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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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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Dec 01. 2022

70. 처연하다.

처연하다.     


 

 이제 추워지려나 보다. 바람은 시나브로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가녀린 잔가지가 애처롭다. 숲이 속을 비우니 투명하다. 한 해를 갈무리하는 나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화려하던 단풍도 칙칙하게 변하면서 바람의 힘을 빌린다. 떨어져 앉을자리, 썩어서 거름 될 자리를 찾아간다. 사람은 왜 죽을 자리를 스스로 찾지 못할까.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겠지. 


 옛날 인디언 원주민은 죽을 때를 알고 죽음을 맞을 준비를 했다고 안다. 부족 간의 차이는 있었다. 어떤 부족은 일주일치 식량을 싸서 산에 든단다. 후미지거나 평소 좋아하던 인적 드문 자리를 찾아가 오두막을 짓고 가져간 양식이 다할 때까지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고 했다. 인간도 자연이기에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고려장 설화가 있다. 부모가 칠십이 되면 자식은 부모를 산속에 버려야 했단다. 고려장 설화가 생긴 것도 효를 강요하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을까. 고려장을 없앤 것도 효의 근본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칠십 세가 된 아버지를 아들이 지게에 얹어지고 산속에 갖다 버리자 아버지를 따라갔던 아들이 그 지게를 지고 내려오려고 했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었단다. 왜 지게가 필요하냐고. 아들은 나중에 아버지도 칠십 세가 되면 할아버지처럼 지게로 모셔다 버려야 하지 않느냐고 했단다. 그때를 위해 지게를 챙겼다는 것이다. 


 현대판 고려장은 요양원이란 말을 한다. 어느 집에서 칠십 대 시어머님이 치매를 앓았다. 며느리는 시어머님을 요양원으로 모시기로 했다. 며느리의 아들이 ‘엄마도 나중에 할머니처럼 치매가 들면 요양원으로 모실게.’하는 바람에 요양원으로 모실 수 없었단다. 할머니가 이불에 똥오줌을 싸고, 불장난을 하는 바람에 며느리는 직장도 포기하고 시어머님을 모셔야 했단다. 아들은 엄마가 고생하는 것을 지켜본 후에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모시는 것이 낫겠다.’하더란다. 


 우리 집도 그랬다. 남매는 한사코 두 노인을 요양원으로 모시는 것을 반대했었다. 내가 환자가 되자 남매는 집에 오면 나 대신 두 노인을 보살폈었다. 시댁을 오르내리며 청소와 삼시 세 끼를 챙기고 병원에 모시고 다녀야 했다. 두 어른이 아흔 중반에 들자 ‘엄마 아빠는 할 만큼 했어. 할머니 할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시는 게 바람직한 것 같아. 우리에겐 할머니 할아버지보다 엄마 아빠가 소중하니까.’ 그랬었다. 지금도 두 애는 집에 오면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를 뵙고 온다. 


 남매는 시댁에서 태어났다. 오륙 년 동안 삼대가 함께 살았었다. 시아버님의 손자 손녀 사랑은 각별했다. 남매는 알고 있다. 어린 시절 함께 살아온 정은 무엇으로도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남매는 부모가 노인이 되면서 장수하는 조부모 때문에 힘들어 허덕대는 것을 봐왔다. 어느 순간 남매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젠 내려놓아도 된다.’고 했다. 두 어른을 차마 내려놓지 못한 것은 나도 노인이 되어간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마지막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가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부모와 자식이 함께 살지 않는 한 집에서 죽기는 요원하다. 


 농촌의 집은 자꾸 비어 간다. 노인이 돌아가시거나 요양원으로 떠난 집은 빈 집으로 낡아간다. 노인이 된 자식이 집을 개조해 놓고 들며 나지만 머잖아 그것조차 힘에 부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도시 살이 하던 팔십 대 노인이 시골로 들어왔다. 젊어서 난봉꾼이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마지막 의탁 처로 고향에 온 노인은 한 해가 다르게 피폐해져 갔다. 가끔 길에서 보는 노인은 말끔하던 첫 모습과 달리 후줄근해져 갔다. 친인척들이 돌본다지만 자식조차 외면한 노인을 누가 극진히 모실까. 겨우 3년 정도 버티다 돌아가셨다.  


 날씨가 추워지니 몸이 먼저 말을 한다. 늙어갈수록 친구가 필요하다는데 농촌에 오래 산 나는 사람 친구보다 자연 친구가 더 좋다. 외롭다고 느낄 틈도 없이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나야 하는 부부의 삶도 처연할 따름이다. 하루의 문을 닫는 시간, 어둠이 깔리는 마당,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본다. 아름다움조차 젊은이에게 속한 것일까. 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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