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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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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Aug 22. 2022

56. 밤과 낮은 돌고도는데

밤과 낮은 돌고 도는데   

  

  남의 자식들 결혼 소식을 들으면 쓸쓸해진다. 우리 집 남매도 꽉 찬 나이다. 서른 넘어 결혼했던 우리는 아이들이 늦다. 친구들 대부분 할아버지가 되고 할머니가 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일찍 며느리나 사위를 본 친구는 손자 손녀가 중 고등학생도 있다. 결혼을 하라마라 할 처지도 아니지만 짝을 만났으면 좋겠다.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다. 짝을 만나 가족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키워봐야 인생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간접경험보다 직접 경험에서 배우고 깨치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삶의 리듬은 항상 맑음일 수 없다. 흐리기도 하고, 맑기도 하고, 비도 오고, 바람도 분다. 며칠 전부터 자꾸 마음이 까라진다. 우울한 기운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하지만 뭔가 빠진 것처럼 허전하다. 촌부로 늙어가는 시점에 선 나를 돌아보기 때문일까. 애면글면 매달리고 싶었던 글쓰기조차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하다. 쓰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나. 여태 내가 써 온 글을 들추면서 부끄러워졌기 때문은 아닐까. 나를 까발리는 글쓰기를 하지 않았나. 내 글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가족이 아닐까.

 

 독서에 대한 목마름조차 무의미해지는 일상이다. 틈만 나면 책을 잡던 습관조차 무의미해진다. 읽은 책을 아무 페이지나 펴 읽다가도 머릿속은 책에서 떠나 낯선 자리를 헤매고 있다.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를 확 끌어당기고 매혹시킬 수 있는 것이 없어져버렸다. 항상 진취적이고 무슨 일이든 벌여 고생하는 농부를 보면서 천성이라는 생각을 해 왔다. 그 열정이 좋다. 갖고 싶은 마음,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직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뜻이다.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실천은 안 하고 있다. 문서란에 든 쓰다만 소설을 마무리해야지. 그 생각은 꾸준히 하면서도 쓰다만 소설을 들추기가 귀찮다. 

 

 막내 시누이가 전화를 했다. 농부의 병에 대해 이제 알았다면서 서울 큰 병원에 예약을 하겠단다. 그러라고 했다. 앞으로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노인이 될수록 몸의 모든 기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눈 역시 계속 나빠지지 좋아진다는 보장은 희망일 뿐이다. 다음에 후회 안 하게 진료를 받아볼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시누이가 서울 큰 병원 신경안과 전문의의 검사를 받도록 예약을 해 놨다니 고마운 일이다. 지방과 서울의 의술 차이는 십 년 정도 난다는 말을 들었다. 전문분야에 유명하다는 의사는 대부분 예약이 꽉 찼단다. 한 달 후에 진료가 가능하단다. 

 

 현대는 의술이 좋아져서 수명도 길어졌지만 오래 산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구구 팔팔이 삼사는 희망사항일 따름이다. 노인도 자식도 고단한 노후가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부모 자식 간에도 배우자 간에도 마찬가지다. 일본 영화를 봤다. ‘행복한 목욕탕’이던가. 여고생인 딸을 가진 목욕탕 안 주인이었던 여자가 말기 암으로 죽어가면서 지혜롭게 죽음을 준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 마음으로 모아주고 가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주변 정리를 착착했지만 마지막에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모습에서 인간의 본모습을 본다.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갈 것이다. 누가 죽고 싶겠는가. 안 아프고 싶고 안 죽고 싶은 것. 

 

 내가 가끔 우울해지는 것은 늘 몸이 천근 같기 때문이다. 내 몸을 내 맘대로 활발하게 움직이지 못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짐이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그대로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또 하루를 살아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도 한다. 우울의 씨는 오래전에 내 속에 심어져 있어서 그럴까. 여고시절에도 내 별명은 허무주의자. 즉 니힐리스트였다. 니체, 투르게네프, 헤겔, 도스토옙스키 등등, 그들의 작품에 심취하면서 허무주의에 빠졌던 것인지 모른다. 이십 대에 서른까지만 살고 죽겠다고 선언했었고, 서른이 넘자 새 인생을 살겠다고 농촌총각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촌부로 파묻혀 환갑을 지나면서 이제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을 한다.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싶고, 내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정돈해 놓고 죽고 싶다. 더는 나를 내 보이는 것도, 물건을 사 들이는 것도 사절하고, 있는 것 소비해서 없애기에 초점을 맞춘다. 꼭 필요한 것 외엔 안 사기를 실천하고 싶은데 농부를 보면 아직도 새로운 것에 강한 애착을 가졌다. 그 진취성이 부럽기만 하다. 나는 왜 삶에 대한 애착을 못 가질까. 그동안 너무 누르고 살아서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닐까 반문해보기도 한다. 

 

 도서관에 책 빌리러 가야지 한 지도 오래되었다. 법정스님의 수필집을 다시 들추거나 아들과 딸 서재를 뒤적거려보지만 재탕 거리 책 읽기다. 몰입이 어렵다. 밤과 낮은 돌고 도는데 사람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는 사실만 보인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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