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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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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Oct 11. 2022

63. 사람이니까.

  사람이니까.     



  그는 명상센터에 갔다. 하루 일정을 위해 새벽같이 길을 나선다. ‘거기서 명상 공부한 지 얼마나 됐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3년 됐나?’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3년이면 때려치울 때도 된 것 같은데.’ 빙긋 웃었다. 40년 가까이 부부로 살지만 그를 간파하고 사는 것 같지 않다. 하도 진취적이라서 그럴까.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유별한 사람이라 그럴까. 명상은 평생 갈까. 간화선 명상 공부를 시작했을 때 3년 정도 열심이었지 싶다. 명상과 인연을 맺으면서 위빠사나 명상도 알게 되었고 푹 빠졌다.  


  평생을 부부로 살아도 서로에 대해 알기도 힘들고 모두 이해하기는 더 힘들다. 마음 맞추어 산다는 것은 희망사항이다.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 일지>를 읽지 않아도 사람살이는 그렇다. 나이 들면서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뱉어낼 때가 있다. 누가 실수를 하는 것을 봐도 ‘사람이니까’ 이해하게 된 것도 마음이 늙어가는 증거일까. 노년층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체념 혹은 달관한 것처럼 ‘사람이니까’그런 말을 쉽게 한다. ‘사람이니까.’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정도로 살았다는 뜻일까. 

 

 사십 중반의 어떤 부부가 이혼을 했단다. 알콩달콩 잘 사는 줄 알았던 부부였다. 아이는 엄마가 키우기로 했단다. 불혹이면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나이라고 했고 지천명이면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라고 했지만 그 나이 대에 이혼율이 가장 높은 이유는 뭘까. 아이들 뒷바라지에 지치고 먹고사는 일에 지친 부부, 둘 사이는 밍밍해져 버렸고 미움과 분노가 쌓이는 시기이기도 하다. 연애할 때처럼 서로에 대한 배려도 낡아버리고 현실만 보이는 시기 아닐까. 남남이 만나 부부가 되는 것도 인연이지만 그 인연을 잘 키워가는 것도 부부 몫이다.

 

 나는 그 시기를 어떻게 넘겼을까. 부부로 만나 살면서 이혼을 생각하지 않은 부부가 과연 있기나 할까. 이혼도 용기라고 했다. 파울로 코엘로는 사랑에 빠지는 시간을 11분이라고 했다. 사랑의 지속시간은 3년이 한도라는 말도 있다. 부부란 삶의 햇수가 늘어날수록 장점보다 단점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사랑보다 미움이 자리 잡는 것은 아닐까. 부부 사이 자존심 운운한다는 것도 사치란 것을 모를 시기라서 그럴까. 그 시기에는 아이가 끈이라는 어른들 말씀이 진리다.

 

 요즘도 아이 때문에 이혼 못하는 젊은 부부가 있을까. 우리 어머니들은 부모가 맺어준 남편을 받들어 모시고 살았다. 삼종지도를 따라 사는 것이 여자의 일생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모정은 자신의 인생을 바칠 만큼 맹목적이었다. ‘요새 겉으모 이혼을 해도 진작 했제. 저런 영감하고 와 살았노 싶다.’ 그런 할머니들이 많다. ‘요즘 젊은것들은 자식 귀한 줄 몰라. 지가 우선이더라.’ 그런 말도 한다. 젊은 부부 중에 ‘둘만 행복하게 살자’며 아이를 갖지 않으려 한단다. 딩크족이라 하던가. 서로 좋아서 결혼했지만 살다가 정 떨어지면 홀가분하게 각자도생 하기 쉽다는 심리도 깔려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아이 키우기 힘든 현실이란 것도 안다. 부모가 되면 나보다 자식이 우선순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 미연에 차단하는 심리 아닐까. 이순 중반을 사는 나는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혼기가 꽉 찬 서른 중반의 남매가 아직 미혼이다. 딸은 결혼을 해도 아이는 안 낳겠단다. ‘그래도 딸이든 아들이든 한 명은 있어야 나중에 네가 외롭지 않다. 너희들 덕에 엄마가 얼마나 편하고 좋으냐. 엄마 보면서 너 같은 아이 갖고 싶지 않냐?’했더니 ‘엄마가 우리 키운다고 고생한 거는 어쩌고? 며느리 자리, 아내 자리, 엄마 자리 채우느라 정작 엄마의 인생은 제대로 못 살았잖아. 난 그러기 싫은데.’한다. ‘그래, 네 인생이니까.’ 수긍할 수밖에 없다. 

