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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Sep 24. 2022

61. 류인혜 수필집 <수필이 보인다>

<서평>

 <서평>     

 류인혜 수필집 <수필이 보인다>

          소설가 박래여    

      

 1. 들어가며     


  류인혜 수필가의 최근 작품집 <수필이 보인다.>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작가는 1982년<한국 수필> 겨울 호에 수필 ‘하늘’로 초회 추천을 거쳐 1984년 봄 호에 수필 ‘우물’로 추천완료 했다. 그동안 수필집과 시집 등, 작품집 여덟 권을 상제했다. 이번에 나온 아홉 권 째 수필집 <수필이 보인다>는 세 번째 수필집 <순환>을 낸 이후 지면에 발표한 작품 중 백미만 뽑아 한 권으로 묶었다고 책머리에 전한다. 감히 선생님의 작품을 논하기엔 턱 없이 부족하지만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과 수필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수필이 보인다>에 수록된 작품의 품격을 쓰지 않을 수 없다.


 2. 수필이 보인다.     

 

 류인혜 작가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른다. 2006년 칠월이었다. 전국 농어촌 여성문학회 하계 모임에 강사로 초빙되어 오셨다. 문경 깊은 골에서 담배 꽃을 처음 본 날이기도 하다. 선생님과 문우들과 산책길에서 만난 꽃, 소로 옆 비탈 밭이 온통 꽃밭이었다. 작은 나팔꽃을 닮은 듯하고, 천사의 나팔꽃 모양을 닮은 꽃, 연분홍 꽃이 어찌나 예쁜지 넋을 놓고 봤다. 연초 꽃, 즉 담배 꽃이라 했다. 농가에서 재배하는 담배를 연초라 한다. 

 

 <수필이 보인다>작품들 속에 든 작가의 모습이 연초 꽃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연초 꽃 향은 어떤가. 복숭아꽃이나 라일락꽃처럼 매혹적이지 않지만 은은한 담배 향이 난다. 담배 향이 진하면 싫겠지만 연초 꽃에서 나는 담배 향은 은은하다. 한번 맡아도 기억에 남는, 뿌리칠 수 없는 향기라고 해야겠다. 작가의 단아하고 여성스러운 모습과 단단하고 끈끈한 고집과 변덕스럽지 않은 올곧음은 쉽게 볼 수 없는 연초 꽃을 닮았다.  

 

 수필은 작가의 삶과 인격을 반영한 글이다. 수필집 속의 어느 작품을 읽어도 작가의 단아한 모습과 신의 은총 속에서 글을 쓰는 모습이 그려진다. 책머리에서 ‘수필은 삶을 따라가며 무르익는다. 수필을 읽어 진솔한 내면을 대하며 공감하고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수필은 삶의 가시마저 즐거움이 되도록 성화의 과정을 거친다. 수필은 만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희망을 전한다.’고 말한다. 내공 없이 어떻게 수필의 향기를 피우랴. 


  작품집에 수록된 수필 전체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깔끔하다. 군더더기 없다. 물이 흐르듯 사유의 길을 간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나는 책상 앞에 반듯하게 앉아 글을 쓰고 계신 작가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던가. 감정보다 이성이 앞선 차분한 글이다. 직유법보다 은유법으로 개인적 아픔조차 부드럽게 승화시킨다. 작가의 말처럼 수필은 이웃끼리 도란도란 나누는 편안함이어야 하고, 이웃들이 밥을 먹듯이 친근함이 배인 글이다. 가끔 삶의 치열함이 배인 글도 읽힌다.

 

 수필집 앞부분에 있는 작품 <내 얼굴은 자유롭다>를 읽으며 미소 짓는다. ‘세상의 사리가 알아진다는 이순을 지난 지도 한참이다. 늙어가는 대로 늙은이가 될 것이다. 얼굴의 주름은 인생을 기록한 긴 문장의 행간이 된다. 깊은 주름, 잔주름, 보기 싫던 미간의 세로 주름까지 아름다워진다. 아름다움을 향한 아무도 모를 기쁨을 간직하여 활짝 웃는다. 자유로운 얼굴, 그래서 내 얼굴은 예쁘다.’는 작가의 글에 공감한다. 

