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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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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ul 26. 2022

52. 참 잘했어요.

참 잘했어요.     


 가뭄이 심해지면 우리는 식수 걱정을 한다. 골짝 물을 식수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골짝 물이 마르기 시작했지만 물 호스를 연결한 곳은 여전히 물이 흐른다. 가는 물줄기가 언제 끊어질지 예민해진다. 텃밭에 주는 물도 아끼고, 집안에 쓰는 물도 아낀다. 그러던 차 이상하게 흙탕물이 내려왔다. 물이 떨어졌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농부는 물 호스가 막혔는지 살피고, 밖으로 새는 물이 없는지. 물꼬를 점검할 요량으로 골짝에 들어갔다. 두어 시간 후 내려온 농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이다. 


  “뭔 일 있어요?”

  “아랫집에서 우리 호스 위에다 호스를 설치해 놨더라. 화가 나서 확 뜯어 던져버렸다. 말 한 마디 없어 그 짓을 해 놓다니. 사람이 참 염치도 없다. 사전에 우리에게 말도 안 하고”

 

 농부의 마음도 이해하고 아랫집 아저씨 마음도 이해한다. 초근목피가 목이 마른 가뭄이다. 아랫집 골짝 물은 진작 고갈 났지 싶다. 유황천인 지하수를 끌어올려 식수로 사용할 수도 있지만 식수로는 꺼림칙하다. 그 골짝은 우리 골짝보다 얕아서 물이 적게 흐른다. 예전에도 가뭄이 심할 때는 우리 집 골짝 물을 끌어다 썼다. 산에 호스 까는 작업을 할 때도 농부와 아들이 온종일 도왔었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물 호스 아래로 물이 흐르도록 홈을 파고 그 집으로 가는 물 호스를 연결해 뒀던 것이다. 두 집이 사이좋게 물을 나누어 쓸 수 있었다. 올해처럼 가뭄이 심할 때 비상수로 쓸 수 있도록 한 것이지만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물이 적으니 자연히 아래 호스로 들어가는 물이 적을 수밖에 없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아랫집 아저씨의 행위를 감정으로 따지면 이웃 간에 분쟁 날 일이다. 농촌에서는 가뭄이 심하면 이웃 간에 물꼬 싸움으로 원수를 진다는 말이 있다. 사람 마음이란 간사해서 항상 제 앞가림부터 하게 된다. 당장 아저씨 집 식수가 바닥 날 판이니 우리 골짝 물을 끌어가는 것을 당연시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에게 먼저 양해를 구한 후 아래로 물이 조금 더 많이 흐르도록 손을 봤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 집 식수 위를 다듬어 자기네 호스를 설치한 것이다. 당연히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물이 흙탕물이 될 수밖에.


  지난해부터 아래위집 두 남자 사이가 불편하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졌다고 해야 하나. 그 집 감산 일을 돕던 부부 때문에 화가 우리에게 미쳤다. 그 부부와 우리 부부가 잘 지낸다는 것이 화근이었다. 아랫집 아저씨는 그 부부가 우리 집 감산 일을 도우려고 자기네 집 감산 일을 못하겠다고 한 것이 아닐까 의심한 것 같았다. 수확 철이면 농촌은 일꾼 비상이 걸린다. 아무리 그래도 수십 년을 너나들이 하며 지낸 농부의 성정을 모를 리 없건만. 농부가 괘심 죄에 걸린 것이다. 이유도 모르고 미움을 당한 농부는 억울했다.


  “형님이 나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단감 농사짓지 말라는 소리로밖에 안 들린다. 이 참에 단감 농사 떼려치우라는 계시 같다. 잘 됐다. 고마.”

 

 그렇게 해서 단감 농사를 남에게 넘겼다. 아예 손 털어버리려다가 초보 농사꾼을 도울 겸 감산의 5/1만 농사를 짓기로 했지만 옹이 하나 박혀 있었나보다. 산속에 터 잡으면서 아래윗집이 잘 지냈다. 자주 만났고 함께 어울려 산행도 하고, 여행도 다녔던 사이다. 우리가 단감 농사 안 지을 때는 아랫집 감산을 우리 집 감산처럼 가꿔 준 농부다. 그 집 감산 구석구석 농부의 피땀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아저씨가 우리에게 그러면 벌 받지.’ 나도 괘심했지만 가장 가까운 이웃 간에 척 지면 안 될 것 같았다. 남자들이야 시간이 가야 감정이 풀리겠지만 여자들끼리는 잘 지내자. 형님과 너나들이 하지만 내 삶에 치어 살다보니 소원해진 구석도 있었다. 그러던 차, 물 때문에 또 농부의 감정이 격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농부 눈치를 살폈다.    


  “그냥 두지. 물은 생명수잖아. 나눠 먹어야지 어쩌겠어. 이 가뭄에 그 집 골짝 물이 있겠어? 우리에게 말도 안하고 우리 호스 위에 자기네 호스를 설치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고 감정이 솟지만 달리 생각해 봐. 사람은 모두 자기 잇속부터 챙기게 되어 있어. 아저씨 입장에서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만 보이는데 양해를 구하겠어? 며칠 후 장마 시작된다잖아. 가뭄이 계속되면 우리는 지하수 퍼 올려 쓰면 돼. 괜히 골짝 물 때문에 감정 상할 필요 없지 않을까?”

 

 한 생을 살면서 누군가와 척 안 지고 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누가 그랬던가. 삶은 살얼음판을 딛듯이 조심스럽게 살아야 후회할 일이 없다고. 이웃과 형제자매와 척지지 않고 어우렁더우렁 사는 것도 지혜가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현대사회는 나누기보다 제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사회다.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보시가 필요한 사회지만 우선 내가 먼저일 수밖에 없다.  ‘내가 왜!’를 내려놓으면 상대방이 편한 것이 아니라 내가 편해진다.

 

  “당신은 마음이 대천지 한 바다 같네. 당장 우리 먹을 물이 없으면 어쩔래?

  “아직 통에 물이 가득 차 있다며? 이삼일 내로 장마전선이 도래한다니까 비 오겠지.”


  농부는 말없이 나갔다. 한참 후에 후줄근해져 돌아왔다. 어디 다녀 오냐고 물었다. ‘당신이 원위치 해 놓으라며?’ 농부는 다시 골짝에 올라가 아랫집 아저씨가 해 뒀던 대로 호스를 제자리에 연결해 놓고 내려왔단다. 물이 더 잘 들어가도록 해 놓고 왔단다. ‘참 잘했어요.’ 나는 커다랗게 동그라미 그려주며 볼에 입술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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