나무, 장미, 소철 등 크고 작은, 흔하고, 귀한 관상수가 빼곡했다. 그 넓은 나무숲을 가꾸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늘 일군들과 밭 매고, 거름 내는 일로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았다. 아버지는 뭘 하는 사람이었을까? 까짓 말단 공무원이었다. 공무원은 번드레한 겉치레고, 정작 하는 일은 여자 바꾸어가며 새 살림 차리기였다.
지금도 언니와 동갑나기 딸이 있는 과수댁과 눈이 맞아 한 살림 차렸다는 소문이다. 아버지는 여자가 생기면 아예 집에 발걸음도 하지 않다가 돈이 궁하면 집으로 기어들었다. 나무를 판다거나, 땅 문서 한 장 손에 쥘 때까지 우리 집 가장 노릇을 했다.
어제 저녁에 집에 온 아버지는 밤새도록 어머니를 달달 볶았다. 그 삼천 평 중에 백 평이라도 팔자는 소리였다. 어머니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삼천 평은 아버지 혼자 맘대로 처리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외할아버지께서 당신의 고명딸에게 넘겨 준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S시에서 집을 몇 채나 가졌던 재산가의 아들이었고, 어머니 역시 C시에서 내 노라 하는 재산가의 딸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정략결혼을 했다.
어머니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어머니는 그 꿈을 접고 스무 살 꽃띠에 시집을 왔다. 어머니는 시집오면서 자신의 손때가 묻은 피아노를 싣고 왔다. 아버지의 눈 밖에 난 것은 어쩌면 그 피아노 때문은 아니었을까. 지금도 ‘솔베이지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며 피아노를 치는 어머니를 보면 슬픔이 울컥 치밀곤 한다. 어머니는 나이 오십이 넘어도 여전히 꿈을 꾸었다. 책과 피아노 밖에 몰랐던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열등의식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책보다 노는 쪽으로 발달했으니 얌전하게 책 속에 빠져 있거나 피아노를 치고 있는 아내가 부담스러웠을지 모른다.
어려서 아버지가 없는 날은 어머니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우리는 곧잘 노래를 불렀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머니의 피아노 덕에 우리 집 딸들은 피아노를 잘 친다. 어머니의 개인지도 덕이다.
어쨌든, 고생이라곤 모르던 어머니가 시집 와서 고생길로 접어든 것은 아버지의 바람기였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아내에게 마음을 붙이지 못했던가 보다. 더구나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대를 이을 고추를 원했지만 우리는 줄줄이 조개만 달고 태어났다. 그것도 연년 생으로 5공주가 된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 했듯이 아버지의 바람기는 대를 이을 아들을 얻자는데 있었다. 여자가 바뀔 때마다 재산은 줄어들었고, 살림에 대해선 아예 관심도 두지 않는 아버지 덕에 다섯 채가 넘던 기와집은 막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남의 것이 되어버렸고, 전세방으로 나 앉게 된 딸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외할아버지는 S시 외각에 있는 다랑이 삼천 평을 사서 아담한 가정집과 창고 한 채, 다랑이마다 관상수를 심어 우리 가족을 옮겨 살게 해 주셨다.
덕분에 어머니의 뽀얗고 길던 손가락은 대나무 뿌리처럼 굵고 튼실한 농부의 손이 되었다.
