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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Sep 04. 2022

57. 시아버님 소천하시고

시아버님 소천하시고   

 

 전화벨이 울렸다. 불을 켜고 시계를 봤다. 새벽 한 시 5분이었다. 시아버님의 임종을 알리는 전화벨이었다. 그때부터 농부와 나는 꼬박 밤을 새웠다. 농부는 형제자매에게 연락하고 어디로 장례식장을 정해야 하는지 의논하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장례식장에 전화해서 시아버님의 육신을 영안실로 옮기는 작업 등을 끝내 놓고 어두운 마당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렇게 가실 것을. 마지막 불꽃이었구나. 눈물도 안 났다.


 예상했었지만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 믿을 수가 없었다. 중환자실로 옮기고 임종 면회도 다녀왔고 다음 날 오전과 오후에 전화했을 때도 정신이 온전하셨다. 간호사들이 ‘할아버지께서 너무 힘들게 하셔요.’ 하소연을 할 정도로 괌도 지르시고 화도 내셨던 어른이 운명하셨다니. 저승 가기 싫어서 그렇게 안달복달하셨는데. 저승사자가 간단하게 모시고 가 버리셨다. 시아버님은 끝내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지 싶다. 엊그제 뵈었을 때도 당신이 빨리 낫기를 바라셨다. 남기실 말씀 없느냐고 물었을 때도 숨쉬기 힘들다는 말만 하셨다.


 결국 마지막 유언도 없이 떠나셨다. 시아버님의 영혼이 내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다. 결국 농부가 맏상제가 해야 할 일을 도맡아 했다. 날밤을 꼬박 새우고 장례절차를 따랐다. 시아버님 유언처럼 선산으로 모시기로 했다. 형제자매들은 모두 국립묘지에 모시자고 했지만 평소 시아버님은 죽어도 국립묘지에는 안 가시겠다 하셨고, 화장도 싫다 하셨다. 부모님 계신  선산에 가겠다고 하셨다. 농부는 아버님 유언을 따르자고 했다. 당신 들어갈 묏자리까지 다듬어놨으니 선산으로 모시는 것이 자식의 마지막 도리라고 했다. 시부모님을 모신 사람이 우리 부부요. 마지막 효도를 한 사람도 우리 부부였다. 


 장례식장도 우리 고장으로 정했다. 코로나가 만연하고 있는 시점이라 문상객이 많이 올 것 같지 않았고 오가기 번거로우니 선산 가까이에서 장사를 지내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오후에 가족들이 모두 도착했다. 장례문화가 언제부터 장례식장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전통이나 돌아가신 분에 대한 애도 같은 것을 느낄 틈도 없었다.


 오후부터 띄엄띄엄 문상객이 오기 시작했다. 문상객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로 이틀을 보냈다. 모두 피곤에 절었다. 꽃상여 타고 가신 친정아버지를 생각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꽃상여를 만들고 소리꾼이 상여 앞에 서서 요령을 흔들며 선창을 하면 상두꾼이 따라서 만가를 불렀던 기억도 친정아버지 초상 칠 때가 끝이었다. 아버지를 친정 산으로 모셨었다. 가파른 산길을 꽃상여를 멘 상두꾼이 구슬픈 만가를 부르며 앞섰고, 그 뒤를 자식들이 상복을 입고 짚신을 신고 울면서 따랐었다. 친정엄마는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렀고 생장을 원했지만 화장을 해서 아버지 묏등 곁에 뿌렸다.   


 요즘 세상에 화장이 보편화됐다면서 죽은 사람이 뭘 알겠느냐며 모두 화장을 하라고 했지만 농부는 아버지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고 했다. 생장이었다. 선산은 멧돼지가 봉분을 파헤쳐 해마다 사토를 하는데도 농부는 시어른이 원하신 대로 장례절차를 밟았다. 맏형이 있지만 농부가 맏상제 노릇을 했다. 손님들도 거의 농부의 손님이었다. 물론 우리 고장에서 장례를 치르기 때문이겠지만 어떤 지인이 농부에게 잘 살아왔다고 칭찬했다. 부조금은 장례를 치르고도 남아 시어른의 49재를 모시기로 했다. 


