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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Nov 13. 2022

67. 단풍은 곱기만 한데.

 단풍은 곱기만 한데.   

 

  올해 단감이나 대봉이 풍년이란다. 지금 도매가격이 가장 쌀 때다. 도매보다 소매로 파는 것이 이문이 남는다. 지난해 단감농사 포기했다고 글을 쓴 탓일까. 이태원 압사 참사의 여파일까. 고공 행진한 물가 탓일까. 지출을 줄여야 산다는 사회적 불안심리 탓일까. 오랫동안 우리 집 고객이었던 분도 주문이 줄었다. 시장에 단감이 넘쳐나는 탓도 있을 것이다.  ‘올해 진짜 단감농사 안 지어요?’ 묻는 전화도 있다. 대폭 줄여서 지었다고 하면 금세 반색을 한다. 주문 들어온 것만 포장해서 보내고 나머지는 봉지 작업을 하기로 했다.


 단감농사를 대폭 줄인 올 가을은 그나마 몸이 덜 고단해야 하는데 여전히 고단하다. 식구끼리 느긋하게 일하지만 식구들 밥 차리는 것도 버겁다. 농부는 딸과 단감을 따러 가면서 포장작업을 못하게 한다. 일꾼 대서 내일 같이 하면 된단다. 간밤에 잠을 설쳤다. 잡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나이 탓인지 깊은 잠을 못 잔다. 잠을 설친 다음 날이면 그냥 고단하다.


 중년 부부가 단감을 사러 왔다. 고향집에 왔단다. 단감을 깎아 대접했다. ‘다른 집 단감은 싱겁던데. 이 집 단감은 진짜 맛있네요. 아삭아삭하고 달아요. 요즘 단감 싸던데.’한다. ‘가격은 깎아드릴 수 없어요. 다른 농가 것 사 주셔도 괜찮아요.’했다. 단감 두 박스를 사 간다. 일부러 찾아와 주신 분이라 택배비를 빼 주고 선물로 못난이 한 봉지를 드렸다. 덤은 인정이다. 우리 집 단감은 동네에서도 제 값을 받는다. 맛을 본 두 사람은 두 말 않고 주문한다. 못난이가 남아나지 않는다. 고마운 일이다.


 손님을 보내고 소설책을 잡았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집착>이다. 얇은 부피의 소설책이다. 일기를 읽듯이 술술 읽힌다. 금세 한 권을 탐독하고 싱긋 웃는다. 사랑이 식어버린 남자와 헤어진 여자는 남자와 친구로 지낸다. 한 마디로 섹스 친구다. 남자의 발기된 거시기를 꼭 잡고 잔다거나 이년 저년 쌍스러운 말도 거침없이 뱉어낸다. 칼 같은 글쓰기를 한다는 작가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소설로 녹여내기로 유명한 작가다. 


 소설 <집착>도 작가의 자서전 같은데 자서전으로 읽을 수 없다. <집착>은 헤어진 남녀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적나라한 마음의 행로를 그렸다. 나와 헤어진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알게 되면서 질투심에 사로잡혀 집착하는 과정을 그렸다. 평범한 남녀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감정이다. 이미 나와 남이 되었는데도 해묵은 감정을 들쑤시기도 하고, 남자의 새로운 여자에 대해 질투를 느낀다. 유부남을 사귀는 여자들 심리도 비슷하지 않을까. 두어 시간 만에 번역자의 후기까지 읽었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눈이 날카롭다. 칼 같은 글쓰기가 이런 것일까. 평범한 일상을 평범하지 않게 쓰는 글재주는 어떤 글쓰기일까. 


 창밖을 바라본다. 올해는 단풍이 참 곱게 들었다. 곤줄박이 암컷이 빨랫줄에 앉아 지저귄다. 새소리는 참 맑다. 단풍 든 숲은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까지 물든다. 나도 가을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앙상한 나목으로 서게 된다. 나목은 겨울 동안 몸에 힘을 저장하고 몸통을 키웠다가 봄에 기운차게 잎눈을 내밀지만 사람은 나목 같아지면 저승길 떠날 준비기간이다. 젊은 목숨들 저승길 갔는데 정정한 노인 보면 슬프다. 운동 열심히 하며 건강 챙기는 모습 보는 것이 왜 안쓰러운지. 


 아니 에르노의 <집착>을 다 읽고 <탐닉>을 잡았다. 책에 빠지기 전에 책을 덮어놓고 오늘 보낼 단감박스를 준비한다. 택배사고 없이 주문하신 분들 집에 잘 도착하기를 빌며 주소와 이름, 크기를 확인한다. 단감을 따러갔던 식구들이 들어온다. 농부는 ‘가물어서 그런지 단감이 안 큰다.’며 굵은 단감이 별로 없다고 난색을 표한다. 오늘 보낼 굵은 단감을 서둘러 포장한다. 중간 것이 많다. 저걸 대량으로 팔 방법은 없을까. 도매상에 올리는 방법이 있지만 단감이 가장 쌀 때다. 저장해 놓았다가 겨울에 파는 수밖에 없다.


 주문은 꾸준히 들어온다. 재 주문을 해 주는 사람들이 는다. 지인들에게 선물로 보내는 고객이 많다. 올해 가장 고마운 분은 인근에 사시는 시조시인 선생님이다. 거금을 투자하셨다. 어찌 아니 고마우랴. ‘농사지으며 글 쓰는 박 작가를 이렇게라도 도와줘야지. 단감이 참 맛있어요. 선물 받은 선생님들이 다 좋아해서 내가 더 고맙더라.’하신다. 순리대로 살면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준다. 농사는 농부가 짓지만 판매는 내가 맡았다. 단감을 따 들이고 선별하고 포장해서 판매하기까지 부부 합작이다. ‘도움 주신 분들 모두 복 받으세요.’ 진심을 담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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