그 손으로 피아노를 치며 속울음을 삼키던 어머니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바람기는 갈수록 도가 지나쳤고, 우리가 어릴 때는 어머니께 손찌검도 예사로 했다. 아버지는 봉급을 받아도 생활비를 내 놓을 줄 몰랐다. 오입질하기에도 모자랐으니 어머니는 딸 다섯 먹이고 입히기 위해 외갓집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돈을 몰랐다. 어려서부터 쓸 줄만 알았지 벌 줄은 모르고 자랐으니 그 씀씀이가 헤플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학교 다닐 때도 공부보다 연애질 하는 것으로 농땡이 상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다. 할머니는 학교에 기부금을 왕창왕창 냈다고 했다. 아버지는 돈으로 졸업장을 받은 셈이다. S시의 농림보통 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갔다 온 아버지는 잠시 동안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했다. 집에 돈만 축내고 빈둥거리자니 돈도 궁했고, 연애 사업도 어려웠다. 아버지는 괜찮은 직장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공무원이 제일 나은 직업 같았다. 검사, 판사 등, 사자 붙은 직업이 최고였지만 공무원이란 직업도 여자들에겐 인기 만점이었다. 아버지는 머리 나쁜 부잣집 아들이란 딱지를 뗄 욕심으로 공무원 시험에 매달렸다. 운이 좋았던지 5급, 지금 9급에 해당하는 말단 공무원 시험에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그 시절 공무원이라면 대학 감투가 부럽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우리 아들이 과거에 급제 했다’고 돼지를 잡아 동네잔치를 걸게 벌릴 정도였다.
문제는 마음에도 없는 장가를 들면서였다. ‘내 인생의 목표는 멋진 연애를 하면서 인생을 만끽하는 거다.’ 하면서 총각시절을 보낼 작정으로 꿈에 부풀었던 스물 네 살의 아버지, 공무원 발령을 받자마자 할아버지는 사주단자를 신부 집에 보냈다.
“오래 전부터 니한테는 정혼자가 있었다. 인자 평생 묵고 살 직장도 잡았으니 내가 안심하고 니 혼인을 서두르기로 했다. 그라고, 아무래도 내가 올해를 못 넘길 상 싶다. 니 장개 드는 것 보고 죽을란다. 만약 니가 장개를 못 들겠다모 내가 가진 재산을 전부 사회에 기부하겠다.”
결국 아버지는 결혼을 했다.
할아버지는 거짓말처럼 이듬해 돌아가시고 그 많은 재산이 고스란히 아버지 몫이 되었다. 아버지는 간덩이가 부어 버렸다. 집에 마누라가 있거나 말거나 신나게 총각 행세를 하면서 밖으로 나돌았다.
아버지의 헤픈 씀씀이에 할머니는 집 한 채가 남의 손에 넘어갈 때마다 속을 태우더니
“니가 아들을 못 낳아 준께 저 것이 밖으로만 도는 기라.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거늘. 쯧쯧 그래 가지고 남정네 건사 하긴 진작에 걸렀다. 나도 인자 아들 없는 셈 치고 살란다. 연락도 하지 말고, 찾지도 말거라. 내 몫 챙겨 갖고 절에 의탁해 살든가 할란다. 이런 저런 꼬라지 안 보고 살고 싶다. 너거는 너거 알아서 살거라.”
하시면서 할머니는 자기 몫의 재산을 챙겨 떠나버렸다. 소문에는 영감 얻어 갔다지만 꼭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명절 때면 집에 들르곤 하셨다. 늘 염주를 주렁주렁 걸고, 회색 법복 차림이니 아무래도 절에 의탁하여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집을 떠나자 완전 자유방임이 되었다. 간섭할 사람이 아무도 없자 아예 두 살림 하는 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젊은 여자랑 살림을 차리고 살다가 여자가 떨어지거나 돈이 떨어지거나, 아버지 자신이 여자가 싫어질 때면 잠시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다시 새로운 여자 꿰 차고 나갔다. 어머니는 그 때마다 딸 하나를 더 안아야 했다. 어쩌자고 한숨만 쉬면서 그런 아버지를 말릴 생각도 않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내가 아는 아버지의 여자만 해도 열 손가락이 다 찰 지경인데도 이상한 것은 그렇게 여러 여자를 거느려도 아들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여자든 아들만 낳았다 하면 어머니와 당장 이혼하고 새 장가 들겠다고 호언하는 아버지건만 어찌된 셈인지 아들을 낳았다고 찾아오는 여자는 없었다.
