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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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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Sep 17. 2022

58. 그 숲에 아린 추억 한 줄 엮으며

그 숲에 아린 추억 한 줄 엮으며   

  

 오랜 가뭄으로 골짝 물이 바짝 말라버리는 것을 보면서 마음까지 쩍쩍 갈라지던 참이었다. 동네 사람 한 둘만 모여도 ‘가물어도 너무 가물다. 기우제라도 지내야 하지 않을까.’하는 말이 회자되었지만 추수철이 임박해서는 아무도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추수 끝날 때까지 비가 오지 않는 것이 농부를 돕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 추수를 하고, 논을 갈아엎어 마늘과 보리를 심은 농가에서는 ‘이제 비 좀 오면 좋겠다.’하고, 아직 짚을 걷어 들이지 못한 축산농가에서는 ‘며칠만 참았다가 우리 일 끝나고 비 오면 딱 좋겠다.’ 모두 자신의 입장에 서서 비를 기다렸다.

 고대하던 단비가 내리는 날 아침, 나무 이파리에 매달린 영롱한 눈물방울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생각 같아서는 마당에 나가 온몸으로 비를 맞고 싶었지만 이성이 말렸다. 공기 중에 떠돌던 미세한 먼지가 모두 씻겨 내려올 텐데. 비가 아무리 반가워도 그건 삼가야 될 일이야. 창가에 서서 촉촉하게 젖어가는 숲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비요일은 쉬는 날이야. 나도 하루 쉬어야겠다.”

 “그러세요. 아빠, 엄마랑 단풍 구경이나 다녀오세요.”

 남편의 말에 딸이 더 반겼다. 딸 역시 어미의 빗길 운전이 조심스러웠나 보다. 일을 쉬겠다는 아비 말에 대 환영을 했다. 

 그렇게 셋이서 집을 나섰다. 딸을 학교 앞에 내려주고 그 길로 가을여행을 떠났다. 행선지는 이미 남편의 머릿속에 있었던지 아내에게 묻지도 않고 지리산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마음이 싸하니 아파왔다. 어머니 사십 구제 지내고 처음 가는 고향 길, 가을 접어들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어머니 생각에 눈시울 적시는 아내를 배려하는 남편의 마음이 고마웠지만 퉁명스럽게 한 마디 했다.

 “요즘 난 자꾸 엄마가 그리워. 그렇게 가실 걸 알면서 어찌 그리도 매정하게 정 떼고 가셨는지. 그냥 내가 이해하고 모실 걸 후회돼. 마지막에는 나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셨잖아. 사실 그때 난 그런 엄마가 미웠어. 딸 형편은 전혀 생각해주지 않고 당신 생각만 하니까 섭섭하기도 했었지. 아들한테 짐 되기 싫다면서 딸에게는 짐 되려고 하는 엄마가 야속하기도 했지. 그렇게 귀애하는 아들과 며느리한테 가서 살다 가시라고 냉정하게 말했었지.”

 고향마을이 눈에 들어왔지만 고개를 돌렸다. 북망산 가고 없는 어머니의 피땀으로 지은 집을 바라볼 수 없었다. 빈집으로 있는지, 언니나 동생 내외가 가끔 기거하다 가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집은 이미 어머니와 함께 내 가슴 밑바닥에 앙금으로 가라앉은 집이었다.

 고향 마을을 등지고 지리산 대원사 계곡으로 들어갔다. 가뭄이 극심한 남녘이지만 깊은 골에는 여전히 우렁우렁 맑은 물소리 들려오고, 숲은 옛 모습 그대로 아늑하고 정겨웠다. 어머니 손잡고 걸었던 길, 어머니의 추억이 알록달록한 나무 이파리처럼 내려앉아 있는 길, 어찌 어머니를 추억하지 않고 그 길을 걸을 수 있으랴.

 옛날에 저기에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어. 커다란 바위를 띄엄띄엄 놔 놓았었지. 비만 오면 징검다리가 넘쳐서 건너지를 못했어. 일제강점기였대. 지리산에 자생하는 아름드리 소나무, 참나무, 잣나무를 무작 배기로 베어 냈었대. 모두 일본으로 실어갔다더군. 일본 집이 모두 나무잖아. 그러니 우리나라 강산이 온통 벌거숭이가 됐지.