 

 촌부로 평생을 살고 있는 나는 화장법을 모른다. 맨얼굴이 자유롭다. 선크림조차 바르지 않는 민낯을 부끄러워한 적 없다. 어쩌다 거울을 보면 햇빛 기미가 까맣게 낀 촌부의 얼굴이 마주본다. 이순 지나면서 주름도 생겼다. 머리카락도 반백이 됐다. ‘얼굴 좀 가까라. 여자가 얼굴이 그게 뭐니? 옷도 좀 예쁘게 입어라. 맨 날 편한 것만 걸치지 말고.’ 언니의 잔소리를 듣는 내게 ‘내 얼굴은 자유롭다.’는 작가의 글은 자존감을 높여준다. 

 

 수필집 한 권을 탐독하고 나면 기억에 남는 몇 몇 작품이 있다.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내 촉수를 확 끌어당기는 것은 작가의 신변 이야기가 은유적이든 직접적이든 가미된 작품들이었다. 나와 비슷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작품에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삶의 아픔조차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수필의 힘이라고 했듯이. 작품들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작가의 사생활의 파편들을 줍고 그 글에서 나를 반추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 중에 <주인을 기억하는 집>이 있다. 경북의 양동마을을 돌아보며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작가가 종갓집 맏며느리가 되어 겪어내야 했던 아픔이 얼핏 스쳐간다. ‘앞만 보고 달리며 살아내기에 애쓰던 사람들은 잠시 쉴 곳이 필요하다. 명절이 되면 많은 시간이 걸려도 기를 쓰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이유가 그것이다. 사람은 키워 준 집을 그리워하고, 집도 살았던 사람의 체취를 그리워한다. 만나서 서로의 평안을 확인하는 기회가 있어야 다시 힘을 얻게 된다.’고 한다. 나 역시 명절 때면 부모님도 없는 고향집을 돌아보고 싶다.   

 

 그러나 작가는 <주인을 기억하는 집>에 그치지 않는다. ‘마음에 전해지는 엄중함으로 자손들은 가야 할 길을 걸었다. 거역하지 못하는 관습의 엄중함을 지켜왔다. 신문물에 젖은 내가 거역해 버린 그 단어가 날카롭게 와서 박힌다.’고 술회한다. 작가처럼 거역하지 못하고 평생을 촌부로 문중과 시부모님 곁에서 짓누르는 들돌 하나 머리에 이고 사는 나를 돌아본다. 아직도 나는 며느리다. 

 

 <잠자는 걸신에게>를 읽으며 박장대소를 한다. 시집오기 전에는 먹는 것에 별 관심도 없었던 나는 시집살이를 하면서 먹보가 되었다. 맛도 모르고 그냥 먹어치웠다. 지금도 먹어치우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나 자신을 향해 냉소를 보내기도 한다. 마음이 허하면 이상하게 허기가 졌다. 효자비까지 받은 집안의 내력을 줄줄 외우시며 조상을 하늘같이 모시는 시어른 밑에서 며느리는 밥이었다. 작가의 말처럼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이 몸집이 커진 걸신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걸신은 여전히 나보다 몸집이 크다. 

 

 작가가 부러운 작품도 있다. <밥 이야기>에서 시어머님의 사랑을 받은 대목이다. ‘첫아이를 가지자 어머님은 내 밥그릇 밑에다 달걀을 깨어 넣은 후 밥을 퍼 주셨다. 무심코 밥을 먹다가 뜨거운 밥 기운에 반숙이 된 달걀이 나타나 처음에는 당황했는데 여러 번 그런 일이 있고부터는 다른 사람 모르게 얼른 먹어 치우는 방법도 찾아냈다. 고부가 공모하여 밥그릇 연극을 벌인 것이다.’ 시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나는 서른두 살에 첫 애를 병원에서 낳았다. 딸이었다. 사흘 만에 퇴원을 해 시댁에 들어오니 시어머님은 부엌 먼저 들어가게 하셨다. 첫 날 미역국 한 솥을 끓여주시고 끝이었다. 옛날에는 애 낳아 놓고 모심으러 갔다면서 미역국을 산모가 직접 끓여 먹으라 하셨다. 

 

 산후조리 못해 얻은 병은 평생을 간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삼칠일은 고사하고 병원에서 다녀오자마자 부엌에 들어가 밥순이가 되었었다. 그때는 젊었고 건강했기에 산후조리 같은 것 안 해도 괜찮을 줄 알았지만 내 몸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산후풍이 들어 누렇게 떴고 갓난쟁이를 돌보며 일꾼 수발하느라 지쳐갔다. 더구나 연년 생으로 둘째까지 가지면서 내 몸은 몸이 아니라 마루타가 되었다. 시댁의 가풍이라는 형식과 격식에 얽매어 내가 나를 방치했으니 어찌 남 탓을 할 수 있으랴.