딸 때문에 울화병을 앓던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어머니 앞으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삼천 평 밭을 절대로 아버지가 손을 댈 수 없도록 했다. 외삼촌의 동의가 있기 전엔 팔 수 없는 물건으로 묶어 둔 것이었다. 그러니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애가 탔다. 그 삼천 평은 돈 덩어리였다. S도시가 커 가면서 그 도시 인근에 있던 산비알이 알짜배기 주택지로 부각되자 부동산업자들이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우리 집은 전원주택이나 전망 좋은 아파트를 지을 장소로는 적격이었다. 앞이 확 터인 전망만이 아니다. 멀리 도도하게 흐르는 푸른 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하룻밤 자고나면 땅값이 눈 뭉치처럼 불어났다.
더구나 아버지는 돈이 필요했다. 나이 오십 줄에 앉자 돈이 없으면 여자도 오래 붙어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젊은 여자든, 늙은 여자든, 돈, 돈, 돈이면 만사형통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어머니를 구워삶아 그 노른자위 땅을 팔아 자기 잇속을 챙겨야 했다.
그러나 수십 년을 당해 온 어머니도 만만찮았다. 젊어서야 어떻게든 아버지 마음을 돌려보려고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했지만 ‘저 화상 저 병은 다리에 힘이 빠져야 없어질 병이니 고칠 재간이 없는 기라.’ 하시면서 체념한 후로는 아버지가 어떤 사탕발림을 해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아니잖소. 구야한테 물어보소.’ 하면서 슬쩍 외삼촌 핑계를 댈 뿐이다. 아버지가 아무리 화를 내도 나사가 풀린 여자처럼,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웃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고, 화도 내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가 온 날은 어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니는 우리들을 아래채 창고 방으로 내몰았다. 위채는 어머니와 아버지 차지가 되었다. 우리 역시 눈이 빛났다. 공부벌레인 막내만 빼고는 대환영이었다. 우리는 화투짝을 돌렸다. 막내는 언니들 틈에서 숙제도 못한다면서 부엌방에 떨어졌다가도 슬그머니 우리 사이에 끼어들곤 했다.
일단 우리끼리 모이면 신바람이 났다. 더 좋은 것은 옆방에서 밤새도록 끙끙대는 어머니의 신음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었다.
아래채 창고는 일꾼들을 위해 만든 방이었다. 방 하나에 농기계를 넣어 두는 창고가 딸린 집으로 밭 가운데 있었다. 일꾼들이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몸을 씻을 수 있는 방으로 만든 것이었지만 우리들의 놀이방이기도 했다.
“엄마가 몇 번째 까무러치디?”
둘째 언니는 짓궂게 물었다.
중학생인 막내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눈을 흘겼다.
“괜찮아, 너도 그 정도는 알만한 나이잖아. 그런데. 너희들 신기하지 않니? 저치가 젊은 년한테 진을 다 빼서 힘도 없을 텐데. 녹용이라도 마시고 왔나? 그런데 말이야. 신기한 건 우리 엄마야, 이젠 늙은 여우라니까. 전에는 저치 자고 가면 통장 째 내 줬잖아. 그런데. 며칠을 구슬려도 안 넘어가니 저치의 속이 탈 수밖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패나 돌려 엉가.”
불쌍한 아버지, 언니와 동생들이 냉대하는 아버지지만 나는 그 아버지를 볼 때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젊어서 고생 모르고 살던 사람이 어쩌다 저 지경이 됐는지. 아내와 딸들에게 대우 받지 못하고 자신의 집보다 떠내기처럼 이 여자, 저 여자 집으로 전전하다가 돈이 궁해지면 어쩔 수 없이 돌아와 헛기침 하면서 눈치 보는 아버지.
아버지는 속이 탈 것이다. 아버지의 여자는 자꾸만 돈 가져오라 조를 테지, 직장에선 명퇴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지. 퇴직금은 이미 대출 받아 거의 바닥이 났지. 나 외에는 아버지 취급도 하지 않는 집으로 돌아오기는 죽기보다 싫을 것이고, 어쨌든 늙은 아내보다 탱탱한 삼십 대 과부의 살맛이 더 좋겠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