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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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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Oct 07. 2022

62. 대추를 만지며

대추를 만지며     



 쪽마루에서 말라가는 대추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많다. 처음 대추나무에서 따 온 것들을 물에 씻을 때는 연둣빛 대추가 더 많았다. 알이 굴고 맛도 달았다. 깨끗이 씻은 대추를 그물망에 담아 쪽마루에 널었다. 연두색과 적갈색으로 알록달록하던 것들이 이삼일 사이 대부분 대추의 본 색깔인 붉은 적갈색으로 변했다. 표면이 탱탱하고 반질거리던 것들이 노인 피부처럼 탄력을 잃고 주름이 진다. 윤기 잃어가는 내 피부를 보는 것 같다.


 대추를 뒤적거리다 아직 탱탱하고 탄력 있는 것을 주워 깨물어 본다. 식감이 첫날 같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 햇살과 바람에게 물기를 빼앗기고 조금씩 쪼그라든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잘 말라간다는 것, 잘 말라야 대추 본연의 제값을 한다는 것을 생각하며 사람의 길을 반추해 본다. 사람도 잘 익어가야 한다는 것, 잘 쪼그라들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한다. 


 대추가 잘 익어 수확할 때 사람으로 치면 지천명이 아닐까. 지천명이 되면 하늘의 뜻을 알 나이라고 했다. 대추는 지천명의 뜻을 알까. ‘식물도 생각한다.’ 피터 톰킨스의 책을 생각한다. 그 책을 읽고 어찌나 좋은지. 두고두고 볼 책의 목록에 넣었었다. 대추도 생각한다면 이런 주파수를 보내지 않을까. ‘우리 다 익었어요. 서둘러 따 주세요. 지금 아니면 너무 익어서 물러지거나 벌레가 먹거나 떨어져서 썩어요. 서둘러 주세요.’ 대추나무 곁을 지나치면서도 무심했던 농부가 그 주파수를 느끼는 순간 대추나무가 눈에 들어오고 익은 대추가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닐까. 농부가 적기에 대추를 따 왔기에 대추는 대추로서 대접받을 수 있었다. 


 사람은 어떤가. 지천명이 되어도 앞만 본다. 하늘의 뜻이 어떤지 알려고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천명이 되면서 몸의 기능은 내리막길로 돌아서는데 마음은 더 높은 곳만 향하는 것이 대추와 사람의 차이는 아닐까. 대추는 익어가면서 고개를 숙이지만 사람은 지천명을 지나면서 고개를 더 빳빳하게 드는 것은 아닐까. 누가 나이 먹는 것을 늙어간다고 하지 말고 익어간다고 말하라 하던가. 대추는 익어갈수록 고개를 숙이고 맛도 향도 들지만 사람은 익어갈수록 아집만 늘고 허세만 늘어가는 것은 아닐까. 대추처럼 잘 익어가고 잘 여물어 제 값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젊어서는 우아하게 늙고 싶었다. 이순 후반에 들어선 지금의 나는 우아하게 늙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차 모르겠다. 외모를 가꾸고 겉모습을 꾸미는 것이 허세일지라도 자신을 가꿀 수 있다면 잘 늙어가는 것이 아닐까. 아니, 잘 익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노인 대열에서 섰어도 자신을 잘 가꾸고 사는 사람을 보면 존경스럽다. ‘저렇게 가꿀 줄 알아야 하는데.’ 긍정을 하면서도 정작 나는 꾸밀 줄도 가꾸지도 않는다. 자연 그대로 늙어가는 중이다. 이유는 화장과 옷으로 허세를 부린 노인을 보면 내가 더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쪽마루에 널린 채 익어가는 대추 중에 탱탱한 것을 골라 맛나게 먹으면서 사람과 대추를 비교하고 있는 나를 보고 내가 웃는다. 대추가 굵고 맛나 보이고 탱탱한 것에 먼저 손이 가듯이 사람도 외모를 잘 가꾸고 옷을 잘 입은 사람에게 먼저 눈이 갈 것은 정한 이치다. 얼마 전, 영국 여왕의 서거에 따라 조문 순방길에 올랐던 대통령 부부를 생각한다. 나라 망신시킨 조문이라고 혹평을 받았다. 그게 다 대통령 부인의 지시 아니었겠느냐고 뒷 담화가 끊이지 않는다. 대통령보다 더 관심 대상이 된 대통령 부인, 정치계 인사들의 말 말말이나 일반 서민들 말 말말이나. 내가 맛나 보이고 잘 익은 탱탱한 대추에게 먼저 눈이 가는 것과 진배없다는 사실이다. 


 대추를 만지작거리며 놀자 모기가 따끔하게 일침을 준다. 군침 그만 흘리고 그냥 가시라고. 만진다고 빨리 마르는 것도 아니라고. 햇살과 바람과 시간을 넉넉하게 줘야 속까지 알차게 마를 것이라고. 잘 말라야 보약이 된다고 자꾸 침을 준다. 일요일 하루를 대추와 놀았다. 가을색이 찾아드는 산그늘에 황혼이 걸렸다. 참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산골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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