 

 그 외에도 ‘보약 밥상’이나 ‘사람의 맛’, ‘사소한 것들에의 감동’, ‘꽃 피다’ 등. ‘꽃 피다’를 읽으며 왜 내가 아플까. 뜨개질에 몰두 하려고 애쓰는 작가의 모습을 그려서일 것이다. 

 

 수필집 끝 부분에 이르면 <가벼이 자유롭게>라는 작품이 있다. 소제목 <수필의 자유로움>이라고 붙여져 있다. 수필쓰기에 대한 작가의 열정이 스민 작품이다. 거두절미하고 ‘수필이 고백문학이라는 굴레에서 생기는 선입견의 위험을 비껴가려면 소재의 선택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인생의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먼저 봐야 한다. 개인의 아픈 경험까지도 멀찍이 서서 관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수필도 무르익을 것이다.’라고 피력했다. 수필이 신변잡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 작품에서 내 수필이 보였다. 아직도 신변잡기에 머물러 글쓰기를 하고 있는. 무르익어야 할 수필이 일상생활에 잡혀 한 치 앞도 못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심안으로 봐야 하는 사물도 눈으로만 쫓고, 잡다한 일상에 잡혀 넋두리만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작가가 되려면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맞다. 읽다보면 쓰고 싶어지고, 쓰다보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사과나무를 그리며>, <수필 편지>, <사소한 것들에의 감동>등의 편지글을 읽는다. 또 <하늘마당 학교>에서는 조경희 선생님을 향한 그리움과 한국수필문학에 대한 애정을 담아 세월호 참사로 별이 된 아이들을 하늘마당 학교로 받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한다. 


 ‘선생님께서 이곳에 계신다면 대리석 같이 찬 이성으로 우리가 빠져버린 깊은 수렁을 이겨낼 방법을 찾아주실 것인데. 나이만 헛먹은 저는 슬퍼하기도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습니다. 부디 상심하고 있는 저의 손도 따뜻이 잡아주세요.’ 


  <행복한 탐색>과 <수필문단의 어머니 불혹이 되다>에서 조경희 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을 그렸다. 작가에게 조경희 선생님과의 인연은 한국 수필의 맥을 같이한다. 한국 수필 40년을 반추하는 시간, 수필의 어머니 격인 조경희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넘친다. 떠나신 분이 남긴 책을 받아놓고 다리를 뻗고 울었다는 대목에서 나도 울컥했다. 작가라면 누구나 책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존경해 마지않던 분의 손길이 스쳐간 책들이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으랴. 


  이제 가슴이 찡한 작품들 속에서 나갈 시간이다. 수필의 향기에 젖어 시간을 잊었다.     

 

3. 맺음 글     


  문학은 어떤 분야든 작가의 예민하고 여린 심성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 각자의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나 외로움, 열등의식이 있지 않을까. 물론 작가의 재능을 타고났을 수도 있지만 재능만으로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는 없다. 그 재능을 갈고 닦는 것은 작가 자신밖에 없다. 배고픔은 음식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마음 속 갈증은 음식으로 풀 수 없다. 작가가 글을 쓰는 행위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가능하다고 본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역시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의 허기를 푸는 돌파구가 책읽기였고 글쓰기였다.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성향이 강해서는 아니었을까. 현실과 내면의 치열한 싸움에서 나를 다스릴 수 있는 수단이 글쓰기가 아니었을까. 


 류인혜 작가는 수필의 본질을 ‘작가의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 적나라하게 드러남’이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인다. 적나라하게 드러남이지만 거기서 그칠 수 없는 것이 수필의 본질이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곁들여도 작품의 질이 떨어지고 포장을 하다보면 알맹이가 없는 글이 되고 좋은 점만 부각시키면 자랑 질이 되는 것이 수필이다.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린다. 작가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하는 수필은 쓸 자신이 없어 시를 택했다고 했다. 그만큼 수필은 작가의 진솔함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닐까.  


  류인혜 선생님의 <수필이 보인다.>를 읽고 나니 진짜 수필이 보인다. 앞으로 선생님의 어떤 수필이 또 나를 설레게 할까. 선생님의 무르익은 수필의 향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선생님, 문경에서 만남 이후 꾸준히 저를 챙겨주시고 안부 물어주시고 책을 낼 때마다 보내주시고, 제가 농사지은 것들을 주문해주신 선생님, 우리 집까지 다녀가시며 힘을 실어주신 선생님, 고맙습니다. 늘 건안 하십시오.’ 

 

 나는 이 지면을 통해 변함없이 아껴주시는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2022.  계간문예. 가을 호 6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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