 삼오가 지났다. 내가 다니는 절에 49재를 올렸다. 9월 1일이 첫 재였다. 첫 재를 지내고 돌아온 날 오후, 서쪽 하늘이 참으로 아름답게 물들었다. 스님도 절에서 아름다운 무지개 사진을 찍어 보내주셨다. 아버님이 참 복이 많으셨다면서. 스님도 그 절에서 쌍무지개 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면서. 시아버님도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극락으로 드실 준비를 하신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 살아계실 때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도와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완고하시고 독선적인 어른이라 바꿀 수가 없었다.


 어떤 분이 그랬다. 아흔여섯 생신상도 받으셨고, 생신 달에 돌아가셨으니 천수를 누리고 가셨다고. 당신 명대로 살다가 가신 분이라고 하셨다. 나 역시 시아버님께서 오래 이승에 머무실 것 같지 않아 화를 내도 받아들였었다. 어쩐지 이승에서 마지막 생신일 것 같아서 비대면 되기 전에 생신 밥을 챙겨 면회를 갔었다. 시아버님 밥숟가락 위에 생선살도 올려드리고 나물도 올려 드렸었다. 시어른께서 찰밥을 좋아하셨다. 잡곡을 섞어 지은 찰밥에 쇠고기와 조갯살을 넣은 미역국을 참 달게 드셨다. 복날은 삼계탕에 전복과 인삼을 듬뿍 넣어 찹쌀 죽을 끓여다 드렸었다.


 시아버님 돌아가신 후 초상 치는 내내 새벽꿈에 두 번을 뵈었다. 처음에는 표정이 안 좋으셨지만 이틀 뒤에는 깨끗한 옷을 입고 지나가셨다. 당신이 이승을 하직한 것을 인정하신 것 같아서 내 마음도 편하다. 49재 첫 재를 지낸 날 하늘에 쌍무지개가 열려 시아버님 영혼을 모신 절을 비추었단다. 무지개가 핀 사진만 봐도 ‘너희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 좋은 일만 있을게다.’ 하실 것 같다. 부처님의 인도로 극락정토에 드신 시아버님을 그려보며 ‘아버님 우리에게 남은 나날 알차게 살다 아버님 뵈러 가겠습니다. 그곳에서는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게 지내시며 하고 싶은 것 다 하십시오. 아버님 뵈러 갈 때까지 잘 지내십시오.’이런 소원을 빈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기쁨이지만 한 생명이 떠나는 일은 슬픔이다. 장수하셨으니 호상이라 하지만 아직 믿기지 않는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시아버님이 거신 전화 같다. 전화기를 들면 금세 ‘내다.’ 화난 목소리일 때도 있지만 기운이 쑥 빠진 목소리일 때도 있었다. ‘이러다 내가 죽겠다.’하시며 이래라저래라. 이것 챙겨 달라 저것 챙겨 달라. 요구하시고 분부하실 것 같다. 그 몸으로 집에 오시면 하루도 못 견디신다고 하면 역정부터 내시던 시아버님이셨다. 


 그 시아버님께서 갑자기 간수치가 뚝 떨어지고 저체온 증이 오면서 중환자실로 모셨고 밤중에 병원에 달려가 뵙고 온 지 하루 지나가셨다. 원인불명 급성 폐렴이었다. 음력 7월 29일 새벽 한 시 오 분에 임종하셨다. 3일장 지내고 탈상하고 49재 올렸다. 양력 9월 1일 산청 아름다운 절에서 첫 재 지냈다. 제사는 맏상제께서 모시기로 했다. 음력 7월 28일이다. 시아버님 제삿날도 잊을까 봐 적어두는 셈이다.


 호상이라지만 나는 아직 눈물 한 방울 못 흘리고 있다. 농부 역시 하루하루가 힘든 얼굴이다. 시어른께 할 만큼 했다지만 가신 어른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지난 세월, 두 노인 모시다가 지친 나는 한 발 물러섰다. 당신의 손발처럼 움직이던 며느리가 한 발을 빼자 노발대발하셨던 어른 아닌가. ‘아버님, 저 잘했잖아요. 저 같은 며느리 없잖아요. 호강받으실 만큼 받고 가셨잖아요. 저 할 만큼 했어요. 아버님도 인정하시죠?’ 나는 허공을 향해 소리친다. 내가 시아버님께서 바라는 대로 한 집에서 모셨다면 이렇게 갑자기 떠나셨을까. 이것은 남은 자의 고뇌 일지 모른다. 아버님 저승에서는 부디 편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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