 봄이었대. 어머니는 지리산 깊은 골까지 나물을 뜯으러 다니셨대. 나물을 한 보따리 뜯어서 이고 내려오다 징검다리 앞에서 다리 쉼을 했대. 그때 옆에 무슨 시커먼 보자기가 놓여 있더래. 뭔가 싶어 풀어봤더니 돈 보따리였다 데. 산판에 일하는 일꾼들 품삯을 챙겨 가던 산판 감독이 잃어버린 거였어. 그걸 나물 보따리에 숨겨 오고 싶었지만 어찌나 간이 떨리는지 그걸 들고 일어서지를 못하겠더래. 어머니는 그것을 저 쪽 큰 바위 밑에 숨겨 두고 징검다리를 건너서 내려왔다더군. 그때는 이 숲길이 작은 오솔길이었을 거야. 겨우 달구지가 지나다닐 수 있는 그런 길이었을 거야. 벌목한 나무를 실어 나르던 것도 달구지였겠지. 무거운 나물 보따리를 이고 잰걸음으로 산길을 내려오는데 누가 막 뒤에서 부르더래.

 “이보오, 아주마이, 아주마이 그게 좀 서 보소.”

 어머니는 나물 보따리를 이고 돌아보니 한 남자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달려오더래. 어머니는 직감으로 ‘돈 보따리 찾으러 왔구나.’ 느꼈다더군. 어머니는 나물 보따리를 길섶에 내려놓고 사내를 기다렸대. 그때는 남녀가 유별하니 산속이라 겁도 나고, 혹 순사가 당신을 잡으러 오는 게 아닌가 싶어 오금이 저려 걸음이 안 떨어지더래.

 남자가 어머니 앞에 오더니 다짜고짜 나물 보따리를 풀어 보더래. 

 “와 그라는 교?”

 “아주마이 앞에 누가 또 가는 거 안 봤소?”

 “나야 모르지요.”

 “참말로 못 봤소? 이거 낭패로세. 참말로 낭패로세.”

 “와 그라는 교? 무슨 일인 교?”

 “일꾼들 품삯 줄 돈 보따리를 잃어버렸소. 저 우에 물가에서 쉬어 갔는데. 짐 보따리를 속에 돈 보따리가 빠져버렸소. 인자 나는 참말로 죽은 목숨이요.”

 “그 많은 돈을 그리 허술히 취급했으니 이자 삐도 싸요. 거기 옆에 큰 바구 밑을 뒤져보소. 필시 보따리가 있을 기요. 누가 주 갈 것 같아서 내 거기다 싱카 놓고 왔소.”

 “아주마이, 참말이오? 고맙소. 참말로 고맙소. 내 목숨 구해 준 거나 진배없소.”

 남자는 왔던 길을 되짚어 바람처럼 사라졌다 하데. 

 어머니는 그제야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면서 길섶에 풀썩 주저앉았다데.

 도둑질도 간이 커야 하고, 남의 등 쳐 먹는 것도 타고나지 않으면 못한다고 하시더군. 그때 그만 모르쇠로 일관했다가 차후에 찾아서 논밭이라고 몽땅 사놨더라면 벼락부자 됐을 거라고. 간이 작아서 들어온 복도 놓쳤다고 아깝다 하셨어.

 나는 단풍이 곱게 물든 대원사 계곡을 오르며 연신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남편이 듣든지 말든지 주절주절 어머니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젊었을 적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었던 숲 길, 머리가 하얗게 센 어머니를 모시고 왔던 기억, 승용차에서 내리면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 두 걸음 어렵게 떼면서도 걷고 싶어 하셨던 그 길, 그 길을 나는 한 우산 속에 남편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추억 하나하나가 빗방울이 되어 뚝뚝 떨어졌다. 어머니와 마지막 다녀간 것이 지난해 가을이었든가. 감 따서 외손자 대학 입학금 만들어 주겠다고 하시더니 감 딴 돈 아들과 며느리에게 다 주고 미안해서 막내딸을 바로 보지 못하셨던 어머니, ‘인자는 돈 모아 우리 권이 대학 등록금 보태 주 끼다. 내가 봄까지만 살모 그리 할 끼다.’ 그렇게 소원하시던 대로 꽃피고 새 우는 춘 삼월에 돌아가셨지만 며느리 눈치 보며 자리보전하고 누웠던 어머니는 그 원 못 푸시고 눈 감으셨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들어온 저승 노잣돈 중에 일부를 언니가 떼어주었다. 아들 등록금 딱 그만큼이었다. 어머니는 죽어서도 막내딸에게 했던 당신의 약속을 지켜주고 가신 것이었다. 어머니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대원사 일주문에 드니 염불소리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법당에서 어느 영혼의 사십 구제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상복을 입은 바깥 상주와 안 상주의 표정이 진지하고 엄숙했다. 가신님이 호상이었다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한 번 왔다 한 번 가는 길, 어머니의 여든 한 해도 그렇게 스러져갔지만 내 마음속에 있는 어머니는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단풍 곱게 든 지리산 대원사 계곡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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