 

 점심때 이웃 형님과 짜장면을 먹었다. 참 오랜만에 만났다. 이웃에 살면서도 얼굴 보기 힘들었다. 형님도 칠십 중반이 되었고 다리를 다쳐 지팡이를 짚었다. 못 본 사이 노인이 된 모습이 안쓰럽다. 나 역시 늙었겠지. 수다가 늘어졌다. ‘형님, 우린 이미 노인이야. 남편 미워하지 말자. 남편이 미워지면 아내가 먼저 치매 온다네.’했더니 ‘그래, 이제 헤어질 수도 없으니 어쩌겠니. 안 미워하고 싶은데 자꾸 미워진다. 어쩌니?’ 그 말에 ‘사람이니까. 미워할 수도 있지. 미워한다고 현실을 바꿀 수도 없잖아. 나는 서로 반목하는 시부모님을 너무 오래 봐와서 부부가 서로 미워하는 게 너무 슬프더라.’ 그랬다. 

 

 환갑 진갑 다 지난 부부는 미운 정으로 산다는 말도 있다. 미운 정도 정이다. 나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서로 연민하며 살고 싶다. 좋은 시절 떠올리며 ‘우리에게 그런 시절도 있었잖아. 같이 늙어가는 사이잖아. 내 몸이 힘든 것처럼 당신 몸도 힘들잖아.’ 연민의 정으로 남편을 바라볼 때가 많다. ‘형님도 그렇게 살아. 그래야 치매 안 와. 남편 미워하면 내 마음이 먼저 상처받아. 그럼 나만 손해잖아.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라도 미워하지 마. 서로 위해주고 살아야지 어쩌겠어. 사람살이가 그런 거지 뭐.’ 그러면서 나는 또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수영장에 다녀왔더니 무와 배추가 눈에 들어온다. 무를 솎아냈다. 즉흥적으로 일을 벌이는 나는 무슨 일을 시작했다 하면 끝장을 봐야 쉰다. 솎은 무가 한 다래기다. ‘저걸 우짜노. 또 일 벌였네.’ 혀를 쯧 차고 팔을 걷어 부친다. 무를 다듬어서 씻었다. 냉장고에 있는 굵은 무까지 꺼내 납작납작하게 썰었다. 김칫거리를 굵은소금으로 절여놓고 마늘도 깠다. 배와 사과, 양파, 마늘, 식은 밥 한 덩이에 새우젓, 멸치젓국, 끓여 식힌 물을 약간 부어 믹스기에 갈았다. 걸쭉한 양념에 고춧가루를 풀었다. 그 사이 살짝 절여진 김칫거리를 건져 물을 뺐다. 

 

 김치 담그기는 정성이다. 재료 손질에 양념 만들기를 끝내고 버무렸다. 설렁설렁 뚝딱뚝딱하는데도 오래 걸리는 일이라 발목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 ‘나는 왜 시키지도 않는 일을 벌여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나를 책망하면서도 김치가 내 말을 듣고 맛없게 익을까 봐 겁난다. ‘김치야, 너보고 한 말 아니다. 맛나야 해.’ 통에 김치를 옮겨 담으며 토닥거린다. 김치를 담그면서 맛을 안 보고 간을 한 지도 꽤 됐다. 눈대중으로 해 치운다. 남편 입에 맞아야 할 텐데. 입맛 까다로운 남자와 사는 일이 버거울 때가 있다. ‘맛없으면 먹지 마.’ 되레 큰소리치면서도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나를 정당화한다.

 

 저녁에 집에 온 농부에게 간을 보라 했다. 맛나단다. 다행이다. 명상 공부 제대로 하고 온 모양이다. 내 입에는 맛이 없는데 맛있다고 칭찬하는 것을 보니 허세를 부리는 건가? 거짓말이든 참말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우린 '사람이니까.' 맛있지? 맛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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