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촌부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래여 Oct 22. 2022

64. 호박 넌출을 뒤적이며

호박 넌출을 뒤적이며  

   

  찬바람이 불자 애호박이 짜드라(많이) 달린다. 연둣빛 애호박이 자라는 것을 보는 즐거움을 무엇에 견주랴. 틈만 나면 무성한 호박 넌출 속을 뒤적거려본다. 호박잎을 쪄서 쌈 싸 먹는 것에도 질렸지만 호박 된장국을 끓이면 시원하다. 애호박을 부침개로도 먹고 새우젓 간을 해서 볶아도 먹고, 채 썰어 양파와 버섯과 함께 데쳐서 무쳐도 먹는다. ‘너는 반찬도 참 잘해 먹는다.’ 날마다 만나는 언니가 부러워한다. ‘애호박 두어 개 갖다 줘? 자꾸 열리네.’ 애호박 반찬을 좋아한다는 언니는 반색을 한다. 


  어제 딴 애호박 두 덩이를 갖다 줬다. ‘잘 먹을게.’ 그 말만으로도 고맙다. 애호박을 썰어 말렸다가 호박 고지로 볶아먹어도 맛있지만 자꾸 게을러진다. 칼질을 하면 팔목도 아프고 어깨도 뻐근해지기 때문이다. 자꾸 일 벌이기를 꺼린다. 지난해 말려둔 호박오가리도 있으니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이맘때 시골은 애호박이나 푸성귀가 흔하다. 찬바람이 불면 식물도 돌아갈 시기를 정확히 아는 것 같다. 사람이 자손을 남기려고 하는 이치와 같다. 무서리가 내리도록 호박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호박 넌출 속을 뒤졌더니 먹기 딱 좋은 야들야들한 애호박이 세 덩이나 나온다. 또 내일이나 모레쯤 따내면 될 애호박이 몇 덩이 보인다. 애호박 풍년이다. 누굴 갖다 줄까. 머릿속을 굴린다. 읍내 지인들에게 나누어주면 좋아할 것이다. 채소 값이 고공행진을 하면서 애호박 한 덩이에 5천 원을 웃돌았다. 음식점 운영하는 분들은 야채 값이 비싸 밥값을 올릴 수밖에 없다고 했었다. 애호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나누어주면 된다. 나는 구구셈을 하듯 보낼 곳을 챙겨본다.

 

 애호박과 호박잎을 한 소쿠리 따고는 호박 넌출에게 인사를 했다. ‘야들아, 고맙다. 잘 먹을 게.’ 살짝 입을 다물던 샛노란 호박꽃이 바름 바름 웃는다. 아침이면 활짝 열었다가 저녁이면 오므리는 호박꽃, 샛노란 속이 참 예쁘다. 저녁 반찬은 호박잎 쌈에 호박 줄기 무침에 호박 부침개다. 시골에서는 채식주의자 아니라도 날마다 채식이다. 젊어서는 육 고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나도 나이 든 것인지 채소가 좋다. 소화가 잘 돼 속이 편해서 그럴까. ‘우리가 머 무 샀나. 너거가 많이 묵제.’ 하시던 시어머님 말씀을 자주 생각한다. 나도 이미 노인이란 뜻이다. 


 “저녁엔 호박 반찬입니다. 도끼 나물 같은 거 없어도 되겠지요?”


  농부에게 일방통행으로 선언했다. 농부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가끔 기운이 없을 때는 육 고기를 먹어줘야 기운을 차린다. 육 고기 체질은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노인이 될수록 단백질 보충은 필수라는데. 식물성 콩고기를 사다 먹어볼까. 장수 노인의 식단을 보면 천차만별이다. 육 고기를 즐기는 노인도 있고, 완전 채식만 하는 노인도 있다. 과일을 좋아하는 노인도 있다. 시어른께서는 생선과 쇠고기가 떨어지면 화를 내셨지만 시어머님은 나물 반찬을 좋아하신다. 시고모님은 생선이나 계란도 안 드셨지만 아흔여덟까지 사셨다. 장수하는 노인을 보면 대부분 소식을 하는 것이 공통점 같다. 


  내 경험상 장수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두 어른을 모시면서 노인 대열에 들어서 허덕였던 며느리 자리의 고단함을 알기에 그럴까. 두 애가 ‘좀 더 사셔도 좋았을 텐데.’ 아쉬워할 수 있는 나이가 어디쯤일까. 친정 부모님의 연세가 가장 이상적인 죽음의 나이 같다. 일흔 중반에서 여든 초반까지. 그 나이쯤 되면 나도 살만큼 살았고 누릴 만큼 누렸다고 자찬할 수 있을까. 솔직히 너무 오래 사는 것은 싫다. 지금 죽는다 해도 가볍고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막상 죽는다면 마음이 바뀔지 알 수 없지만. 

 

 호박잎과 줄기를 다듬고 씻어 찜통에 쪘다. 애호박 한 덩이 양파와 썰어 밀가루에 섞었다. 된장을 넣어 간을 맞췄다. 양념장을 만들면 끝이다. 벌써부터 입맛 돈다. 노인이 되면 이와 잇몸도 부실해진다. 이가 부실하면 무른 반찬을 찾는다. 시어머님은 틀니를 두 번이나 새로 맞추었지만 시아버님은 지난해와 올 초에 어금니를 이식하셨다. ‘아흔여섯에 임플란트니.’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시어른께서는 치아가 건강하셔서 백수는 너끈하시리라 믿었다. 백 살을 코  앞에 둔 노인은 아무리 건강해도 무너지려면 한 순간이라더니 그 말이 맞았다. 


  난 두 어른의 생각에서 언제쯤 놓여날까. 수시로 헤집고 들어오는 두 어른이다. 함께 살아온 세월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겠지. 노인에 대한 좋은 추억도 나쁜 추억도 모두 거두어야 내가 편안해지겠지. 마지막까지 며느리 도리를 다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시어른께서  원하는 것을 거부하지도 못했기에 마지막까지 노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다 드렸다. 원도 한도 없이 받고 가신 어른이라는 생각 또한 변함이 없다. 

 

 어쩌면 내가 나에게 상을 주고 싶어서는 아닐까. ‘난 최선을 다했어.’ 이것도 자만심일까. 저승길 떠나신 시아버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서 일까. 삶은 희로애락으로 점철된 길이다. 지나간 것을 후회하지 않고 다가올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남은 나날을 살찌우는 일일 것이다. 에라, 호박잎 쌈이나 싸 먹자.     


매거진의 이전글 63. 사람이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